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62037
백범 암살범 '안두희 짝퉁'을 왜 영웅이라 부르나
[게릴라칼럼] '테러범' 안두희와 '대영웅' 이봉창, 그리고 폭발물 투척 사건
14.12.14 21:03 l 최종 업데이트 14.12.14 21:03 l 김종성(qqqkim2000)
신은미씨의 통일 콘서트에 폭발물이 투척된 원인 중 하나는 우리 사회에 그런 테러를 영웅시하는 분위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통일운동을 이른바 '종북'으로 몰고 종북에 대한 마녀 사냥을 영웅시하는 일부의 분위기가 이번 테러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다.
그런 테러를 통해 일시적 주목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행위자의 명성에 과연 장기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그것은 과연 행위자를 영웅으로 만드는 효율적인 방법일까?
▲ 젊은날의 안두희 ⓒ 권중희
백범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1917~1996년)를 생각해보자. 미군 방첩대(CIC) 요원이자 서북청년회 간부이자 테러단체 백의사의 암살 단원이자 육군 소위인 안두희가 서울 경교장(김구 숙소)에서 총탄을 발사한 1949년 당시만 해도, 일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안두희는 영웅이었다.
북한과 손을 잡고 통일을 추진하여 미국과 이승만의 이익을 침해하는 김구는, 그들이 보기에는 '종북'의 대표주자였다. 그런 인물에게 테러를 가했으니, 그들이 볼 때 안두희는 영웅일 수밖에 없었다.
테러 발생 1년 뒤인 1950년 6월 27일 안두희는 감옥에서 석방된 데 이어, 불과 10일 만에 육군 장교로 복귀했다. 또 한국전쟁 중에는 청량리 정보학교라는 군대 첩보기관에서 교감 역할까지 했다. 또 제대한 뒤에는 대한건설협회 부사장도 되고 군납업체 사장도 됐다.
제대 뒤 안두희는 명목상으로는 사업가였지만, 실제로는 정권의 비호 하에 계속해서 테러 활동을 주도했다. 1959년에는 재일동포 북송선 폭파 작전도 주도했다. 물론 이 일은 실패했다. 이것은 김구 암살로부터 10년 뒤에까지 그가 이 분야에서 계속 승승장구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를 비호할 뿐만 아니라 영웅시하는 일부의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두희 자신도 스스로를 영웅으로 자부했다는 점은 39세 때 쓴 회고록의 제목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자신이 김구를 시역 즉 시해한 일이 고뇌에 찬 결단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회고록에 <시역의 고민>이란 제목을 붙였다.
이승만 정권 붕괴와 함께 영웅→테러범으로 급전직
▲ 안두희가 백범 김구를 암살한 현장인 경교장. 서울시 종로구 평동의 강북삼성병원 구내에 있다. ⓒ 김종성
이렇게, 김구의 라이벌인 이승만이 대통령이던 시절만 해도 안두희를 영웅시하는 일부의 분위가 존재했지만, 안두희는 4·19 혁명 및 이승만 정권의 붕괴와 함께 영웅에서 테러범으로 급전직하했다. 김구 암살에 관한 진상규명위원회가 4·19 뒤에 구성되면서부터 그는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안두희 입장에서는 그랬다. 그가 도피 생활을 할 때인 1987년에 개정된 헌법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헌법 전문에 명시적으로 규정되었다. 개정된 헌법의 전문에서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 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선언했다.
임시정부의 역사는 사실상 김구의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3·1운동의 결과로 1919년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처음에는 문지기나 다름없는 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출발한 김구의 끈기와 집념 덕분에 1945년 해방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주변 동지들의 도움이 크기는 했지만, 1930년대 이후로 김구는 사실상 혼자 힘으로 임시정부를 지켜냈고, 해방 뒤에는 임시정부 구성원들을 이끌고 이승만에 맞서 통일운동을 벌였다.
김구의 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임시정부가 헌법 전문에 규정되었으니,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의 처지는 1987년 이후로 한층 더 열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층 더 불리한 도망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김구 암살을 통해 그가 얻은 이익은 그저 '일시적 쾌락'에 불과했다.
시대와 역사는 이승만과 안두희의 편이 아니었다
안두희가 실패한 것은 그의 행위가 시대적 흐름에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지배층과 그들의 조종을 받는 일부 대중이 통일을 지지하든 반대하든 간에, 한반도는 통일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통일이 시대적 소명이라는 점은 현행 헌법의 전문에도 나타난다. 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 국민은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라고 선언했다. 지배층이 통일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통일이 헌법 전문에까지 규정된 것은, 그것이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소명이기 때문이다.
안두희는 '일시적 쾌락'을 위해 반통일적인 이승만의 편에 섰지만, 시대와 역사는 이승만과 안두희의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안두희는 테러범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고, 도피 생활 중에 '정의봉'이라 쓰인 몽둥이에 의해 저세상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안두희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요인은, 그의 행위가 민족 전체의 공감대를 얻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행위는 일부 세력의 공감은 얻을 수 있어도 민족 전체의 공감을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일부 집단에서만 칭찬할 수 있는 '소영웅'의 행위이고, 민족 전체가 칭찬할 만한 '대영웅'의 행위는 아니었던 것이다. 소영웅의 행위였기 때문에 인생이 비참하게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원한 쾌락' 위해 '대영웅'의 길 선택한 이봉창
▲ 이봉창의 형상. 서울시 용산구 용산동의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이처럼 '일시적 쾌락'을 쫓다가 '영원한 파멸'로 떨어진 안두희와 아주 잘 대조되는 인물이 있다. 비록 미수에 그치기는 했지만 1932년에 일본왕(소위 천황)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져 국제적 찬사를 받은 이봉창(1900~1932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김구의 회고록인 <백범일지>에 소개된 것처럼, 이봉창은 서른한 살 때까지 그저 육체적 쾌락만을 쫓은 사람이었다. 누가 봐도 독립운동보다는 '야간 업소'에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복장을 한 이봉창은 김구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 나이가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다시 서른한 살을 더 산다 한들, 과거 반생(半生)의 삶에서 방랑 생활을 맛본 것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육신으로 인생 쾌락을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도모하렵니다. 그래서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하겠다는 목적으로 상해(상하이)에 왔습니다."
술과 이성을 통해 쾌락을 추구했던 이봉창은 그게 인생의 전부가 아니란 걸 깨닫고 '영원한 쾌락'을 추구하는 '대영웅'의 길을 택했다. 이봉창의 길은 안두희가 선택한 소영웅의 길과는 달랐다. 그의 길은 민족 전체의 칭찬을 받을 만한 대영웅의 길이었다.
물론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이봉창을 다른 관점에서 평가하겠지만, 적어도 한민족의 입장에서 그는 영웅이었다. 지금 단계의 인류 사회에서 개인을 보호해줄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은 민족이나 국가뿐이다. 국제연합이 있다지만, 아직은 민족이나 국가만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민족 전체의 칭찬을 받는 길을 선택한 이봉창의 행위는, 적어도 지금 단계의 인류 사회에서는 대영웅의 행위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추구하련다'라며 독립운동에 들어섰지만, 이봉창은 그 후에도 육체적 쾌락의 유혹을 완전히 이기지 못했다. 일본 나막신을 신은 채 술과 안주를 담은 봉지를 들고 임시정부 청사를 출입하면서 "당신들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일본 천황을 왜 못 죽입니까?"라고 호언장담하던 그는, 이따금씩은 다소 절제 없는 육체의 쾌락에 탐닉되곤 했다.
또 이봉창은 김구가 히로히토 응징을 위한 거사자금으로 준 중국 돈 300원을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다 소진하고 말았다. 거사 뒤에 경찰 조사를 받을 때 그는 "여기저기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라고 진술했다.
그래서 이봉창은 일본에 도착한 지 4일 만에 김구에게 추가 송금을 요청했고, 김구가 어렵사리 추가 송금한 일본 돈 100엔마저 비슷한 방식으로 다 써버렸다. 거사 당일 아침까지도 기생집에서 잠을 잤을 정도다. 그런 뒤에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진 것이다.
이처럼 사생활로 봐서는 좀 탕아에 가까운 이봉창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존경을 받는 것은 그의 행동이 민족독립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또 그의 행위가 일부 세력이 아닌 민족 전체의 공감을 얻을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봉창은 사생활 면에서는 좀 흥미로운 인물이지만, 적어도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진정한 대영웅이 될 수 있는지를 잘 알았다. 그래서 안두희 같은 소영웅 지향주의자와는 질적으로 판이한 길을 걸었다. 이 때문에 그는 변함없는 민족적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통일 콘서트를 종북 콘서트로 매도하고 행사장에 폭발물을 던지는 행위는, 해방 직후의 통일 운동을 종북으로 매도하고 테러 활동을 벌인 안두희의 아류들이나 벌일 수 있는 행위다. 이런 행위는 통일이라는 이 시대의 과제에 위반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민족 전체의 공감도 얻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은 지금 당장에는 일부 세력의 칭찬을 받을지 몰라도, 결국에 가서는 안두희의 아류로 평가받고 자기 인생을 망칠 수밖에 없다. 그런 삶은 이봉창 같은 영웅의 삶에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하류 인생'이라는 것을 머지않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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