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71012.22017221052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36> 고령에서 양자강까지
가라국왕 하지의 中남제 사절단, 왕복 5216㎞ 대장정의 길 떠나
부안 죽막동 유적-사절단 통과 海路 증명-독자적 對中 교섭창구로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7-10-11 22:12:28/ 본지 17면
대가야의 해외 진출 장소로 추정되는 전북 부안군 죽막동에서 출토된 가야 철제창
2600㎞의 대장정
479년 중국에서 남송이 망하고 남제가 건국했을 때, 고령의 대가야왕은 '가라국왕(加羅國王) 하지(荷知)의 이름으로, 저 머나먼 양자강 하구까지 외교사절을 파견합니다. 가야 여러 나라 중에서 유일하게 대가야가 전개했던 단 한 번의 대중 외교였습니다. 경북 고령에서 출발한 대가야의 사절단은 대개 육로 115㎞, 수로 66㎞, 해로 2427㎞를 거쳐, 총 2608㎞ 라는 장거리 여행 끝에 중국의 양자강에 도달했을 겁니다. 이러한 기록은 대가야 사절단을 맞아들였던 남제 측의 '남제서(南齊書)'에만 있고, 우리 측에는 없기 때문에, 사절단의 무사 귀환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왕복이었다면 5216㎞나 되는 실로 엄청난 장거리 여행이었습니다.
경북 내륙에서 중국으로 가자면 먼저 남해로 나와야 하는데, 고령에서 남해로 나오는 길은 낙동강과 섬진강이 생각될 수 있습니다. 고령읍 바로 앞의 회천을 통해 개진나루에서 낙동강으로 나오는 길이 용이했을 테지만, 479년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을 겁니다. 5세기 중반에 는 신라가 낙동강 하류의 양산과 동래지역을 장악하기 때문입니다. 서쪽의 섬진강 루트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가야옹.
섬진강 하구에 도달하려면 고령→합천→거창→함양→남원(운봉)의 육로와 남원→곡성→구례→하동의 섬진강 수로를 경유했을 것이고, 남해와 서해의 해로를 거쳤을 겁니다. 고령에서 하동까지는 지난 주에 대가야 토기의 확산으로 말씀드린 것처럼, 같은 시기의 대가야왕이 이들 지역에 대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사절단을 안전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동에서부터는 바다를 건널 수 있는 크고 단단한 배가 준비되었을 것이고, 전남 목포 앞바다를 돌아, 서해안을 따라 황해도나 요동반도 끝까지 북상해, 거기서 황해를 건너 산동반도에 도착하고, 다시 중국 동해안을 따라 남하해 양자강 하구까지 가는 2600㎞의 대장정이었습니다.
전북 부안 죽막동유적
1991년에 대가야 사절단이 통과했던 해로를 증명해 주는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변산반도에 위치한 전북 부안의 죽막동유적입니다. 언젠가 위도 페리 전복사고가 있기도 했던 어려운 바닷길의 현장으로, 조선시대에 세워진 수성당(水城堂)에는 항해의 안전을 지켜주는 수성할미(개양할미)가 모셔지고 있습니다. 이 수성당 뒤뜰에서 대가야의 철제 무기류와 마구류가 들어 있는 대가야의 큰 항아리가 발견되었습니다. 대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479년 대가야왕의 사절파견과 시기적으로 겹치게 됩니다. 항해 중에 풍랑이 일자, 안전 기원의 제사를 올리고, 항해의 성공여부를 점치면서, 해신에게 바쳤던 대가야의 귀중품들이 근년에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동아시아 외교무대에 등장
479년 대가야왕은 이토록 어려운 과정을 거쳐 '보국장군(輔國將軍) 본국왕(本國王)'의 칭호를 수여받았습니다만, 같은 해에 고구려·백제·신라·왜 등이 사신을 파견했던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삼국이나 왜의 중개나 안내는 상상할 수 없는 대가야 독자의 대중 교섭이었습니다. 대가야는 해로에 대한 정보와 항해 능력은 물론, 대중외교 관례에 대한 사전지식을 아울러 갖추고 있었던 겁니다. 물론 대가야왕이 받은 '보국장군(輔國將軍)'은 같은 3품이라도 고구려의 정동장군, 백제의 진동장군, 왜의 안동장군보다는 1급 낮은 것이었습니다. 비교적 낮은 장군호가 수여된 것은 분명하지만, 100년 동안이나 외교관계를 가지면서 고구려왕과 같은 장군호를 받는 서융의 무도왕(武都王, 399년)이나 탕창왕(宕昌王, 457년)에게도 처음에는 '보국장군'이 제수되었습니다. 최초의 외교에서 받았던 장군호로 그다지 낮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국왕(本國王)'은 가야 전체의 왕이 아닌 대가야 1국의 왕을 의미합니다. 특정의 견해처럼 대가야왕이 이른바 '가야연맹'의 맹주였다면, 소속의 가야국명을 포함하는 칭호를 요청했을 테지만, '가라국왕 하지'의 칭호는 '본국왕'에 국한되고 있습니다. 가라국왕 하지(荷知, haji)는 가야금12곡과 지산동44호분의 대가야왕 '가실(kasil)'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인제대 인문사회대 학장·역사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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