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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漢城都邑期 연구 동향과 과제 - 김기섭" 중 "Ⅲ.건국세력"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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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건국세력
2011.1 김기섭
백제를 세운 사람들의 종족 계통에 대해서도 논란이 꾸준히 일어났다. 주로 백제왕실이 부여계(夫餘系)인지 고구려계(高句麗系)인지를 다투는 논란이었다.
문헌자료만으로는 부여계통일 개연성이 높아진다. 우선, 472년에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北魏)로 보낸 표문(表文)에서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45)고 단언한 대목이 돋보인다. 삼국유사에는 백제의 세계(世系)가 부여에서 나왔으며 왕성(王姓)이 해씨(解氏)였다는 기록이 있다.46) 백제 왕실세계(王室世系)에 적힌 왕들의 성씨는 모두 부여 나라이름과 같은 부여씨(扶餘氏)이다. 서기 538년에 사비(泗沘)로 도읍을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꾸었다.47) 백제 건국설화의 하나인 비류설화에서 북부여(北扶餘)의 왕 해모수(解扶婁)가 백제왕실의 조상으로 나온다.48) 온조왕 때 족부(族父)인 을음(乙音)이 죽자 우보(右輔)에 오른 해루(解婁)가 본래 부여사람이었다는 기사49)도 백제를 세운 주체세력이 부여계통 주민일 개연성을 높여준다.
고구려계통임을 나타내는 기록도 있다. 건국시조 온조가 고구려 주몽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50) 위덕왕(威德王)이 아직 왕자일 때 고구려군(高句麗軍)과 교전하기 전 자신을 소개하면서 고구려와 동성(同姓)이라고 말하였다.51) 중국측 기록에는 백제의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같다고 되어 있다.52)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 문제는 논쟁거리가 아니었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朱蒙(이 부여 출신이라는 건국설화에 의거해 부여․고구려를 굳이 나눌 필요가 없는 하나의 문화단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관우와 이기동에 의해 백제의 왕실교대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자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백제의 건국집단을 비류계와 온조계로 나누고, 비류를 우태(優台), 온조를 주몽(朱蒙)에 각각 연결한 뒤 왕실 교체를 상정하고 나니 이제는 비류와 온조의 문화 기반 차이를 설명해야하는 새로운 과제가 부각된 것이다.
과제 해결을 위해 물질적 흔적을 분석하는 고고학의 연구결과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특히 백제 왕실묘역으로 추정되는 석촌동고분군이 가장 뚜렷한 물질적 흔적으로서 부각되었다. 1916년경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일대에는 적석총 66기와 봉토분 23기가 분포했다고 한다.53) 한강유역의 적석총이 압록강유역에 분포한 고구려의 적석총을 시기·형태적으로 모방·계승했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므로 매장된 사람들이 고구려계통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석촌동·가락동일대에 분포한 봉토분의 상당수는 굴광(掘壙)이 아닌 성토(盛土)를 통해 매장주체시설을 만들었고, 단장(單葬)이 아닌 다장(多葬)이며 이혈합장(異穴合葬)이라는 점에서 특색이 있다. 그래서 이를 보통의 토광묘와 구분하여 토축묘(土築墓)라 부르고 영산강유역의 묘제와 연관짓기도 한다.54) 이러한 토축묘와 적석총의 공존에 대해 임영진(林永珍)은 해양문화계통의 토착 선주민(韓)과 기마문화계통의 고구려계 이주민이 결합하였기 때문이라고 풀이하며 대표적인 사례로서 석촌동(石村洞) 1·2호분을 제시하였다.55)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부여→백제를 처음으로 지적한 이는 강인구(姜仁)求이다. 그는 석촌동일대에 토축묘뿐 아니라 토광묘도 널리 분포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여기의 토광묘를 부여(夫餘)의 묘제와 연결시켰다.56) 마침 중국에서는 유수(楡樹)의 노하심(老河深)유적이 발굴되는 등 부여의 묘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조사례가 늘어났다.57) 그리고 백제의 건국신화 분석을 통해 온조집단 내지 백제 왕실이 고구려 왕실과 대응하는 별개의 집단으로서 부여계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58) 이에 이도학은 ‘부여일파=만주백제’에 기초하여 백제의 적석총 축조는 무령왕대 전축분(塼築墳) 축조처럼 단순한 채용에 지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59) 그러자 박순발(朴淳發)은 인류학자 Colin Renfrew의 학설을 원용하여 더욱 대담한 가설을 발표하였다. 부여계 주민인 백제의 건국세력이 고구려와 경쟁하던 중 상대적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적국인 고구려의 왕실묘제(적석총)를 채용했다는 것이다.60) 무덤은 보수적인 문화이며 전통성이 강하다는 고고학계의 상식을 뒤집은 추론이기에 당연히 파장이 일었다.
지상(地上)에 부석(敷石)한 다음 매장주체시설을 만들고 적석(積石)한다는 발상에 주목하면, 한강유역의 적석총은 분명 고구려문화의 파생이며, 그 요소가 신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에까지 연결된다.61) 더욱이 그와 똑같거나 비슷한 방식으로 쌓은 무덤이 서울을 비롯해 연천․춘천․양평․제천 등지에 널리 분포한다는 사실은 석촌동의 적석총을 단순히 정치적 역학관계로만 해석할 수 없게 한다. 그리하여 임영진은 석촌동고분군이 백제왕실의 묘역이라는 전제 하에 압록강유역 고구려주민의 남하․정착을 상정하였다.62)
한편, 연천 삼곶리에서 고구려의 전형적인 적석총이 발견․조사되었다.63) 이에 삼곶리 적석총을 파주의 육계토성(六溪土城) 등과 한데 묶어 임진강유역이 백제 초기의 일시적 중심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이 나왔다.64) 이러한 추정은 이현혜의 지지를 얻고65) 임영진에 의해 최근 더욱 구체화되었다.66)
백제의 초기 중심지를 임진강유역에서 찾으려는 시각은 부정확한 문헌자료 대신 객관적인 물질자료를 통해 백제 초기 역사에 접근하려는 시도이지만, 핵심자료의 편년이 일치하지 않는 점이 문제이다. 지금까지 육계토성 내부의 수혈주거지에서 출토된 백제 토기․철기들은 대략 4세기 무렵으로 편년할 수 있으며, 일부 수혈주거지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철기들은 대략 5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유물에 위세품은 거의 없고 군사적 성격이 강한 철기의 점유율이 높아서 4세기경 백제가 한창 북진하던 중 축조하고 5세기경에는 고구려가 이용한 군사시설일 개연성이 있다.67) 그러므로 주요유적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부여와 백제의 연관성은 문헌자료에서 더욱 강조되며, 고구려와 백제의 연관성은 고고자료에서 특히 인상적이다. 문헌은 상대적으로 거짓말하기 쉽지만, 생활의 흔적은 거짓말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은 대체로 고고자료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백제의 적석총 조영이 정치적 역학관계에 따른 의도적 타문화(他文化) 채용이라는 주장은 생활의 흔적도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거짓말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다가온다. 이에 대한 고고학계의 반응은 아직 냉담하지만, 묘제의 문화사적 의미에 대한 지금까지의 검토가 충분하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무덤이 과연 종족 및 문화의 계통성을 알려주는 지표인지를 더욱 적극적으로 논의하고, 문화의 속성에 대해서도 성찰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여(夫餘)의 묘제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 할 것이다.
주석
45) 又云 臣與高句麗源出夫餘 先世之時 篤崇舊款.(魏書 권100 列傳 百濟國)
46)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解爲氏.(三國遺事 권2 紀異 南扶餘 前百濟)
47) 春 移都於泗沘 國號南扶餘.(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聖王 16년.)
48)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陀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조 細注)
49) 春正月 右輔乙音卒 拜北部解婁爲右輔 解婁本扶餘人也 神識淵奧 年過七十 膂力不愆 故用之.(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41년)
50) 百濟始祖溫祚王 其父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溫祚王 즉위년)
51) 冬十月庚寅朔己酉 百濟王子餘昌 悉發國中兵 向高麗國 …… 餘昌對曰 姓是同姓 位是杆率 年卄九矣.(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4년)
52) 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梁書 권54 諸夷傳 東夷 百濟)
其衣服男子略同於高麗.(周書 권49 異域傳 百濟)
其衣服與高麗略同…… 喪制如高麗.(隋書 권81 東夷傳 百濟)
53) 朝鮮古蹟圖譜 第三冊(1916) 704~706圖.
54) 姜仁求, 1984, 漢江流域의 土築墓 , 三國時代墳丘墓硏究, 영남대학교 출판부.
55) 林永珍, 1987, 石村洞一帶 積石塚系와 土壙墓系 墓制의 性格 , 三佛金元龍敎授 停年退任記念論叢; 1994, 漢城時代 百濟의 建國과 漢江流域 百濟古墳 , 百濟論叢4, 백제문화개발연구원.
56) 姜仁求, 1989, 漢江流域 百濟古墳의 再檢討 , 韓國考古學報22.
57)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1987, 楡樹老河深, 文物出版社.
58) 金杜珍, 1990, 百濟 建國神話의 復元試論 , 國史館論叢13, 국사편찬위원회 ; 1999, 韓國古代의 建國神話와 祭儀, 일조각.
59) 李道學, 1991, 百濟의 起源과 國家發展過程에 관한 檢討 , 韓國學論集19,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71쪽 ; 1995, 百濟古代國家硏究, 일지사, 109쪽.
60) 朴淳發, 1996, 百濟의 國家形成과 百濟土器 , 제2회 百濟史 定立을 위한 學術세미나, 백제문화개발연구원 ; 2001, 앞의 책.
61) 姜仁求, 1981, 신라 積石封土墳의 구조와 계통 , 韓國史論7,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 1984, 三國時代 墳丘墓硏究.
62) 林永珍, 1995, 앞의 박사학위논문.
63) 金聖範, 1992, 軍事保護地區內 文化遺蹟 地表調査報告-京畿道 漣川郡編 , 文化財25 ; 尹根一․金性泰, 1994, 漣川 三串里 百濟積石塚, 문화재연구소.
64) 文安植, 1995, 百濟 聯盟王國 形成期의 對中國 郡縣關係 硏究 ,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65) 李賢惠, 1997, 3세기 馬韓과 伯濟國 , 百濟의 中央과 地方,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66) 林永珍, 2003, 積石塚으로 본 百濟 建國集團의 南下過程 , 先史와 古代19, 한국고대학회.
67) 김기섭․이경자․윤수희, 2007, 파주 六溪土城 조사연구보고서, 백제문화개발연구원, 151~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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