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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구려 귀족묘, 모두루묘
중국 속 우리 역사 기행 9
승인 2014.09.16  16:22:06 글/사진=정유철 기자  |  hsp3h@ikoreanspirit.com

7월16일 오후 고구려 집안 국내성(國內城) 터를 출발하여 향한 곳은 모두루묘(牟頭婁)묘. 집안 시에서 압록강 북쪽으로 향해 가니 왼편으로 광개토대왕비가 보이고 그 동쪽으로 장수왕릉이 있다. 이 두 곳은 천천히 보기로 하고 모두루묘를 향해 갔다. 모두루묘는 “하해방(下解放)0001호묘”이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모두루묘는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 동구(洞溝) 고분군 하해방묘구(下解放墓區) 집청공로(集靑公路) 남쪽에 있는 고분군에 있다. 하해방촌의 동쪽 500미터, 압록강 북쪽 500미터 지점이다. 집안의 고분과 유적은 6개 지역군으로 나누어진다. 하해방묘구, 우산하묘구(禹山下墓區), 산성하묘구(山城下墓區), 만보정묘구(萬寶汀墓區), 칠성산묘구(七星山墓區), 마선구묘구(麻線溝墓區). 하해방묘구는 동구고분군 가운데 가장 동쪽에 있다. 
 
하해방구묘구에는 1962년도 조사시 고분이 50여 기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현재는 30여기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 모두루묘는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 동구(洞溝) 고분군 하해방묘구(下解放墓區) 집청공로(集靑公路) 남쪽에 있는 고분군에 있다.
 
 집청공로를 따라 20분 남짓 달렸을까, 가이드가 ‘다 왔다’고 내리라 한다. 한낮의 햇볕은 따가웠다. 시원한 차 안에서 그대로 머물고 싶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버스에서 내리니 우리를 반겨 준 것은 포도밭과 옥수수밭이다. 이 농토 사이로 모두루 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곳에 국가중점문물이 있다니, 역사에 관심이 깊은 이들이나 알까. 농로로 들어서자 포도밭 앞에 세운 표지석이 나온다.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동구고묘군 염모(冉牟)묘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1961년 3월 4일 공포 집안시인민정부립”

표지석 뒷면에는 염모묘의 안내문을 새겼다.

“염모묘는 동구고분군 가운데 중요 묘의 하나이다. 전후 2실로 되어 있는데 전실 정면 문 위에 800여자로 된 묵서(墨書) 묘지가 있다. 고구려족의 기원과 묘주인 염모의 신분을 기술하였다. 묘지 내용이 서법(書法)으로 보아 이 묘는 5세기 중엽, 즉 호태왕 이후의 묘로 보인다.”
   

▲ 모두루묘 안내문.

모두루묘를 중국에서는 염모묘라 부른다. 옥수수밭 고랑을 따라 10여미터 나아가니 모두루묘가 보인다. 봉분에 풀이 무성하다. 무덤 입구는 철문을 설치하여 들어갈 수 없다. 주변에 울타리를 세워 봉분에 접근을 막았다.

햇볕이 내리쬐는 옥수수밭가에 서서 임찬경 박사의 모두루묘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1935년 발굴조사를 한 일본학자들은 전실의 묵서를 토대로 묘의 주인을 모두루로 보고 ‘모두루묘’라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학자 노간(勞幹)이 1940년 7월 ‘발고구려대형 염모지 겸 논고구려도성지위치(跋高句麗大兄 冉牟誌 兼 論高句麗都城之位置)’라는 글에서 “이 묘는 고구려대형 염모의 묘이고 모두루는 묘지를 쓴 작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여 ‘염모묘’로 개명하였다. 

그 뒤 묘지와 관련 연구가 진행되어, 모두루는 염모의 노객(奴客)이 아니라 광개토대왕의 노객 곧 신하이며, 염모는 모두루의 조부라고 보아 모두루묘로 부르는 추세다. 그런데 1994년 무덤에 들어가 묵서를 확인한 중국 학자가 염모묘라고 하여 중국에서는 다시 염모묘로 부르는 듯하다.

모두루묘는 고구려 돌방봉토무덤(石室封土墳 )으로 직경 22미터, 둘레 70미터 높이는 4미터에 달한다. 벽화가 없지만 묵으로 쓴 묘지(墓誌)가 발견되어, 묘의 주인을 알 수 있어 주목된다. 묘지(墓誌)는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묘의 위치를 기록하여 무덤 앞에 묻는 돌이나 도판 (陶板), 또는 거기에 새긴 글이다. 장례를 치를 때 무덤에 넣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묘의 주인공이 누구이며, 그의 행적이 어떠했는지를 전하기 위한 것이다. 묘지에는 죽은 사람에 대하여 성명과 자 (字), 출생지, 조상 계보, 출생 연월일, 관직 약력과 부임지 (赴任地), 행적, 덕망, 사망일, 가족관계 따위를 적는다. 모두루는 장수왕(재위 413~491년), 문자명왕(재위 492~519년)시기의 인물이고, 염모는 광개토대왕(재위 391~412년) 또는 장수왕 때 인물로 추정한다.
   

▲ 모두루묘는 옥수수밭 가운데 있는데 들어가지 못하게 철조망을 쳐서 보호한다.

모두루묘는 고구려 고분 중에서 중급규모로 남겨진 벽화가 없지만, 800여 자의 장문에 이르는 묘지가 있는 독특한 고분이다. 당시 고구려 고분 묘지는 100 여 자 내외의 묵서묘지가 일반적이었다. 

묘지는 크게 다섯 문단으로 나누어진다. 1, 2행은 모두루 묘지의 제기(題記)이며, 둘째는 모두루의 조상의 사적, 추모성왕의 노객인 모두루의 선조가 북부여로부터 왕을 따라 남하해왔다는 것을 서술했다. 셋째는 4세기 초에 활약한 것으로 보이는 모두루의 조상인 대형 염모의 사적을 기록하였고, 넷째는 모두루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관한 기록이다. 다섯째는 묘주인 모두루의 행적을 적었다. 이 묘지는 노태돈 교수의 판독으로 ‘역주 한국고대금석문(韓國古代金石文)’Ⅰ(1992)에 실려 있다.

임찬경 박사는 모두루 묘지에서 특히 서두의 고구려 국가의 내력을 설명한 부분에 주목했다. 

"묘지의 첫 문장은 고구려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합니다. ‘하박(河泊)의 손자(孫子)이며 일월(日月)의 아들인 추모(鄒牟) 성왕(聖王)이 북부여에서 나셨으니,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천하사방(天下四方)이 알지니...’. 이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북부여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 그곳에서 왔다는 것을 정통성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

우리 역사 연구에 소홀히 하고 있는 부여의 역사. 부여 역사를 부활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의 반쪽을 잃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덤 앞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묵서지를 볼 수 없으나 사진 자료로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묵서지의 서체는 광개토대왕비의 서체와도 다르다고 한다. 서체를 분석한 김양균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당시 북조(北朝)에 유행하던 사경체(寫經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모두루묘 묘지는 문서의 형식을 빌어서 쓴 묘지로서 당시 北朝에서 유행하던 寫經體의 영향을 받아서 예서, 해서, 행서의 다양한 필획 특징을 가진 신예서(新隸書)의 경향이 있으며, 서예 역사상 과도기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다만 전대의 묘지문에 비해 결구가 위아래로 길어지고 해서 필획의 비율이 증가하는 등 해서화(楷書化)의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서체의 유입을 통해 이후 정식서체로서 해서체 묵서명 등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는 고구려 서예를 더욱 발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모두루묘 묵서묘지와 북조 사경체)
   

▲ 모두루묘를 설명한 글. 이곳에서는 모두루묘를 염모묘(冉牟墓)라고 한다.

중국은 이 모두루묘를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 신중국이 탄생한 직후 관계기관에서 전문가를 조직하여 집안에 가서 조사하고 고구려 벽화고분을 밀봉하여 보호하였다. 1961년 봄 광개토대왕비를 포함한 동구고분군은 국무원에서 공포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가 되었다. 1978년 6월 모두루묘를 화학적으로 보호 처리하였다. 

1994년 봄부터 집안에 비가 많이 내려 모두루묘가 일부 붕괴되자 경철화(耿鐵華) 통화사범학원 역사학 교수 등 학자들이 고분의 보호 상태를 점검하고 내부에 들어가 조사하였다. 이때도 묵서문자가 1930년대 처음 발견했을 때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조사를 토대로 경철화 교수는 새로 판독하여 436자를 해석해냈다. 

하지만 모두루묘지를 동북공정에 이용하는 사례도 있다. 모두루묘지가 모두 한자(漢字)로 되어 있는 점을 들어 고구려는 고유한 문자가 없고, 중화국가의 지방정권인 증거라고 주장한다. 유물의 해석, 역사가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나올 수 있겠지만, 참 헛헛하다. 
 
다시 옥수수밭을 지나 푸르디푸른 포도밭을 스쳐 모두루묘를 뒤로 하고 나왔다. 버스는 이제 광개토대왕비를 보러 갈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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