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ugyo.net/et/dict/dict_view.jsp?sActnMode=dict_actn&DICT_CODE=D002987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

기자동래설에 관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기록이 있다. 첫째는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에서, "주(周) 무왕(武王)이 옥에 갇혀 있던 기자를 석방하니 기자가 그 석방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아 조선으로 도망갔다. 이에 무왕이 조선후(朝鮮候)로 봉(封)했다"라는 기록이고, 둘째는 『사기(史記)』「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 나온 "무왕이 은(殷)을 멸하고 기자를 방문하여 안민(安民)의 도(道)를 묻고 그를 조선후에 봉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셋째는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의 "은나라가 쇠함에 기자가 조선에 가서 예의(禮儀)와 전잠(田蠶)과 직조(織造)를 가르쳐 주었더니, 낙랑조선민(樂浪朝鮮民) 사회에는 범금팔조(犯禁八條)란 법금(法禁)이 행하여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자료에 근거하면 어떤 경로로든 기자가 조선후에 봉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자동래설의 기록은 한대 이후의 문헌에서 보이며, 선진시대의 기록에서는 기자(箕子)가 덕과 학문이 뛰어나고 어진 이로 기술되어 있을 뿐, 그가 조선 땅으로 가서 지배자가 되었다는 서술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기자동래설은 역사학계에서 대체로 부정되는 경향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유교의 정교(政敎) 이념이 체제를 갖추게 되는 고려 중기 이후부터 이 기자동래설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산되어 갔으며, 조선조에 들어서는 이를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의 근거로 인식하여 기자에 대한 숭상과 믿음이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이는 또한 우리 나라에 유교가 언제 전래되었는가 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장지연(張志淵)은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의 첫머리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는 단군 시대 말기 기자에 의해서 우리 나라에 유교가 전개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기자는 은(殷) 말기에 주(紂)를 피해 우리 나라에 온 뒤 홍범구주(洪範九疇)의 도리로 동방을 교화하였다. 홍범은 곧 역상(易象)의 원리이고 유교의 조종(祖宗)이다. 그러므로 기자가 이것을 무왕에게 전하고 또 조선에 와서 팔조(八條)의 교를 가르쳤다고 한다면, 지금 그 팔조가 비록 유결(遺缺)되어 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공자가 찬역(贊易)해서 "기자의 명이(明夷)는 그 도를 동방에 밝힌 것이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조선이 유교종조(儒敎宗祖)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교가 비록 고대 하(夏)·은(殷)에서 일어났으나, 그의 유일한 승계자였던 기자가 우리 나라에서 몸소 교화했으니 바로 우리 나라가 유교 교화의 종주국이 아니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장지연은 이 기자의 유교 교화는 그 후 더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그에 따라 우리 나라는 다시 중국에서 계승되고 새롭게 발전한 공자교를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덧붙이고 있다. 곧 장지연은 유교를 '공자(孔子) 이전의 정교일치(政敎一致) 상태의 유교'와 '공자에 의해 도덕 윤리화한 유교'로 나누고 전자는 기자동래와 더불어 전래되었으며, 후자는 공자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래되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를 다시 연대로 환원하면 B.C. 1110년 경에 공자 이전의 유교가, 그리고 B,C. 500년 경에 공자 이후의 유교가 전래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대체로 기자동래설의 근거가 되는 문헌들을 연구 비판하고 그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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