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덕왕 - 위키

백제/왕 2014. 10. 21. 02:22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C%9C%84%EB%8D%95%EC%99%95_(%EB%B0%B1%EC%A0%9C)

위덕왕

백제의 27대 국왕
본명 : 부여창(扶餘昌)
재위 : 554년 ~ 598년

위덕왕(威德王, 525년 ~ 598년 12월)은 백제의 제27대 국왕(재위: 554년~598년)이다. 성은 부여(扶餘), 휘는 창(昌)으로, 성왕의 맏아들이다. [1] 577년(위덕왕 24년)에 자신의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창건하였다. [2] 같은 해, 일본으로 경론 몇 권, 대대적인 학자와 율사 · 선사 · 비구니 · 주금사 등 승려 집단, 불상 만드는 기술자, 사찰을 지을 목수들이 파견되었다. [3]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절과 부처 등을 만들었다. [4] 그 뒤, 금속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들까지 건너갔다.[5] 583년에는 비다쓰 천황의 요청으로 고승 일라(日羅)가 건너갔다. [6][7] 584년 백제는 다시 왜국에 불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보냈다. [8][9] 588년(위덕왕 35년)에 백제는 불사리(佛舍利)와 승려 여섯 명, 노반박사(鑪盤博士)로서 장덕(將德) 백매순(白昧淳), 와박사(瓦博士)로서 마나문노(麻奈文奴) · 양귀문(陽貴文) · 석마제미(昔麻帝彌) 등 네 명, 화공(畵工) 한 명 등 사찰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여 백제의 공예미술이 일본에 널리 전파되었다. [10] [11][12]

생애

즉위 전

554년에 성왕이 전사하자 30살의 나이로 국정을 이어받았다. 그는 태자 시절부터 성왕을 도와 국정에 같이 참여하였고, 신라가 동맹을 어기고 한강 유역을 장악했을 때는, 신라 정벌론을 펼쳤다. 그의 강경론에 따라 성왕이 신라 공격을 결심하자, 554년에 자신이 선봉을 서서 관산성(管山城) 공략에 나섰다. 이 일은 많은 신하가 반대하였으나, 창은 주장을 굽히지 않고 기어코 관산성을 공격했다. 성왕은 관산성을 공격하고 있던 태자 창을 위로하기 위해 밤길을 달려가다 신라군의 복병 김무력의 급습을 당해 죽임을 당하였는데, 창은 그 죄책감에 시달리며 출가하여 승려가 되려고 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이 강력하게 만류하자, 창은 뜻을 굽히고 왕위를 승계했다. 그는 성왕의 삼년상을 치르고 557년 정식으로 왕위를 승계했는데, 이는 자기 탓으로 부왕이 죽은 것에 대한 참회의 의미로 보인다.

성왕이 전사하여 나라가 불안한 가운데 태자로서 왕의 임무를 수행하던 그는 국정을 맡자마자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야 했다. 고구려는 554년 음력 10월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는데, 이는 성왕이 죽은 지 불과 3개월 만이었다. 고구려는 신라가 길을 열어주자, 단숨에 웅진성(熊津城)까지 달려와 백제를 위협하였다. 백제의 옛 도읍이자 군사적 요충지인 웅진성은 사비성에서 불과 한나절 거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말하자면 백제의 폐와 같은 곳인데, 고구려가 한걸음에 달려왔으니, 백제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덕왕은 총력전을 펼쳐 가까스로 고구려군을 패퇴시켰지만, 고구려의 재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13] 또한 고구려의 침략은 신라가 길을 터준 결과였으므로,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하여 공격해올 수도 있었다.

즉위 이후

위덕왕은 오랜 동맹국인 가야 쪽에 밀사를 파견하여 신라에게 빼앗긴 가야 땅을 되찾아 가야를 재건할 방법을 모색하였고, 그것은 561년 음력 7월에 신라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났다. 백제가 신라를 공략하는 사이, 가야는 내부를 수습하고 신라의 뒤를 후리는 양동작전을 구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군은 신라의 반격에 밀려 1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함으로써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14] 백제군을 물리친 신라는 그 여세를 몰아 가야를 공격했다. 가야를 집어삼킬 기회를 엿보며, 침공의 명분을 찾고 있던 신라로서는 이 이상 좋은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사부가 이끈 신라군은 장군 사다함을 앞세워 순식간에 가야 전역을 휩쓸어버렸고, 그것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가야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전쟁의 종식

전쟁 위협이 사라지자, 위덕왕은 외교 경로를 통해 고구려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수나라가 진나라를 몰락시킬 당시, 수나라의 전함 한 대가 탐라에 표류해왔는데, 위덕왕은 그들의 배를 수리해주고, 선물을 가득 채워서 함께 돌려보냈다. 양견은 이 일로 백제를 매우 신임하고, 굳이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서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유도한다는 계획은 이런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다.

정황을 살피며 수나라에 그런 의지를 전달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위덕왕은 596년에 수나라와 고구려가 요동을 놓고 전쟁을 벌이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는 예의가 없고 오만한 나라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만약 수나라가 다시 고구려를 친다면 백제가 도와주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러나 양견은 아직 고구려를 재침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위덕왕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백제가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도록 충동질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고구려는 즉시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 국경을 노략질하며 보복을 감행하고 돌아갔다. 위덕왕은 74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15]

사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라 한다. 그런데 중국의 ‘북사’에는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나온다.[16] 한편 삼국유사에는 다른 설도 수록, 무왕의 어머니는 강가에 사는 과부였는데 어느 날 강에서 검은 용이 나타나 과부와 통정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전한다.

가계

무왕 장은 그의 아들 또는 서자, 또는 손자라는 설이 있다.

부왕 : 성왕(聖王)
모후 : 양화부인(陽花夫人)[출처 필요]
    제1왕후 : 왕후 소씨(王后 召氏)[출처 필요]
        장남 : 아좌태자(阿佐太子) [17]
        차남 : 부여씨(扶餘氏) - 그가 죽자 아버지인 위덕왕이 죽은 아들을 위해 탑을 세우고 사리함을 남긴다.
        3남: 임성태자[18][19][20]
        4남: 부여씨
        5녀: 부여예란(扶餘禮蘭)
    후궁 : 연가모
        아들 또는 서자, 또는 손자 : 무왕
    동생 : 혜왕
        조카 : 법왕

관련 작품

드라마
《서동요》(SBS, 2005년~2006년, 배우:정욱)
 

주석

[1] 김부식 (1145). 〈본기 권27 위덕왕〉, 《삼국사기》 “威德王 諱昌 聖王之元子也 聖王在位三十二年薨 繼位(위덕왕(威德王)은 이름은 창(昌)이고 성왕의 맏아들이다. 성왕이 재위 32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
[2] 《삼국사기》에는 600년(법왕 2년) 봄 정월에 법왕이 왕흥사를 창건하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김부식 (1145). 〈본기 권27 법왕〉, 《삼국사기》 “二年 春正月 創王興寺 度僧三十人 ... (2년(600) 봄 정월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度僧].... )”) 그러나 2007년 10월 10일 왕흥사지 터에서 발견된 사리함 몸통에 한자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爲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는 것이 밝혀져, 실제 창건 연도가 삼국사기 기록보다 23년 앞선 것으로 확인되었다.
[3] (720) 〈卷第二十 敏達天皇〉, 《일본서기》 “六年...冬十一月庚午朔、百濟國王、付還使大別王等、獻經論若干卷、幷律師・禪師・比丘尼・呪禁師・造佛工・造寺工、六人。遂安置於難波大別王寺。”
[4] 최범서 (2006). 《야사로 보는 삼국의 역사1》. 가람기획, 166쪽. ISBN 8984352411 “그 후 위덕왕 24년에 백제왕이 경론 몇 권, 율사律師 · 선사禪師 · 비구니 · 주금사呪噤師 · 조불공造佛工 · 조사공造寺工 등 6명을 보내었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절과 부처 등을 만들었다.”
[5] 최용범 (2008년).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페이퍼로드, 48쪽. ISBN 9788992920162 “백제는 그 뒤 577년(위덕왕 24년)에 불상 만드는 기술자, 절 건축자를 보냈고, 이어 금속공예사, 기와 굽는 기술자까지 보냈다.”
[6] (720) 〈卷第二十 敏達天皇〉, 《일본서기》 “十二年... 今在百濟火葦北國造阿利斯登子達率日羅、賢而有勇。... 冬十月、紀國造押勝等、還自百濟。復命於朝曰、百濟國主、奉惜日羅、不肯聽上。”
[7] 이기영 (2000). 《한국인의 윤리사상사》. 학문사, 132쪽. ISBN 8946710926 “위덕왕... 30년(583)에는 일본왕의 요청으로 고승 일라(日羅)가 건너갔으며, ...”
[8] (720) 〈卷第二十 敏達天皇〉, 《일본서기》 “十三年... 秋九月、從百濟來鹿深臣、闕名字。有彌勒石像一軀。佐伯連、闕名字。有佛像一軀。”
[9] 이덕일 (2004).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 김영사, 76쪽. ISBN 8934916540 “약 30년 후인 비다쓰(敏達)천황 13년(584)에 백제의 위덕왕(威德王)은 다시 왜국에 불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보냈다.”
[10] (720) 〈卷第廿一 用明天皇 崇峻天皇〉, 《일본서기》 “崇峻天皇 ... 元年春三月、... 百濟國遣恩率首信・德率蓋文・那率福富味身等、進調幷獻佛舍利、僧聆照律師・令威・惠衆・惠宿・道嚴・令開等、寺工太良未太・文賈古子・鑪盤博士將德白昧淳、瓦博士麻奈文奴・陽貴文・㥄貴文・昔麻帝彌、畫工白加。”
[11] 고유섭 (2005). 《구수한 큰맛》. 다할미디어, 160쪽. ISBN 8989988241 “원래 백제의 공예는 고도로 발달되었나니, ... 위덕왕 35년에 노반박사(露盤博士)로서 장덕(將德) · 백미순(將德白味淳)의 도일, 와박사(瓦博士)로서 마나부노(麻奈父奴) · 양귀문(陽貴文) · 석마제미(昔麻帝彌)의 도일 등 백제의 공예미술이 널리 전파된 것을 알겠다.”
[12]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2004).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285쪽. ISBN 8987787796 “《일본서기》에 따르면, 민달천황 敏達天皇 원년(588)에 백제가 불사리佛舍利와 승려 여섯 명, 노반박사 露盤博士 한 명, 와박사 네 명, 화공畵工 한 명 등 사원 건설에 필요한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하였다고 한다.”
[13] 김부식 (1145). 〈본기 권27 위덕왕〉, 《삼국사기》 “元年 冬十月 高句麗大擧兵 來攻熊川城 敗衄 而歸(원년(554)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해 왔으나 패하여 돌아갔다. )”
[14] 김부식 (1145). 〈본기 권27 위덕왕〉, 《삼국사기》 “八年 秋七月 遣兵侵掠新羅邊境 羅兵出擊敗之 死者一千餘人(8년(561)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쳐서 약탈하였다. 신라 군사가 나가 쳐서 이기니 죽은 자가 1천여 명이었다. )”
[15]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웅진닷컴, 서울 2004. 277-279쪽
[16] [특집] 서동은 위덕왕의 아들, 맞아? 주간경향
[17] 박영규 (2004).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증보판)》. 웅진닷컴, 281쪽. ISBN 8901047519 “『삼국사기』엔 위덕왕의 가족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일본서기』추고천황 편에 백제 왕자 아좌(阿佐)라는 이름이 보인다. 597년 4월 위덕왕이 그를 왜로 파견했으며, 왕자라는 호칭을 쓴 것으로 봐서, 그는 위덕왕의 아들임이 분명하다.”
[18] 豊 田 家 系 譜
[19] 네이버 인조이재팬
[20] 네이버 인조이 재팬 :: 한일 생활문화 교류의 중심 


전 대
성왕
제27대 백제 국왕
554년 - 598년
후 대
혜왕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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