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inhakoreanology.kr/science/kor_study_dn.php?sq=37&att_sq=322 (문서파일)
* "북한지역의 부거석성 고찰 - 윤현철"중에서 "1.머리말" 내용만 가져와 제목을 달리 달았습니다.
발해 동경 위치의 연구
* "북한지역의 부거석성 고찰 - 윤현철"중에서 "1.머리말" 내용만 가져와 제목을 달리 달았습니다.
발해 동경 위치의 연구
2012 윤현철
발해는 698년에 건국되어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되기까지, 229년 동안 지금의 중국 동북지구와 한반도 북부, 러시아 연해주의 광대한 지역을 경영했던 “해동성국”이다. 발해는 그 관할범위 안에서 중경현덕부・상경용천부・동경용원부・남경남해부와 서경압록부의 5경을 건립하였다. 발해 5경제도의 기원・기능・역할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가 진행 중이지만, 5경제도가 발해의 정치・경제・군사・대외관계 및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동경은 발해국의 5경 중 하나이며, 발해국의 제3대 문왕 대흠무가 785년(大興 48년, 당 貞元 元年)에 상경에서 동남쪽으로 천도한 후 성왕 대화여가 794년(大興 57년)에 마지막으로 상경으로 천도할 때까지 도읍을 정하였던, 발해의 네 번째 도성이다. 동경용원부의 관할범위는 오늘의 길림성 훈춘시와 러시아, 한반도의 북부 등 세 나라 지역이 서로 접하는 삼각지이며, 그 산하에 경주, 염주, 목주, 하주 등 4개주가 있었다. 동경이 도성의 역할을 수행한 것은 비록 짧은 기간 이었지만, 일본, 신라와의 교통・외교・군사적 측면이 많이 반영되었다. 발해는 동경용원부로 천도한 후 대외관계・경제 및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모두 새로운 성과들을 거두었으며, 교통과 도시의 건설에서도 새로운 발전이 있었다.
지금 학계에서 상경과 중경의 위치에 대해서는 그 윤곽이 뚜렷하지만, 동경의 위치는 아직까지 불확실하다. 동경용원부의 위치에 대한 설로는 팔련성설, 부거석성설, 책성설, 성장립자산성설, 종성설, 부령설, 경흥설, 남경설 등이 있다. 동경용원부에 관한 논문들로는 마쓰이 히토시(松井等)의 「발해국의 강역」('만주역사지리' 1, 1913); 고마이 가즈치카(駒井和愛)의 「발해의 5경 및 특산」(류세철/劉世哲 역, '민족역총', 1984 제4기); 가와카미 히로시(河上洋)의 「발해 교통도와 5경」('사림' 72-6, 경도대사학연구회); 왕협 (王俠)의 「훈춘의 발해유적과 일본도」('학습과 탐색', 1982 제4기); 단화사(丹化沙)의 「발해역사지리연구정황술략」('흑룡강문물총간', 1983 제1기); 쑨위량(孫玉良,손옥량)의 「발해천도천의」('북방논총', 1983 제3기); 웨이춘청(魏存成,위존성)의 「발해도성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사학집간', 1983 제3기); 웨이궈중(魏國忠,위국충)의 「당 시기 발해 5경제도 고찰」('박물관연구', 1984 제3기); 방학봉의 「발해 성진에 대하여」('연변대학학보', 1985 제1기); 이건재(李健才)의 「훈춘 발해 고성 고찰」('학습과 탐색', 1985 제6기); 장염화(張艳華)의 「모구외 발해 염주의 역사지위와 작용」('동강학간', 2001 제3기); 채태형의 「발해 동경용원부 훈춘 팔련성설의 재검토」('역사와 고고소식・동북아', 1991 제1기); 최순자(崔順子)와 손학보(孫學寶)의 「발해 “일본도”와 훈춘지구의 개발」('동북사지', 2004 제11기) 등이 있다.
마쓰이 히토시(松井等)은 동경용원부가 상경용천부에서 동남쪽으로 바다와 가깝고, 일본으로 가는 해로의 기점이며, 신라의 천정군과 39개역 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토대로 오늘날의 훈춘부근이라고 추정하였다.1) 토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은 위 관점을 더 보완하여 동경용원부가 오늘의 팔련성이라고 주장하였고,2) 1930년대 진위푸(金毓黻,김육불)도 동경용원부를 훈춘의 팔련성으로 보았다.3) 왕협(王俠)은 팔련성의 지리형세・도시구조・궁전건축・출토 문물 등 면에서 상경용천부와 비슷한 점들이 많다고 지적하면서 “역사문헌・지위와 명망・도리와 고고자료들이 서로 실증을 하고 있는데, 길림성 훈춘현의 팔련성이 바로 동경용원부이다.”라고 하였다.4) 이건재(李健才)도 훈춘현 경내의 고고 조사를 통하여, 팔련성은 발해 상경(오늘의 영안현 동경성)의 동남지역에서 제일 큰 발해 고성임이 확실하며, 상경의 남쪽에 있는 중경현덕부유지 - 화룡 서고성자와 규모・형태・출토 문물 등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고 주장했다. 또 팔련성 부근의 100~200리 범위 안에 있는 4곳의 발해고성은 동경용원부가 다스리고 있는 4개 주성의 위치 추정과 서로 부합된다. 때문에 팔련성을 동경용원부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5) 간즈겅(干志耿,간지경)과 쑨슈런(孫秀仁,손수인)은 “용원부 고지는 응당 상술한 고성 가운데서 규모가 제일 큰 것이다. 즉 둘레의 길이가 20리인 성장립자성이다.”라고 하였다.6) 이 관점에 대하여 이건재(李健才)는 이곳의 석성은 “(요대)개주의 석성을 가리켜서 한 말이지 동경용원부를 놓고 말한 것이 아니다.” “발해동경용원부를 석성으로, 둘레의 길이가 20리라고 보는데 이것은 오해이다.”라고 하였다.7) 왕협(王俠)은 동경용원부 산하의 염주는 “발해가 일본으로 통하는 문호이며 중일관계사・중국해외교통사 및 발해사에서 모두 현저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동시에 모구외(毛口崴)는 중일우호역사의 발전・발해와 일본사이의 무역왕래의 번영과 문화・종교・과학기술 등 방면의 교류를 가속화 하는데 거대한 작용을 하였다.”라고 하였다.8) 최순자(崔順子)는 “당 시기 발해인들의 훈춘지역 개발과 경영은 역사상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그 의의를 밝히고, “발해가 동경용원부를 수도로 정한 후, 훈춘・두만강 하류지역이 점차 발해왕국의 정치・경제・문화・군사의 중심으로 되었으며, 이 지역의 성읍 건설과 경제・상업의 대 번영을 크게 촉진하였다.”고 서술하였다.9) 하지만 채태형은 팔련성의 축성 물자와 기재・성의 크기・지리 위치 등으로부터 출발하여 팔련성은 바다에 잇닿아 있지 않으며 노정계산에서 역참기사와 부합되지 않다는 여러 문제점들을 거론하면서 동경용원부설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동경용원부를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부거리 부거석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가설을 제기하였다.10) 샤프쿠노브는 “발해가 염주에 대한 장시기의 경략(經略)은 이곳으로 하여금 행정중심・항구로 만들었으며, 수공업중심으로 전환하게 했다.”라고 하였다.11) 한국 학자들은 대부분 팔련성설을 지지하고 있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현재 학계에서는 동경용원부의 위치에 대하여 팔련성설과 부거석성설로 나뉘어 있다. 본고는 2009년의 현지답사를 토대로 종래 연구 성과의 한계를 염두에 두고 동경용원부로 비정되던 북한지역의 부거석성을 고찰해보려 한다.
주석
1) 松井 等, 「渤海國の疆域」, '滿洲歷史地理' 1, 南滿洲鐵道株式會社, 1913.
2) 鳥山喜一, '渤海史上の諸問題', 風間書房, 1968.
3) 金毓黻, '東北通史' 上, 社會科學戰線雜誌社, 1981.
4) 王俠, 「琿春的渤海遺跡與日本道」, '學習與探索', 1982년 제4기, 124쪽.
5) 李健才, 「琿春渤海古城考」, '學習與探索', 1985년 제6기, 137쪽.
6) 干志耿・孫秀仁, '黑龍江古代民族史綱', 黑龍江人民出版社, 1987, 267쪽.
7) 李健才, 「琿春渤海古城考」, '學習與探索', 1985년 제6기, 138쪽.
8) 王俠, 「毛口崴在唐代渤海與日本友好交往中的地位和作用」, '博物館硏究' 創刊號, 1982, 42쪽.
9) 崔順子, 「唐代渤海時期“日本道”和琿春地區的開發」, '內蒙古文物考古', 1997년 제2기, 100~101쪽.
10) 蔡太炯 著, 文一介 譯, 「關於渤海東京龍原府即琿春八連城說的再探討」, '歷史與考古信息・東北亞', 1991년 제1기, 80~85쪽; 譯自, '력사과학', 1990년 제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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