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4835

[다시 쓰는 고대사] 진흥·진지·진평왕에게 색공한 미실, 30년 간 천하 호령
<16> 신라의 색공지신
이종욱 교수 leejw@sogang.ac.kr | 제384호 | 20140720 입력  

신라시대에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여자를 바치는 일을 뜻하는 색공(色供)은 에로티시즘이 아닌 고도의 정치 행위였다. 신라의 생활 풍습이 담겨 있는 국보 195호 토우장식 장경호. [사진 권태균]

신라의 미실(美室)은 한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인 중 한 명이었다. 『화랑세기』 11세 ‘하종’ 조는 미실을 가리켜 “용모가 절묘하여 풍후함은 옥진(玉珍·외할머니)을 닮았고, 환하게 밝음은 벽화(할머니의 어머니)를 닮았고, 빼어나게 아름다움은 오도(외할머니의 어머니)를 닮아서 백화(百花)의 신묘함을 뭉쳤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수를 모았다고 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실의 외할머니 옥진은 “이 아이(미실)는 우리의 도(道)를 일으킬 만하다”고 말하고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고 미도(媚道, 교태를 부리는 방법)와 가무(歌舞)를 가르쳤다. 이는 색공(色供)을 위한 교육이었다. 색공은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여자를 바치는 일을 뜻한다.
 


그렇게 색공 교육을 받은 미실은 한 평생 여러 명의 남자와 관계를 가졌다. 그는 제24대 진흥왕과 그의 큰아들이었던 동륜(銅輪)태자,진흥왕의 작은 아들로 동륜의 동생인 제25대 진지왕(금륜), 동륜태자의 아들인 제26대 진평왕(백정) 등 3세대에 걸친 성골(왕)에게 색공을 했다. 미실의 생존연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다만 546년에서 550년 사이에 태어나서 619년에서 622년 사이 언제인가 죽었다고 추측된다(이종욱, 『색공지신 미실』, 2005).

미실이 처음 관계를 가졌고 평생 남편으로 삼았던 사람은 6세 풍월주(화랑도의 수장) 세종(世宗) 한 사람뿐이다. 신국(神國), 즉 신라의 도에는 일부일처(一夫一妻)의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세종의 어머니 지소태후(제23대 법흥왕과 보도왕후 김씨의 딸이며, 법흥의 동생인 입종 갈문왕과 혼인해 진흥왕을 낳았음)는 진골정통(眞骨正統)이었기에 대원신통(大元神統)인 미실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기서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은 신라의 대표적인 두 인통(姻統)이다. 인통은 왕비(왕후 또는 황후)를 배출하던 계통이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부계계승을 거울에 비춘 것과 같은 원리로 인통은 어머니에서 딸로 이어지는 모계계승으로 이어졌다. 인통에는 왕비가 되지 못한 여자들도 모두 속하였다.



다시 미실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세종의 어머니 지소태후는 미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세종은 미실을 너무 그리워하여 궁으로 불러들였다. 미실이 세종을 모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상통했다. 그 때 지소태후는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思道)왕후를 폐하고, 자기의 딸이자 세종의 누나인 숙명을 왕비로 삼으려 했다. 그러한 사정을 미실이 이모인 사도왕후에게 알렸고, 그 사실이 알려져 지소태후가 노했다. 이에 지소태후는 미실을 출궁시켰다(『화랑세기』 6세 세종).

출궁한 미실은 5세 풍월주 사다함(斯多含)과 서로 사랑했다(『화랑세기』 6세 세종). 사다함이 561년 9월 가야의 반란을 진압하러 갈 때 미실은 향가인 ‘풍랑가(風浪歌)’를 지어 위로해 보냈다. 그런데 세종이 너무 괴로워하자 두려워 한 지소태후가 미실을 다시 입궁시켜 세종의 부인으로 삼았다. 전쟁에서 돌아온 사다함은 ‘청조가(靑鳥歌)’를 지어 슬픔을 이야기했다. 사다함이 친구인 무관랑의 죽음을 슬퍼하여 죽게 되었을 때 6세 풍월주로 세종을 추천했다.

풍월주가 된 세종의 부인 미실은 이모인 사도왕후의 명으로 진흥왕의 큰아들인 동륜에게 색공을 하여 아이를 임신했다(『화랑세기』 6세 세종). 동륜이 언젠가 왕위계승을 하면 미실을 왕후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대원신통의 우두머리 사도의 지휘 하에 미실의 색공 일생이 시작된 것이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그 무렵 미실은 진흥왕을 사모하여 애를 태웠다고 한다. 그러한 마음이 진흥왕에게 전달되었다. 진흥왕은 사도왕후에게 “너의 조카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미녀인데, 어찌 너의 잉첩(媵妾, 사도왕후에 달린 첩)이 되지 못하고 다른 데로 시집갔는가”라고 물었다. 사도왕후는 이에 미실을 진흥왕에게 추천했다. 진흥왕이 미실과 한번 교합한 후에는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미실은 음사(陰事)를 잘하여 총애가 날로 중하여 황후궁 전주(殿主, 황후와 같은 지위)로 발탁되었다. 진흥왕이 조정에 나가 정사(政事)를 볼 때 미실이 옆에서 모시며 문서를 읽고 옳고 그름을 판결했다. 이로써 조야의 권세가 옥진궁(대원신통을 뜻함)으로 돌아갔다고 한다(『화랑세기』 11세 하종). 옥진은 미실의 외할머니였다. 옥진-묘도·사도·흥도-미실 3대로 이어지는 대원신통은 탁월한 색공지신(色供之臣,색공을 하는 신하)들이었던 것이다.

576년 진흥왕이 죽었을 때 사도와 미실, 그리고 미실의 동생 미생은 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일찍 죽은 동륜의 동생 금륜태자(진지왕)와 미실이 통하게 만들었다. 금륜이 왕위에 오르면 미실을 왕비로 삼기로 약속케 하고 금륜을 즉위시켰다(『화랑세기』 11세 하종). 그런데 왕위에 오른 금륜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진지왕의 어머니인 사도태후와 미실 등이 진지왕을 폐위시켰다(『화랑세기』 13세 용춘공).

579년 사도태후와 미실은 동륜태자의 아들 백정(진평왕)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 그 때 진평왕은 13살이었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넘쳤다. 사도태후는 보명과 미실에게 색을 가르치도록 했다. 미실은 골품이 낮다고 핑계를 대며 양보했으나, 보명은 임신 3개월이라 미실이 먼저 색공을 했다. 색을 알게 된 진평왕은 스스로 보명궁에 찾아가 보명과도 상통했다. 진평왕은 즉위 1~2개월만에 미실을 우후(右后)로, 보명을 좌후(左后)로 임명했다(『화랑세기』 22세 양도공). 이로써 진평왕 대에도 색공을 한 미실은 그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미실은 진흥왕의 총애를 믿고 방탕해져 7세 풍월주 설원랑은 물론이고 자신의 동생인 미생과도 사통(私通)했다(『화랑세기』 10세 세종). 미실은 여러 왕이나 태자에게 색공을 했고, 설원랑과도 사통을 했기에 자녀들이 많았다. 미실은 왕들에게 색공을 하여 30년 동안 천하를 호령하고 일족이 부귀를 누린 것이 사실이다(『화랑세기』 10세 미생랑). 여기서 신라 사람들의 색공은 에로티시즘(eroticism)의 문제가 아니라 고도의 정치행위였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한국 역사가 중에는 이러한 연유로 미실과 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화랑세기』를 위작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신라의 역사를 옳게 알고 인통과 색공을 이해하면 미실이야말로 신국의 도를 치열하게 산 인물임을 알 것이다. 『화랑세기』 6세 세종 조에는 인통을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제13대)미추대왕(262~284)이 광명(光明)을 황후로 삼으며 후세에 알려 말하기를 ‘옥모(玉帽)의 인통이 아니면 곧 황후로 삼지 말라’했다. 까닭에 세상에서 이 계통을 진골정통이라 한다. 옥모부인은 곧 조문국의 왕녀인 운모(雲帽) 공주가 구도공에게 시집가서 낳은 사람이다. 옛날부터 진골(眞骨)이 아니다.”

이를 보면 인통은 왕비를 배출하는 계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옥모부인이 낳은 딸들, 그리고 그들의 딸들로 이어지는 진골정통의 여자들이 대를 이어 왕비를 배출했다.

옥모의 딸 홍모(골정 갈문왕의 부인), 홍모의 딸 아이혜(제11대 조분왕의 왕비), 아이혜의 딸 광명(미추왕의 왕비), 광명의 딸 내류, 내류의 딸 아노(제19대 눌지왕의 왕비), 아노의 딸 조생(제22대 지증왕의 아버지 습보갈문왕의 부인), 조생의 딸 선혜(제21대 소지왕의 왕비), 선혜의 딸 보도(법흥왕의 왕비), 보도의 딸 지소로 이어지는 진골정통의 계보를 재구성할 수 있다.

미실의 인통인 대원신통은 눌지왕(417~ 458)의 동생 복호의 첩인 보미(宝美)를 시조로 하였다. 라이벌이었던 진골정통은 미추대왕 대(262~284)에 옥모부인을 시조로 하였다. 대원신통이 진골정통보다 늦게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진흥왕의 왕비 사도왕후와 진지왕의 왕비 지도왕후는 모두 대원신통이었다. 진평왕의 왕비 마야왕후는 진골정통이었다. 여기서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이 왕비나 태자비를 배출하기 위해 경쟁했던 사정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왕의 후궁을 배출하는 경쟁도 했다. 이 경쟁에서 이긴 인통은 일족들이 부귀를 누릴 수 있었다.

신라 인통은 색공(色供)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색공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통이 있어야 할 수 있던 것이었다. 『화랑세기』 10세 ‘미생랑’ 조에 묘도(妙道)가 “우리 집은 대대로 색공지신으로 총애와 사랑이 지극했다”라 나오고 있어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 묘도는 사도왕후의 언니로 대원신통이었고, 색공의 대표적 인물인 미실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미실이 색공을 하던 시기에도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은 왕비나 왕비의 잉첩을 배출하기 위한 색공 경쟁을 벌였다. 당시 진골정통은 지소태후를 종(宗, 우두머리)으로 삼았고, 대원신통은 사도왕후를 우두머리로 삼았다(『화랑세기』 11세 하종). 사도왕후는 대원신통의 번성을 위해 조카인 미실로 하여금 왕들과 태자에게 색공을 하도록 적극 지원했다.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졸, 문학박사, 서강대 사학과 부교수·교수·서강대 총장 역임, 현재 서강대 지식융합학부 석좌교수. 『신라국가형성사연구』 등 22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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