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91044

왕비를 욕 보이고도...천하통일 하겠다?
[왕관 쟁탈의 역사 ②] 국방·경제보다 중요한 신뢰로 통일 이룬 왕건
12.01.30 17:43 l 최종 업데이트 12.01.30 20:30 l 김종성(qqqkim2000)

▲  KBS 드라마 <왕건>. 가운데는 왕건(최수종 분), 왼쪽은 궁예(김영철 분), 오른쪽은 견훤(서인석 분). ⓒ KBS

신라, 후백제, 고려(후고구려)가 항쟁한 시대. 나라 숫자로만 보면, 이 시대는 삼국시대였다. 하지만 경쟁 구도로 보면, 이 시대는 두 영웅의 시대였다.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이 그 주인공이다. 

두 영웅 간 대결의 관건은 '누가 먼저 신라를 통일하느냐'였다. 당시 후백제와 고려의 군사력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양쪽의 맞대결로는 승부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제3자인 신라를 먼저 통일하는 쪽이 삼국통일을 주도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신라를 통일할 수는 없는 법. 후백제와 고려가 엇비슷했기 때문에, 이런 세력균형 속에서 신라는 나름대로 국권을 유지했다. 그래서 신라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상대방과 신라의 동맹을 돕는 꼴이 될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 신라를 통일하고 삼국통일의 주도권을 확보할 것인가? 이 점에서 견훤과 왕건은 정반대의 통일 노선을 걸었다. 두 사람의 노선 차이는 '경주(서라벌) 방문 방식'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신라인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준 견훤

삼국 간의 세력균형이 일시적으로 무너진 서기 927년 겨울, 견훤은 신라 수도 서라벌을 기습적으로 침공했다. 때마침, 신라 별궁에서는 경애왕의 주재 하에 신라 왕족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물 위에 술잔을 띄어놓을 수 있도록 만든 포석정에서 잔치 분위기에 잔뜩 취해 있었다. 신라 왕족들은 포석정에까지 들이닥친 적군의 모습을 보고 혼비백산해서 사방으로 도주하기에 바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당황한 경애왕은 후궁 몇 명과 함께 후원(後園)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견훤 앞으로 끌려왔다. 이때 견훤이 취한 조치에 주목해보자. 

"(경애)왕을 압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강간했으며, 수하들을 풀어 후궁들을 더럽히도록 했다. 그리고는 (경애)왕의 친척동생을 세워 국정을 대리하도록 하니 이가 곧 경순왕이다."

견훤이 신라왕을 다룬 방식은 한마디로 굴욕과 치욕을 주는 방식이었다. 견훤의 신라 방문은 신라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심을 안겨줬다. 

이 일은 힘을 과시하고 상대를 압박하는 방식으로 통일을 지향하는 견훤의 스타일을 여지없이 드러낸 사건이었다. 후백제가 삼국 중에서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누가 보더라도 이것은 견훤의 실책이었다. 

왕건의 부드러움에 통일의 추가 기울다


▲  포석정 터. 경북 경주시 배동 소재. ⓒ 문화재 공간정보 서비스

견훤의 방식이 오류였다는 것은 금방 드러났다. 견훤은 허수아비 임금인 경순왕을 세우고 신라를 계속 압박했지만, 이것은 역효과만 낳았다. 신라가 고려에 급격히 기우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930년부터 신라와 고려는 급속히 가까워졌고, 급기야 정상회담 논의까지 주고받는 관계가 됐다. 

이렇게 해서, 견훤의 경주 방문 4년 뒤인 931년에 왕건의 경주 방문이 성사됐다. 경순왕의 초청을 왕건이 수락하는 형식으로 정상회담이 이뤄진 것.  

과거 동아시아의 정상회담은, 입장이 불리한 쪽이 유리한 쪽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입장이 불리한 쪽은 제후의 자격으로 입장이 유리한 쪽을 방문했다. 이것을 친조(親朝)라 했다. '직접 알현하다'란 의미다. 

고조선 시대의 중국 역사를 다룬 <서경> '우서'편에서는 "(천자는) 5년에 한 번씩 (제후를) 순방한다"고 기록돼 있지만, 이는 중국 내부에 국한된 일이었다. 국제관계에서는 이런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천자국 즉 황제국 군주가 제후국 군주를 방문하는 것은 동아시아인들의 관념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점령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평화적으로 방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강대국 군주가 약소국 군주를 방문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는데도, 왕건은 직접 경주를 방문했다. 당시는 신라의 권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뒤라 신라왕의 체면을 세워줄 필요가 없었는데도, 왕건은 스스로를 굽히면서 신라와의 정상 외교에 성의를 다했다. 

신라인과 함께 눈물 흘린 왕건

음력으로 신라 경순왕 5년 2월 즉 양력 931년 2월 20일에서 3월 21일 사이에, 50여 명의 호위병을 데리고 경주 외곽에 도착한 고려왕 왕건은 여기서부터 예의를 갖췄다. 견훤 같았으면 그냥 왕궁으로 직행했을 것. 하지만 왕건은 경주 외곽에서 잠시 대기하면서 경순왕에게 '뵙기를 청한다'는 전갈을 보냈다.

이후 왕건의 태도는 계속해서 신라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별궁 내부의 건물인 임해전에서 열린 환영연에서 경순왕이 견훤의 횡포에 분노하며 울음을 터뜨리자, 왕건은 공감을 표시하며 함께 눈물을 흘려줬다.

뿐만 아니라 50여 명의 호위병들은 수십 일 동안 경주에 체류하는 동안 신라 백성들에게 조금도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후백제 병사들이 견훤의 지휘 하에 집단강간을 자행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왕건은 신라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자 호위병들에게 사전에 단단히 주의를 줬던 것이다.

정상회담의 결과로 신라의 입장이 한층 더 불리해졌다는 점은, 왕건이 귀국하던 날의 풍경에서 잘 드러난다. '신라 본기'에 따르면, 왕건이 귀환할 때 함께 길을 떠난 신라인이 있었다고 한다. 경순왕의 사촌아우인 유렴이 인질이 돼 왕건을 따라나섰던 것이다. 이는 왕건이 정상회담을 통해 신라를 자기 밑에 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이렇게 왕건이 경주 방문을 통해 국익을 챙겨 돌아가는데도, 신라 여론은 왕건에 대해 우호적이기만 했다. 경주 사람들은 "지난번에 견씨가 왔을 때는 꼭 승냥이나 여우를 만난 것 같더니만, 이번에 왕공이 올 때는 꼭 아버지나 어머니를 뵙는 것 같다"고들 말했단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예의를 다하는 왕건의 태도가 신라인들에게 신뢰감을 심어줬던 것이다.

총, 칼, 그리고 돈보다 중요한 건 신뢰


▲  임해전 터. 경북 경주시 인왕동 소재. ⓒ 김종성

신라인들이 왕건에게 신뢰감을 가질 만한 이유는 그전부터 많았다. 견훤에 의해 경애왕이 죽은 직후에도 왕건은 조문단을 보내 신라인들을 위로했다. 견훤은 신라왕을 욕보이고, 왕건은 신라왕을 조문하는 광경을 보면서 신라인들이 어떤 마음을 품었을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왕건의 경주 방문을 계기로 신라인들의 마음은 고려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한 번에 30여 개의 군과 현이 고려에 스스로 편입된 일이 있을 정도다. 견훤과는 함께 살 수 없어도 왕건과는 함께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신라인들의 마음에 자리 잡은 결과다. 왕건이 심어준 신뢰가 그런 엄청난 차이를 가져왔던 것이다. 

결국 왕건은 경주를 방문한 지 4년 뒤인 935년에 신라를 통일했다. 경순왕이 스스로 나라를 바치는 형식으로 이 통일은 성사됐다. 신뢰 구축이 통일로 연결된 것이다. 이로써 세력균형을 깨뜨리고 후백제에 대해 우위를 점한 왕건은 이듬해인 936년에 후백제마저 멸망시키고 통일의 대업을 달성했다. 

<논어> '안연'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정치에 관해 질문했다. "정치를 하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하냐"고. 공자는 "국방과 경제와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답했다. 자공이 다시 물었다. "그중에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하느냐"고. 공자는 "국방을 버려야지(去兵)"라고 답했다. 

자공이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경제와 신뢰 중에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하느냐"고. 공자는 "경제를 버려야지(去食)"이라고 답했다. 공자의 말은, '국방과 경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신뢰의 중요성은 유시민이 정리한 노무현 자서전인 <운명이다>에서도 강조됐다. '남북정상회담'편에서 노무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 한나라당의 전신인 정당들이 집권하고 있었던 시절에도 우리 정부가 북한과 많은 합의를 했다. 1988년 7·7 선언과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만 가지고도 마음만 통하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잘 안 됐던 것은 신뢰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입장의 차이가 아니라 신뢰의 결여였다."

'입장의 차이'보다 '신뢰의 결여'가 통일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이다. 남북 간의 협상 테이블에서 자기 입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신뢰감을 주는 편이 더 낫다는 지적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남북정상회담을 직접 경험한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으니, 신뢰 구축이 통일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새삼 절감할 수 있다. 

한민족 역사에서 신뢰를 무기로 통일을 이룩한 모범 사례는 고려 태조 왕건이다. 견훤은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는 방법으로 3개의 왕관을 하나로 통일하려 했지만, 왕건은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는 방법으로 통일을 이뤘다. 그래서 그는 아주 수월하게 2개의 왕관을 거두고 통일 고려왕의 왕관을 쓸 수 있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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