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ahan.wonkwang.ac.kr/source/go9.htm
"百濟의 馬韓 幷呑에 대한 新考察(백제의 마한병탄에 대한 신고찰) - 강봉룡" 중 "1. 머리말"만 가져와 제목을 달리 달았습니다.
"百濟의 馬韓 幷呑에 대한 新考察(백제의 마한병탄에 대한 신고찰) - 강봉룡" 중 "1. 머리말"만 가져와 제목을 달리 달았습니다.
삼국사기 온조기의 마한(馬韓) 병탄(幷呑) 기사 분석
강봉룡 1997
그간 백제와 마한의 관계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온조왕조(溫祚王條)(이하에서는 '온조기/溫祚紀'라 약칭함)에 전하는 관련 기사를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는데, 각 논자들 간에는 현저한 견해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서는 우선 그 관련 기사를 전개 과정의 순서에 따라 크게 3단계의 군(群)으로 나누어 인용하고, 이를 중심으로 기왕의 논의에 나타난 문제점을 점검해 보기로 한다.
가
1) 10년 7월에 (온조)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록(神鹿)을 잡아 마한(馬韓)에 보냈다.
2) 13년 8월에 마한(馬韓)에 사신을 보내 천도(遷都)할 것임을 고하고 마침내 강역을 획정하였으니, 북으로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으로 웅천(熊川)에 이르고, 서로 바다에 접했으며, 동으로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3) 18년 10월에 말갈이 갑자기 이르자 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받아 쳐서 추장(酋長) 소모(素牟)를 붙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묻어 버렸다.
나
1) 24년 7월에 왕이 웅진책(熊津柵)을 만들자 마한왕(馬韓王)이 사신을 보내 꾸짖기를, "왕이 처음 강을 건너와서 발디딜 곳 하나 마련하지 못해서 내가 동북의 1백리 땅을 떼어주어 편안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두터웠다 할 것이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이 있어야 할 것이어늘, 이제 나라가 온전해지고 인민들이 모여들어 대적할 상대가 없다 생각하고서 성지(城池)를 크게 설치하고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라 하였다. 이에 왕이 부끄러이 여겨 그 책(柵)을 허물었다.
2) 25년 2월에 왕궁의 우물이 솟아오르고 한성(漢城) 인가의 말이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소를 낳았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우물물이 솟아오른 것은 대왕께서 발흥할 조짐이고 소의 머리가 하나이고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할 조짐입니다"라 하니, 왕이 이를 듣고 기뻐하면서 마침내 마한을 병탄할 마음을 굳혔다.
3) 26년 7월에 왕이 말하기를 "마한이 점차 약해지고 위아래에서 인심이 이반하니 그 세력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혹시 다른 세력이 이를 차지하면 우리까지 위태로와지니 후회해도 소용없다. 남보다 먼저 취하여 후환을 면하는 것이 좋겠다"라 하였다. 10월에 왕이 사냥을 하는 채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였는데, 오직 원산(圓山)과 금현(錦峴)의 2성만이 굳게 지켜서 함락되지 않았다.
4) 27년 4월에 2성이 항복하여 그 인민을 한산의 북쪽에 옮기니, 마한이 마침내 멸망했다. 7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다
1) 34년 10월에 마한의 구장(舊將)인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근거하여 반(叛)하였다. 왕이 병사 5천을 거느리고 치니, 주근은 스스로 목베어 죽었다.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 처자도 목베었다.
2) 36년 7월에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大豆城의 민호(民戶)를 나누어 옮겨 살게 하였다. 8월에 원산과 금현의 2성을 수즙(修葺)하고 고사부리성(古沙夫利城)을 쌓았다.
먼저 백제와 마한 관계의 제1단계는 마한이 백제보다 우위에 있던 단계이다. 가) 기사에 의하면, 백제는 마한에게 신록(神鹿)을 바치는가 하면[가-1 기사], 천도할 것임을 고하기도 하고[가-2 기사], 침입해온 말갈 추장을 사로잡아 바치는[가-3 기사] 등, 마한에 대해 복속의례를 다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는, 원래 백제가 마한으로부터 그 동북쪽 1백여리를 할양받아 정착한, 마한의 영도를 받는 외곽 세력에 불과했기 때문일 것이다[나-1 기사].
다음에 2단계는 백제가 마한과 대등한 관계로 성장하더니 급기야 그를 공성(攻滅)하게 되는 단계이다. 나) 기사에 의하면, 백제는 마한과의 경계를 획정하여 그와의 대등한 관계를 정립하고[나-1 기사], 그 이후 일정한 준비과정을 거친 다음에[나-2 기사], 마한의 국읍(國邑)을 급습해서 이를 아우르고[나-3 기사], 끝까지 저항하는 마한의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金峴城)의 항복까지 받아냄으로써[나-4 기사] 마한의 병탄을 완료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다음에 3단계는 마한 병탄에 이어 사후 수습 조치를 취하는 단계이다. 다) 기사에 의하면, 백제는 병탄에 반발하여 일어난 마한 장수 주근(周勤)의 반란을 진압하는 한편[다-1 기사], 점령지 마한의 성곽을 수리함으로써[다-2 기사] 불안정한 마한의 정세를 안정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처럼 온조기(溫祚紀)에 전하는 윗 기사들은 백제와 마한 관계의 전과정을 구체적으로 전해주고 있어 초기 백제사와 마한사 그리고 그 관계사의 연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기사는 치명적인 문제점도 안고 있어 주의를 요한다. 그 기년(紀年)의 문제가 그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년을 그대로 따를 경우, 윗 기사에 나타난 사건들은 B.C.9년(온조왕 10)에서 A.D.18년(온조왕 36) 사이에 일어난 것이 되는데, 이는 납득하기 어렵다. 마한에 복속의례를 다하면서 그의 영도를 받고 있던 백제가 불과 몇 년만에 그 마한을 완전 정복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수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에 의하면, 마한은 3세기 단계까지도 최고의 위상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백제와 마한 관계의 전과정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하는 것처럼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완료되었다고 보기는 더욱 어렵다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일찍부터 인지되어, 온조기(溫祚紀)에 나오는 마한 병탄의 시기를 재조정하려는 몇몇 시도가 있어왔다.
첫째, 마한 병탄 시기를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代)(346∼374)의 사실로 본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神功紀) 49년조(年條)에 나오는 일련의 정복기사를 백제가 마한을 병탄한 사실의 반영으로 보고, 그 시기를 근초고왕 24년(369)의 일로 파악한 것이다. 이 논자는 온조기(溫祚紀)에서 원산과 금현의 2성이 투항한 것으로 기록된 온조왕 27년[나-4 기사]과 근초고왕 24년의 간지(干支)가 '기미(己巳)'로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그의 논지를 보완하였다.
둘째, 백제 비류왕(比流王代)(304∼343)의 사실로 본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마한이 진(晋) 왕조에 대하여 277년부터 290년 사이에 8차례에 걸쳐 사신을 파견했다고 하는 진서(晋書) 동이열전 마한조(東夷列傳 馬韓條) 기사에 주목하면서, 마한의 진에 대한 사신 파견이 단절되는 291년 이후의 어느 가까운 시기에 마한이 멸망했을 것으로 상정하여, 그 시기를 비류왕 5년(309)으로 본 것이다. 이 논자는 온조기(溫祚紀)에서 마한의 국읍을 병탄했다고 한 온조왕 26년과 비류왕 5년의 간지(干支)가 '무진(戊辰)'으로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역시 그의 논지를 보완하였다.
세째, 백제가 마한을 병탄한 시기를 막연히 4세기 전반경으로 본 견해도 있다. 이 견해는 마한의 맹주국인 목지국(目支國)의 위치를 오늘날의 천안 일원으로 보고, 4세기 대에 이르러 이 지역에 서울 지역의 백제와 동일한 문화적 양상이 나타난다는 고고학적 성과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 견해는 접근 방법은 다르지만, 마한 병탄 시기를 둘째 견해와 비슷하게 보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백제의 마한 병탄 시기에 대한 견해는 이처럼 다양하게 제기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견해의 논자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神功紀) 49년조(年條) 기사를 위시로 하여 진서(晋書) 동이열전 마한조(東夷列傳 馬韓條)의 사신 파견 기사, 그리고 고고학적 성과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전거를 제시하면서 마한 병탄 시기를 판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가 제시한 기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더욱 문제인 것은 각 논자들이 온조기(溫祚紀)에 나오는 마한의 세력 범위를 각기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결국 그간의 논의는 각 논자들이 저마다 세력 범위를 달리 생각하는 마한에 대해서 그 멸망 시점을 논의한 셈이 되어, 의미를 갖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들을 상호 비교*검토하는 것만으로는, 마한 병탄 시기에 대한 합리적인 의견을 이끌어 내기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문제점을 염두에 둘 때, 그간에 백제와 마한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더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고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본고에서는 온조기(溫祚紀)에 나오는 백제의 마한 병탄 시기와 그 마한의 세력범위를, 상호 관련성을 염두에 두면서 새로이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백제와 마한의 관계가 새롭게 이해될 수 있는 계기기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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