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59829

궁녀들 떨게 한 공포의 체포조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닥터 진>, 네번째 이야기
12.07.23 14:32 l 최종 업데이트 12.07.23 15:52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닥터진>의 홍영래(박민영 분). ⓒ MBC

19세기에 환생한 대한민국 의사의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 <닥터 진>에서, 주인공 진혁(송승헌 분)은 낯선 19세기 세상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진혁을 괴물 취급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의 진심과 기술을 인정하고 있다. 진혁은 어느새 활인서(서민 의료원) 의사에서 내의원(궁궐 병원) 의사로 성장했다. 
진혁의 성장과 함께하는 여인이 있다. 21세기 세상에서 진혁의 애인이었던 홍영래(박민영 분). 몰락한 양반집 딸인 영래는 처음부터 왠지 진혁에게 이끌려 이 남자와 생사고락을 같이하고 있다.

최근 방송분에서 정식으로 내의원 의사가 되기까지, 영래는 비공식적으로 진혁을 돕는 역할을 했다. 진혁이 활인서에 근무할 때도, 내의원에 들어간 뒤에도 영래는 비공식적인 도우미였다.   

"내의원 의사가 되기까지 홍영래가 수행한 역할은 오늘날의 어떤 직업에 해당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모든 사람들은 "간호사"라고 대답할 것이다. 맞는 대답이다. 하지만, 100% 정답은 아니다. 

전문직이라는 것은 19세기까지만 해도 동아시아에서 낯선 개념이었다. 19세기까지는 하나의 직업에 여러 가지 요소가 뒤섞여 있었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로 군주의 경우를 들 수 있다. 

흔히들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제정일치가 붕괴되었다고들 하지만, 실상은 20세기 초반까지도 동아시아 군주는 제사장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서울 지하철 종로3가역 인근의 종묘(국가 사당)에서 군주는 국가를 대표하여 제사를 올렸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대통령과 교주를 겸했던 것이다. 

역할의 모호성은 군주뿐만 아니라 의녀 같은 서민층 직업에서도 나타났다. 간호사에게 행정 사무를 맡기는 병원들도 있지만, 오늘날의 간호사는 기본적으로 의사의 진료를 돕는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의녀는 그렇지 않았다. 간호사 업무를 수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그것만 담당한 것은 아니었다.  

서울 창덕궁에 성정각이란 전각이 있다. 성정각 맞은편에 작은 건물이 있다. 조화어약(調和御藥, 임금의 약을 조절) 및 보호성궁(保護聖躬, 임금의 옥체를 보호)이란 현판이 걸린 건물이다. 한때  내의원 부속 건물로 사용된 곳이다. 


▲  창덕궁 성정각 맞은편에 있는 건물. 한때 내의원 부속건물로 사용된 곳으로 보인다.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소재. ⓒ 김종성

의녀, 침 주머니 들고다니며 치료... 체포조로 돌변도

임금에게 드릴 약을 조절하고 그 옥체를 보호하는 역할은 내의원 의사의 몫이었다. 내의원 의사를 보조하는 것은 의녀의 몫이었다. 하지만, 의녀는 단순히 약을 조절하고 옥체를 보호하는 임무만 맡지는 않았다. 

의기(醫妓)라고도 불린 데서 알 수 있듯이, 의녀는 기생 역할도 수행했다. '의기'에서 기생을 의미하는 '기'자가 뒤에 붙은 것은 이들이 본질적으로 관기(관청 기생)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술을 담당하는 관기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의기의 업무 가운데서 기생 역할이 꽤 큰 비중을 차지했음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관기는 여자 공노비(관노비)의 보직 중 하나였다. 의녀 역시 관청에 얽매인 공노비였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기생 업무를 담당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다가 아니다. 의녀는 기생 외에 또 다른 역할도 수행했다. 그것은 궁궐 경찰 역할이었다. 이들은 사법기관이 궁궐 여성들을 잡아들일 때 '체포조'의 임무를 수행했다. 환자 치료와 기생 업무에 더해 경찰 사무까지 담당했으니, 의녀는 상당히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대궐에서 여성을 체포할 수 있는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였다. 감찰궁녀 외에도 금부나장과 의녀가 그런 일을 담당했다. 금부나장은 고급 사법기관인 의금부의 하급 관리였다. 

이들 중에서 의녀가 체포를 담당한 사례 중 하나를 <계축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계축일기>는 광해군의 정적이자 계모이며 선조 임금의 젊은 부인인 인목대비의 입장에서 당시의 궁궐 상황을 기록한 책이다. 

광해군 집권 초반에 인목대비의 측근들이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대비의 사주를 받은 궁녀들이 이미 죽은 의인왕후(선조의 첫째 부인)를 저주한 적이 있다는 혐의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혐의가 제기되자, 금부나장들이 인목대비의 전각에 들이닥쳤다. 체포대상 중에는 거물급인 김 상궁이 있었다. 김 상궁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극진히 보좌한 공로로 승은상궁(후궁 대우)에 오른 고위 인사였다. 인목대비가 "궁녀 중에서도 위대한 분"이라고 극찬한 인물이다. 김 상궁은 금부나장들에 의해 끌려가면서 이렇게 탄식했다.

"의녀를 시켜서 잡아내는 것도 아니고 금부나장의 손으로 잡아내게 하니, 이 치욕이 내 몸에 맞기나 하는 것인가!"

'의녀를 시켜서 잡아내는 것도 아니고'라는 김 상궁의 탄식에서, 금부나장보다는 의녀가 궁녀를 체포하는 것이 훨씬 더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의녀들은 가슴에 침 주머니를 차고 다니면서 궁궐 사람들을 치료하기만 한 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체포조로 돌변해서 궁녀들을 잡으러 다니기도 했던 것이다. 


▲  의녀를 포함한 궁중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밀랍인형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의 화성행궁에 전시되어 있다. ⓒ 김종성

의녀대의 출현, '호랑이 떼' 만큼 무서웠다

의녀들은 체포 과정에서 공포 분위기도 연출했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이들은 인목대비 시녀들의 머리채를 휘어잡기도 했다. 궁녀들은 이들을 '의녀대'라 불렀으며, 의녀대의 출현을 호랑이 떼의 출현만큼이나 무서워했다. 

<계축일기>의 분위기를 볼 때, 감찰궁녀가 체포할 때보다 의녀들이 체포할 때 궁녀들의 공포심이 훨씬 더 컸던 모양이다. 가슴에 침 주머니를 찬 의녀들이 우르르 달려든다면, 웬만한 궁녀들로서는 두려움을 감추기 힘들었을 것이다.  

궁궐에서 의녀들을 체포활동에 동원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감찰궁녀는 전각마다 한 둘밖에 없는 데 비해, 의녀들은 내의원이라는 단일 조직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통일적인 체포활동을 수행하기 편했을 것이다. 

드라마 <동이>에 나온 감찰부 궁녀들의 활약상을 기억하는 시청자라면 '감찰궁녀는 전각마다 한 둘밖에 없었다'는 표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지 모르지만, <동이>에 나온 감찰부는 작가가 지어낸 부서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의녀와 궁녀 사이에는 동질감이 약했기 때문에, 궁녀들의 반감을 초래할 체포활동에는 궁녀보다는 의녀를 활용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계축일기>의 김 상궁처럼 궁녀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을 체포할 때는 감찰궁녀보다는 의녀나 금부나장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의 화성행궁에는 궁녀와 의녀의 밀랍인형을 한데 모아놓은 공간이 있다. 이 장면을 보면 의녀와 궁녀가 한 식구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소속이 달랐던지라 동료의식이 약했다. 그렇기 때문에 의녀들은 별다른 심리적 부담 없이 궁녀들을 체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의녀들은 궁녀들이 몸이 아플 때는 물론이고 죄를 지었을 때도 궁녀들을 방문했다. 때로는 팔을 비틀어 사람을 체포하고 때로는 바닥에 눕히고 침을 놓아주었으니, 궁궐 여성들의 눈에는 의녀들이 무섭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을 것이다. 궁궐 여성들은 의녀들을 볼 때마다 '병 주고 약 준다'는 속담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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