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70309.22016203807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7> 수로왕을 찾아서
한에 패한 위만조선 유민이 가락국 세워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7-03-08 20:38:49/ 본지 16면

김해 수로왕릉.

수로왕릉

김해시내 한 복판에 자리한 수로왕릉은 가락국(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을 모신 무덤입니다. 김해의 관광과 답사에서 왕릉을 빠뜨리는 분은 별로 안 계실거고, 가야사에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유적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왕릉공원으로 정비되어 아이들의 소풍이나 사생대회가 열리기도 하고, 도심의 녹지공간으로 시민들의 쉼터가 되기도 합니다. 매년 5월과 10월에는 김해김씨 분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시조할아버지에 대한 큰 제사를 지냅니다. 수로왕은 가야사의 첫 장을 열기도 하였지만, 김해김씨의 시조도 되기 때문입니다.

가야왕국의 부활?

얼마 전에는 그런 농담도 했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출발할 때, 대통령 국무총리 비서실장이 모두 김해김씨였기 때문에 "1500년 만에 가야왕국이 부활한 것"이라며 함께 웃은 적도 있었습니다. 온 국민이 혈연과 지연의 고리를 끊으려 애쓰는 지금, 무슨 망언이냐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오히려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이 혈연과 지연의 끈적거림이 더 이상 기능 못하게 하는 방편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수로왕의 나이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수로왕은 42년에 태어나 가락국을 세웠고, 199년에 158세의 나이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158년이나 사나 하는 의문도 생기겠지만, '가락국기'의 수로왕은 건국신화라는 특별 형식의 이야기에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삼국지' 왜인전은 3세기 왜인들의 평균 수명을 80~100세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 발굴되고 있는 인골의 평균 수명은 40~50세에 불과합니다. 양쪽을 종합적으로 해석하면 비슷한 시기의 왜인사회는 1년에 2살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봄에 씨 뿌리고 한 살, 가을걷이 하고 다시 한 살을 먹는 것 같은 시간의식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수로왕의 실제 연령은 158세를 둘로 나눈 79세 정도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원조 할아버지

그러나 이러한 추정이 성립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해 수로왕의 생몰연대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58세는 몰년에서 생년을 뺀 계산에서 얻어진 것입니다. 42년 탄생 즉시 왕이 될 수도 없고, 158세를 살 수도 없기 때문에, 158년은 가락국의 건국에서 완성에 이르는 일종의 국가 형성기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바로 이 시기가 건국자인 수로왕에 의해 대표되는 전승으로 남은 것으로 봄이 좋겠습니다. 임진왜란 때 끌려갔던 심수관이란 도공이 400년 이상 지난 지금 일본 큐슈 남부에 살고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지금의 심수관은 '원조 심수관'의 14대손이 됩니다만, '원조'와 똑 같은 심수관의 이름을 명함에 새겨 내밀고 있습니다. 혹시 이렇게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수로왕의 출신지

김해의 '원조 할아버지'로 수로왕을 의심할 사람은 없지만, 수로왕 집단도 처음부터 김해인은 아니었고, 외부에서 이동해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수로왕은 어디에서 왔던 걸까요? 우선은 고조선(古朝鮮)이 있었던 서북한지역입니다. '삼국사기'에 신라는 조선유민(朝鮮遺民)이 산과 계곡 사이에 살면서 시작되었다 합니다. 조선유민이란 바로 고조선의 남은 백성입니다. 고조선의 마지막 단계인 위만조선(衛滿朝鮮)은 세계적 철의 제국이었던 한(漢)을 상대로 1년 동안이나 싸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도로 발달했던 위만조선의 철기문화는 요하의 연화보유적과 청천강의 세죽리유적 등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한에게 패한 고조선의 유민들이 남하하여 경주에 도착해 신라를 세웠고, 바닷길로 생각됩니다만 김해에 도착해 가락국을 세웠습니다. 수로왕은 고조선에서의 국가적 경험과 철기문화를 가지고, 아홉 촌장들에 의해 영도되던 부족연합의 구간사회를 통합했던 겁니다. 구간사회인은 청동기의 고인돌을 만들었지만, 수로왕 집단은 철기가 부장되는 목관묘(木棺墓)와 목곽묘(木槨墓)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특히 목곽묘는 수로왕 집단의 고향이었던 서북한지역의 무덤 형태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결국 지금까지의 자료에 따른다면, 수로왕의 출신은 고조선의 멸망에서 구하는 것이 정당할 것입니다.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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