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왕 계보
대 |
왕 명 |
재위기간 |
약 사 |
1 |
고왕 (高王) (?~719) |
699-719 |
이름은 조영이고 성은 대씨이다. 말갈의 속말부 사람으로 말갈 7부의 하나인 속말부는 고구려와 가까웠으며 고구려의 흥성시기에 신하로 예속되어 있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속말의 우두머리 걸사비우는 걸걸중상과 가속을 거느리고 영주에 옮겨 살면서 거란에 귀부하였다. 당이 핍박하자 조영은 고구려 및 말갈의 군사를 합해서 항거하였다. 조영은 비우의 무리들을 병합하여 동으로 요하를 건너 말갈의 옛 땅을 보유하고 오루하를 격하고 동모산에 웅거하여 성을 쌓고 살았는데 그 땅은 영주에서 동으로 2천리 되는 곳에 있다. 조영은 날래고 용병에 능숙하였기에 말갈의 무리들, 즉 백돌, 안차골, 호실 등 부의 유민들이 모두 호적에 편입되고 고구려의 잔여도 점점 그에게 귀부하였다.당 무후 성력 원년에 조영은 자립해서 진국왕이 되었으며 말갈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발해 건국의 시초이다. |
2 |
무왕 (武王) (?~739) |
719~737 |
이름은 대무예(大武藝). 발해의 시조인 고왕(高王:대조영)의 아들이다. 719년 3월 고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했다. 즉위 후 인안(仁安)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영토확장 등 발해의 기반을 다졌다.722년 쑹화 강[松花江] 하류에서 헤이룽 강[黑龍江] 유역에 걸쳐 거주하는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외교관계를 취할 때 발해의 사전 양해를 얻던 전통을 파기하고 독자적으로 당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자, 무왕은 아우인 대문예(大門藝) 등으로 하여금 흑수말갈을 치게 했다. 그러나 대문예가 당과 겨루는 것이 무모하다며 당에 망명하자, 이에 격분한 무왕은 723년 장문휴(張文休)로 하여금 당의 등주(登州:지금의 산둥 성[山東省])를 공격하게 하여 자사 위준(韋俊)을 죽였다. 당과의 충돌에 대비하는 방책의 하나로 727년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했다. |
3 |
문왕 (文王) (?~793) |
737~793 |
이름은 대흠무(大欽茂). 무왕의 아들이다. 1980년에 발견된 정효공주(貞孝公主) 묘비에 따르면, ‘대흥보력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金輪聖法大王)’이라는 존호를 사용했다고 한다.737년에 즉위해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하고 774년(대흥 38)에 보력(寶曆)으로 고쳤다가 다시 대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해 병사할 때까지 그 연호를 지켰다. 1948년 돈화현(敦化縣) 육정산(六頂山)에서 출토된 정혜공주 묘의 비문을 보면 ‘보력’이라는 연호가 7년 이상 쓰였던 것이 분명하다.문왕은 고왕 대조영(大祚榮) 이후 30년간 수도였던 지금의 돈화분지(敦化盆地) 안에 있던 오동성(敷東城)의 비좁은 지역에서 벗어나, 두만강 하류로 흘러드는 해란하(海蘭河) 유역에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무단강(牧丹江) 유역에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그리고 지금의 훈춘현(琿春縣) 반랍성(半拉城)에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를 구축해 천도를 거듭하였다. |
4 |
폐왕 (廢王 ) (?~794) |
793~794 |
이름은 원의(元義)이고 문왕의 족제이다. 대흥 57년 봄에 문왕이 훙거하고 세자 굉림(宏臨)이 일찍 죽었기에 원의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2월 임술일에 왕자 청윤 등 30여명을 보내어 당나라에 조하하였다. 등차있게 벼슬을 수여하였다. 원의가 등극해서 몇달이 지나자 신하들을 대함에 의심하고 학대하였으므로 나라사람들이 그를 죽여버렸다.강왕, 이름은 숭린, 문왕의 작은 아들이다. 중흥원년 겨울에 성왕이 훙거하니 숭린이 국무를 권지하였다.정력 원년 춘정월에 기원을 고쳤다. 2월 을사일에 당나라에서 내시 은지첨을 보내어 숭린을 발해군왕 겸 좌효위대장군, 홀한주도독으로 책봉하였다 |
5 |
성왕 (成王) (?~795) |
794~795 |
성왕은 발해의 제 5대 왕이며, 이름은 대화여이다.그는 문왕의 손자로서, 대원의가 왕위에서 쫓겨나자 그 뒤를 계승했다. 연호를 중흥으로 고치고 이전의 도읍지였던 상경용천부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위를 계승한 지 몇 달만에 사망한다. |
6 |
강왕 (康王) (?~809) |
795~809 |
이름은 대숭린(大嵩璘). 제3대 문왕의 막내아들이다. 794년에 즉위한 제5대왕 대화여(大華璵)가 그해에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정력(正曆)’이라는 연호를 썼다. 당나라에서는 즉위 이듬해인 795년 2월 대숭린에게 ‘발해군왕’의 책봉을 내리고, 798년에는 다시 ‘발해국왕’의 책봉을 내렸다. 15년간에 걸친 치적은 네 차례에 걸친 당나라에의 사신파견과 빈번하였던 일본과의 사신내왕이 알려져 있을 뿐, 특기할만한 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
7 |
정왕 (定王) (?~812) |
809~812 |
이름은 대원유(大元瑜). 강왕(康王) 대숭린(大嵩璘)의 아들이다. 영덕(永德)이라는 연호를 세웠다. 재위기간이 4년에 지나지 않았으며, 치적으로서 특기할만한 것이 전하지 않는다. |
8 |
희왕 (僖王) (?~817) |
812~817 |
이름은 대언의(大言義)이며, 제7대 정왕의 아우이다. 주작(朱雀)이라고 건원(建元)하였으며, 재위 동안 당나라에 자주 사신을 보냈다.814년에는 당나라에 불상을 보내기도 하여,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발해불교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이밖에 특기할 업적은 없다. |
9 |
간왕 (簡王) (?~818) |
817~818 |
이름은 대명충(大明忠). 제7대 정왕의 둘째 아우이다. 형인 제8대 희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태시(太始)’라고 건원(建元)하였으나, 즉위한 다음해에 죽었기 때문에 정치·행정·외교면의 업적은 별로 없다. |
10 |
선왕 (宣王 ) |
818~830 |
이름은 대인수(大仁秀). 대조영(大祖榮), 즉 고왕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4대 손으로 알려져 있다.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며 발해국을 중흥시킨 군주이다.발해국은 제6대 강왕(康王) 대숭린(大嵩璘)이 809년에 죽은 뒤 그를 이은 정왕(定王) 대원유(大元瑜)부터 희왕(僖王)·간왕(簡王)에 이르는 3대 왕의 재위 기간이 너무 짧아 정치적 불안을 나타내며 국세는 위축된 듯했는데, 818년 선왕 대에 이르러 침체된 국세가 회복되었다 |
11 |
대이진 (大彛震 ) |
830~858 |
연호는 함화(咸和)이며, 시호는 전하지 않고 있다. 신덕(新德)의 아들이며, 할아버지는 제10대 선왕(宣王)이다.이때 학생 해초경(解楚卿)·조효명(趙孝明)·유보준(劉寶俊)·이거정(李居正)·주승조(朱承朝)·고수해(高壽海) 등도 당나라에 유학하였고, 당나라에서는 장건장(張建章)이 서적을 가지고 발해에 들어오는 등 발해와 당나라의 문화적 교류는 활발히 전개되었다. |
12 |
대건황 (大虔晃 ) (?~?) |
858~871 |
제11대 왕 대이진(大彛震)의 동생이다. 연호와 시호는 전하지 않으며, 당시의 내치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고, 단지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치에 관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당나라와의 교섭은 당나라 내부의 농민폭동과 관련하여 빈번하지 못하였던 데 반하여, 일본과의 교섭은 계속되었다. 858년 겨울 정당성 좌윤(政堂省左允) 오효신(烏孝愼) 등 104인을 일본에 보냈으며, 860년에도 이거정(李居正) 등 105인을 일본에 보냈는데, 그 목적은 주로 신라에 대한 견제와 경제적 이해관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
13 |
경왕 (景王) (?~893) |
871~894 |
이름은 대현석(大玄錫)으로 제12대 왕인 대건황(大虔晃)의 아들이다. 재위 중 일본·당과 활발한 외교관계를 가졌다. 특히 일본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했다. 877년(경왕 8) 공목관(孔目官) 양중원(揚中遠)을 비롯한 105명을, 882년에는 배정(裵禎) 등 105명을 사절단으로 보냈다. 일본과의 교류는 정치적인 의미보다는 무역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에는 의종(懿宗) 때 3차례나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신당서 新唐書〉 발해전(渤海傳)에 보인다. |
14 |
대위해 (大瑋) |
894~906 |
발해 제14대 왕. 재위 894∼906. 연호와 시호·가계 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당시의 내치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치에 관한 기록만이 있다 |
15 |
애왕 (哀王) |
906~926 |
휘(諱)는 대인선이다.발해의 마지막 왕 경왕(景王)의 아들이다. 925년 12월 거란(契丹)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遼의 태조)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 부여부(扶餘府)를 점령하고 다음해 수도 홀한성(忽汗城:東京城)을 공격하자 항복하고 말았다. 그는 포로로 잡혀가고, 발해는 14대 228년 만에 멸망하였다. |
발해 왕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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