출처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6166
국내성 [國內城]
건립시기 : 서기 3년
크기 : 둘레 2,686m, 동쪽 성벽 길이 554.7m, 남쪽 성벽 길이 751.5m, 서쪽 성벽 길이 715.2m
소재지 :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輯安縣) 통구성(通溝城)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都城).
국내성(國內城)은 졸본성(卒本城)에 이어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다. 한때 국내성이 지금의 어느 곳에 해당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중국의 길림성(吉林省) 집안현(輯安縣)에 있는 통구성(通溝城)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 성은 압록강 우안(右岸) 통구 분지의 서쪽 끝에 있는데, 몇 차례에 걸친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원형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내·외벽을 잘 다듬은 네모뿔의 돌로 쌓은 석축성(石築城)으로 평면은 사각형이고, 방향은 115도이다. 동쪽 성벽의 길이는 554.7m, 남쪽 성벽의 길이는 751.5m, 서쪽 성벽의 길이는 715.2m이며, 둘레는 2,686m에 달한다.
그리고 성문은 여섯 곳이 있는데 남북에 각기 하나씩 있고 동서에 각기 둘씩 있었다. 성문에는 모두 옹문이 있었고, 동·북 두 면에 성지(城池)가 있었다. 성의 네 모서리에는 각루(角樓)터가 있으며, 4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치(雉)가 설치되어 있다. 또 이러한 석축성이 축조되기 이전에 토성(土城)이 존재했음이 확인되었다.
[내용]
국내성 안에서 몇몇 고구려 유적이 발견되었다. 지금의 시정부 부근에서 궁궐 유적지의 배초석(건물 기단)이 출토되었으며, 천연 인쇄 공장 부근에서는 기와, 막새기와, 금칠한 구리불상과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우정국과 목욕탕 일대에서는 초석들과 태세(太歲) 4년 명 막새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고구려 미천왕(美川王) 27년(326)의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 성문 안에서는 철기를 제조하던 작업장이 발견되었고 성 동북쪽에서도 또한 몇 곳의 건축 유지가 발굴되었다. 성내에서는 기와편들과 쇠솥, 칼, 활촉, 가위, 망치, 모루 등의 철제 기물, 돌도끼, 토기 등이 발굴되었다.
성 동북쪽 바깥 상무대가(商貿大街)에서는 배초석과 건축유지가 토기, 막새기와 등과 함께 확인되었다. 성 동북쪽 이수원자(梨樹園子) 유적에서는 백옥귀걸이, 금칠한 활촉, 금칠 기물 뚜껑, 금칠 걸개 등과 대량의 기와 조각과 몇 점의 기초돌들이 발굴되었다.
이 성은 그 규모로 미루어 왕궁과 관청이 있는 거성(居城) 또는 도성으로 추측되며, 유사시에는 국왕과 백성이 이곳에서 북쪽 2.5㎞ 지점에 있는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으로 피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국내성과 역시 고구려의 수도로 전해지는 환도성(丸都城)의 관계에 대해서도 상당한 논란이 있는데, 그 중 국내성과 환도성은 이름만 다를 뿐 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중국학자들과 일부 한국학자들은 산성자산성을 환도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고구려가 최초의 수도인 졸본(卒本)에서 이곳으로 천도한 것은 서기 3년(유리왕 22)이라고 한다. 그런데 국내성과 환도성을 같은 것으로 보는 학자들 중에는 이것을 부인하고, 209년(산상왕 13)에 환도성으로 천도했다는『삼국사기』의 기사를 토대로 209년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이 곳에서의 정도(定都) 기간에 대해서도『삼국사기』자체가 두 가지 설을 전하고 있다. 하나는 427년(장수왕 15) 평양천도(平壤遷都) 때까지라고 보는 것이다. 특히 후자의 설은 고구려가 환도성천도 이후 평양천도 때까지 세 번이나 수도를 옮겼다고 한다.
이렇듯 이견이 분분하지만 서기 3년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뒤 비록 전란 등으로 일시적으로 왕이 다른 곳으로 이거(移居)한 적은 있었지만, 427년 평양천도 때까지 약 400년 동안 고구려의 도성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국내성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뒤에도 평양·한성(漢城: 지금의 황해도 載寧 혹은 북한산 일대)과 더불어 고구려 삼경(三京)의 하나였으며, 645년(보장왕 4) 당나라 군대에게 포위당한 요동성(遼東城)을 구원하는 데 신성(新城)과 이곳의 군사 4만 명이 동원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여전히 고구려의 정치·군사적 중심지의 하나였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최고 귀족의 분묘로 여겨지는 벽화고분이 평양과 이 일대에 집중 분포되어 있는 점도 국내성의 비중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666년(보장왕 25) 집권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은 뒤 그의 아들들 사이에 불화가 생겨 큰아들 남생(男生)이 국내성을 근거로 동생인 남건(男建)·남산(男産)과 대항하다가 당나라에 투항해 버림으로써 이곳은 고구려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국내성 주변에는「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를 비롯하여 태왕릉(太王陵)·장군총(將軍塚) 등 고구려의 유적·유물들이 산재해 있어 고구려시대 국내성의 영화를 말해 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한원(翰苑)』
『중국인이 쓴 고구려사(高句麗史)』 하(下)(耿鐵華, 고구려연구재단, 2004)
「고구려국호고(高句麗國號考)」(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博英社), 1976)
「國內城及丸都城考」(白鳥庫吉, 『白鳥庫吉全集』3, 1970)
「高句麗王都考」(三品彰英, 『朝鮮學報』1, 1951)
『通溝』上(池內宏, 日滿文化協會, 1938)
「國內城及丸都城の位置」(關野貞, 『史學雜誌』25-11, 1914)
「高句麗初·中期的都城」(魏存成, 『北方文物』1985-2,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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