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33056
서른아홉에 인생 꼬인 정약용...500권 미스터리
[역사 파고들기③] 다산은 18년 유배생활 어떻게 보냈나
12.05.17 11:19 l 최종 업데이트 12.05.17 11:19 l 김종성(qqqkim2000)
▲ 다산기념관에 있는 정약용 초상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유적지 소재. ⓒ 김종성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은 요즘 말로 하면 '엄친아'였다. 가문으로 보나 개인으로 보나, 그는 상당히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정약용의 집안은 이른바 팔대옥당(八代玉堂)이라 불린 명문가였다. 학문이 높은 사람만 될 수 있다는 옥당 관리, 즉 홍문관 관리를 8대 연속으로 배출했다 하여 그렇게 불린 것이다. 이 가문은 양반 중에서도 양반이었다.
정약용은 스물두 살에 소과(小科) 시험인 생원시에 합격, 스물여덟에는 대과인 문과에 급제했다. 20대에 대과까지 패스하는 것은 흔치 않았다. 그는 병조참의(국방부 국장), 황해도 곡산부사, 부승지(대통령비서) 등을 역임하며 탄탄대로를 달렸다. 정조 임금의 신임까지 얻었으니, 그의 앞날은 푸른 하늘처럼 높고 맑기만 했다.
그런데 서른아홉 살 때부터 정약용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주군인 정조가 갑작스레 사망한 것이 그 시초였다. 정조의 새 할머니인 정순왕후 김씨는, 손자가 죽은 뒤 심환지를 비롯한 보수파와 손잡고 정조시대의 개혁을 파괴했다. 이 때문에 정조의 측근들은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었다. 정약용도 그런 표적이었다.
정조의 시신이 땅에 묻히고 얼마 뒤인 순조 1년 2월 8일(1801년 3월 21일). 이날 새벽, 정약용은 자택에서 의금부 관리들에게 체포되었다. 죄목은 '서학쟁이'였다.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였다. 오래전에 천주교를 떠난 사람에게 이런 죄목을 뒤집어씌운 것은, 정약용 체포의 본질이 정치 탄압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기에 정약용뿐만 아니라 그의 가문 전체가 사실상 멸문지화를 당했다. 둘째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가고, 셋째 형인 정약종과 매형인 이승훈은 사형을 당했다. 이외에도 고초를 겪은 집안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렇게 시작된 정약용의 수난은 무려 18년간이나 계속됐다. 구속된 이후에 그는 경상도 장기현(포항시)과 전라도 강진군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그렇게 새장에 갇힌 새가 되어, 그는 18년을 견뎌야 했다.
18년의 수난 생활에 대해 정약용은 독특한 대처법을 취했다. 그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승리를 향한 날갯짓'이다. 정조의 죽음과 함께 맞이한 패배를 만회하고 내일의 승리를 기약하고자, 그는 유배지에서 18년간 그렇게 날갯짓을 했다.
정약용의 '날갯짓'... 어떤 방법이었기에
▲ 정약용의 생가인 여유당. 생가 터의 근처에 복원된 건물이다. 다산유적지에 있다. ⓒ 김종성
특이한 것은, 정약용의 날갯짓이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양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중앙정계에 복귀하거나 반정부운동을 벌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있는 현재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완성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그런 철학적인 방법으로 그는 승리를 이룩하고자 했다.
승리를 향한 정약용의 날갯짓 중 하나는, 유배지 주민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가 유배지에서 당한 설움을 감안하면, 이런 태도는 따스한 가슴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취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장기현 유배 당시, 정약용은 죽림서원이란 곳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문전박대를 당했다. 현지 선비들의 저지로 문 앞에서 쫓겨난 것이다. 정조가 살았을 때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번째 유배지인 강진군에서는 한동안 숙소를 구하지 못해 마음을 졸여야 했다. 정약용에게 숙소를 제공해주는 집이 없었던 것이다. 장례 문제에 관한 서적인 <상례사전> 서문에서 그는 "강진 백성들은 귀양 온 사람 보기를 큰 해독처럼 여겼다"고 했다.
다행히, 주막집 여주인의 도움으로 숙소 문제를 간신히 해결할 수 있었다. 위 서문에서 그는 "한 노파가 나를 불쌍히 여겨 자기 집에 머물게 해주었다"고 했다. 이 노파는 주막집 여주인이었다. 여주인은 그에게 객실 하나를 선뜻 내었다. 세상이 다들 기피하는 인물에게 호의를 베푼 것을 보면, 마음도 좋고 배짱도 좋은 술집 마담이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냉대를 받으면서도 정약용은 유배지 주민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베풀었다. 대표적 증거 중 하나가 <촌병혹치>라는 저서다. 이 책은 장기현 주민들을 위해 저술한 의료 지침서다. 병에 걸리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거나 뱀을 잡아먹을 정도로 의료 사각지대였던 장기현 주민들을 위해 이 책을 지었던 것이다.
승리를 향한 정약용의 날갯짓 중에서 또 하나는 자녀교육에 대한 열정이었다.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자, 그의 자녀들은 학문에서 마음을 돌렸다. 어차피 출셋길이 막혔다는 생각에서였다.
정약용은 자녀들이 공부를 포기하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 공부를 독려했다. 문집인 <여유당전서>에 수록된 '두 아들에게'란 서신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말로 공부할 때가 되었다. 가문이 망했으니, 오히려 더 좋은 처지가 된 것이 아니냐?"
출셋길이 막혔으니 출세에 구애받지 않고 진정한 학문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어서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지를 빨리 구해달라 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서 인격적 완성을 이루라고 가르쳤으니, 그 인격의 깊이가 어디까지인지 헤아릴 길이 없다.
편지에서 인상적인 표현을 좀 더 소개하면, "학자에게는 가난이 축복이다", "마음에 조금만 성의만 있으면, 난리 속에서도 반드시 진보할 수 있다" 등이다. 유배 중인 사람이 가족의 격려를 받아도 시원찮을 판국에, 도리어 가족을 격려하고 자녀교육에 만전을 기한 것이다.
▲ 왼쪽 사진은 석탑에 새겨진 정약용의 저서 표지들. 오른쪽 사진은 <목민심서> 및 <경세유표> 부분을 가까이서 찍은 것. 다산유적지에 있다. ⓒ 김종성
18년간 유배생활 중 500권 저술
승리를 향한 정약용의 날갯짓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전투적 글쓰기였다. 그가 남긴 저서는 약 500권이다. 저술 작업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기간은 18년간의 유배생활이다.
아무리 유배 중이라 시간이 많다 해도, 500권의 책을 쓴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는 왜 그렇게 열심히 글을 썼을까?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으면, 후세 사람들은 사헌부(검찰청)의 보고서나 재판 서류를 근거로 나를 평가할 것이다."
법적으로는 이미 죄인이 되었지만, 역사의 재평가를 받기 위해서 열심히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 정약용의 생각이었다. 정의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열심히 글을 쓴다면, 후세 사람들이 자기를 올바로 평가해줄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후세 사람들은 재판 서류 등을 근거로 자기를 죄인 취급할 것이라고 그는 우려했다.
정약용은 자기에 대한 현실 권력의 법적 평가를 무력화시키고 미래 권력의 역사적 평가를 받고자 그토록 치열하게 글을 썼던 것이다. 죽어서 승리하고자 그렇게 했던 것이다. 죽음으로써 삶이 끝나는 게 아니라, 죽어서도 얼마든지 인생역전을 이룰 수 있다고 그는 확신한 것이다.
실제로도 정약용은 승자가 되었다. 정약용은 생전에는 적들에게 졌지만, 죽어서는 그들을 압도했다. 오늘날 정약용의 위상은 정순왕후나 심환지를 크게 능가한다. 역사적 위상을 놓고 보면, 정순왕후나 심환지는 정약용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정약용은 글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다. 500권의 책 속에 담긴 그의 사상은 한국 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정약용은 이미 세상을 이기고 또 이긴 것이다. 그가 쓴 500권의 책은 500개의 승전비나 마찬가지다.
젊은 나이에 주군도 잃고 가문도 망한 정약용은, 길고도 지루한 유배생활 중에도 스스로를 혁명하기 위한 노력을 잠시도 늦추지 않았다. 그는 살아서 못다 한 일들을 죽어서라도 달성하고자 했다.
정약용은 유배생활을 역전의 발판으로 만들었다. 쓰러지면 쓰러진 채로 제2의 인생을 개척하고자, 그는 불굴의 날갯짓을 했다. 결국, 그는 새장을 뚫고 날아올랐고, 적들보다 훨씬 더 높이 푸른 하늘을 날아올랐다. 정약용은 그렇게 역사의 승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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