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34329
흉흉한 서민경제, 또 다른 궁예 탄생할 수 있다
[사극이 못다 한 역사 이야기 ⑥] 안성 칠장사에서 만난 궁예
13.02.14 11:59 l 최종 업데이트 13.02.14 11:59 l 김종성(qqqkim2000)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4호인 칠장사의 풍경. 안성시 죽산면 소재. ⓒ 김종성
얼마 전, 경기도 안성시 일원의 역사 유적들을 답사하면서 조계종 사찰인 칠장사를 방문했다. 안성시 칠현산(중부고속도로 일죽 IC 부근)에 위치한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 때 세워진 사찰로서 근 1400년의 장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이 절의 건물 벽면에는 흥미로운 그림이 있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초상화가 바로 그것. 예전에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시청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준 적이 있는, 왼쪽 눈에 안대를 낀 궁예의 모습이 바로 거기에 있다. 물론 이 그림은 현대에 그려진 것이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에 따르면, 궁예는 본래 신라 왕족이었다. 그런데 '장차 나라를 해롭게 할 아이'라는 점괘가 나오자, 왕실에서는 갓 태어난 궁예를 죽여 없애려 했다. 왕의 측근이 건물 2층 누각에서 갓난아이를 내던지고, 아래에 있던 유모가 받아 가로채는 과정에서 아이의 한쪽 눈을 실명했다고 '궁예 열전'은 말한다.
그 후 궁예는 유모를 따라 각지의 사찰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곳 중 하나가 안성 칠장사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궁예가 칠장사에서 활쏘기를 하면서 어린 시절의 한때를 보냈다는 것이다.
서민경제 파탄, 궁예를 혁명의 길로 가게 했다
칠장사와의 관계 때문인지, 궁예와 안성 지방의 인연은 그가 성장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궁예가 혁명의 대열에 가담한 곳도 바로 안성이다. 궁예는 이곳에 있던 기훤이란 반군 지도자의 수하로 들어갔다.
훗날 궁예는 자신이 세상을 구원할 미륵부처라고 선전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궁예가 살았던 안성에는 미륵부처와 관련된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이와 관련된 불상도 많고 불탑도 많다. 이처럼 칠장사를 포함해서 안성시는 궁예와의 인연이 상당히 깊다.
궁예가 기훤의 수하가 돼 혁명가의 길을 걸은 것은 무엇보다도 당시의 경제 파탄 때문이었다. 궁예가 태어난 9세기 중후반은 신라 경제가 내리막길로 치닫던 시기였다. 쿠데타가 빈발하고, 가뭄과 흉작이 심했으며, 반정부 대자보가 여기저기 나붙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살림이 각박해지고 정부의 조세 수입도 감소했다. 이런 위기가 최고조에 도달한 시점이 진성여왕(재위 887~897년) 때였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서는 "(진성여왕) 3년, 국내의 여러 지방에서 세금을 바치지 않아 국고가 비고 재정 상태가 곤란해졌다"고 했다. 전국적으로 세금을 못 낼 정도로 서민 경제가 파탄됐던 것이다. 지금 말로 하면, 전국적으로 개인파산이 만연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궁예를 혁명의 길로 몰아넣었다.
상류층만 보고 '백성들이 잘 사는구나' 했던 헌강왕
▲ 칠장사의 벽면에 그려진 궁예의 초상화. ⓒ 김종성
그런데 당시의 신라 정부는 경제위기에 둔감했다. 이 점은 개인파산이 가속화되던 때인 헌강왕(진성여왕의 오빠·재위 875~886년) 시대에 관한 기록에서 포착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헌강)왕이 측근들과 함께 월상루(누각 명칭)에 올라 사방을 돌아보니, 경주에 민가가 즐비하고 풍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은 시중(총리)인 민공을 쳐다보며 '듣자 하니, 지금 민간에서는 지붕을 기와로 덮고, 짚은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밥을 지을 때도 숯을 쓰지, 나무는 안 쓴다고 하네요. 정말입니까?' 하고 물었다."
헌강왕이 관찰한 것은 경주 상류층의 풍경이었다. 어느 시대건 간에 상류층은 경제위기에 잘 대처할 수 있다. 그런데도 헌강왕은 상류층의 풍경만 보고 '온 나라가 다 잘사는구나'라고 판단했다. 일반 서민들이 개인파산을 겪고 있다는 점은 간과한 것이다.
위에서 헌강왕이 시중에게 한 말을 요약하면, '요즘 경제가 좋다는데, 정말이냐?'가 된다. 이 질문에 대해 시중은 "이 모든 게 다 거룩한 은덕 덕분입니다"라고 답했다. 아부성 발언으로 경제위기의 실상을 숨긴 것이다.
그러자 헌강왕은 "이 모두가 다 경들이 보좌해준 덕분이죠. 내가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라며 흐뭇해했다. 이렇게 위정자들이 경제위기에 둔감하다 보니, 진성여왕 때 가서 백성들이 세금도 못 낼 정도로 사태가 악화된 것이다.
정말 나라를 지키는 건 군인이 아니라 가정
그런데 9세기 중후반의 경제 위기는 신라만의 위기가 아니라 일종의 국제적 위기였다. 같은 시기에 당나라도 개인파산·경제 파탄·각종 반란에 시달렸다. 그런 혼란을 압축적으로 반영한 사건이 유명한 '황소의 난'이다. 소금장수인 황소가 일으킨 이 반란은 당나라가 멸망하는 계기가 됐다.
동아시아 패권국인 당나라의 경제가 파탄되면 주변 국가들의 경제사정 역시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는 신라의 최대 동맹국이자 무역 파트너였기 때문에, 당나라의 경제위기는 신라의 위기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당시의 위기는 일종의 글로벌 위기였는데도 신라의 위정자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궁예는 안성 칠장사 혹은 안성의 여타 지역에서 혁명의 뜻을 굳히고 반군의 대열에 가담했다. 궁예뿐만 아니라 견훤도 혁명의 뜻을 굳혔고, 나중에는 왕건도 같은 대열에 가담했다. 개인파산과 경제위기에서 시작된 반란의 흐름이 신라의 멸망으로 연결됐으니, 결과적으로 말하면 개인파산 사태가 신라의 멸망으로 이어진 것이다.
60만 국군도 대한민국을 지키지만, 진짜로 대한민국을 지키는 것은 대한민국의 가정들이다. 이 가정들이 경제적으로 안정돼야만 대한민국도 튼튼해진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이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은 서민경제 회복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왼쪽 눈에 안대를 쓴 제2의 궁예가 언제 또다시 출현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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