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몽골리아에서 日열도까지 反唐 공작
<96> 소정방 평양에 고립
2014.02.26 16:34 입력
 
661년 평양성 침공한 당군, 보급 끊기면서 절망적 상황 
 
661년 8월께 고구려 사신이 왜국, 즉 일본의 수도 나라(良) 조정에 도착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구려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했다. 그가 전한 고구려의 급박한 사정을 ‘일본서기’는 이렇게 압축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661년) 7월 그달에 소정방 장군과 돌궐왕자(突闕王子) 계필하력(契苾何力) 등이 수륙의 두 길(水陸二路)로 고구려성(高句麗城) 아래(下)에 이르렀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수군이 대동강 입구에 상륙해 평양성을 이미 포위했고, 계필하력이 이끄는 돌궐의 기병이 몽골리아에서 요하를 넘어 고구려 심장부로 진격해 왔다. 

(옮긴이 주 : 사진이 적당치 않아 다른 사진으로 대체 했습니다. : http://www.mgoguryeo.com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평양성의 옛 모습. 평양성 성벽은 고구려 때 처음 쌓아 조선시대까지 이용했다.

왜 조정의 파병결정 

왜 조정도 위기감에 휩싸였다. 당나라 군대의 작전이 너무나 속전속결로 실행되고 있지 않은가. 백제에 상륙한 당나라군이 단 10일 만에 사비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왕과 그 가족을 사로잡았고, 그로부터 정확히 1년 후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포위한 상태다. 이제 당수군의 작전수행 능력은 백제와 고구려 작전에서 충분히 입증됐다. 바다 건너 왜국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왜왕과 조정의 대신들은 고구려가 멸망하면 다음은 왜국의 차례가 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당의 팽창을 한반도에서 막아야 했다.

661년 8월 왜국 군대의 백제 파병이 결정됐다. 지금까지 왜국이 백제에 군수품 지원을 했지만 병력은 보낸 적은 없었다. ‘일본서기’를 보면 그해 8월 아배비라부(阿倍比邏夫) 등을 보내 백제를 구원하게 했으며, 거듭해 병장(兵杖)과 오곡(五穀)을 백제로 보냈다고 하고 있다. 이어 9월에 백제왕자 풍장(豊璋)은 왜국왕이 붙여준 병력 5000과 함께 백제에 도착했으며, 福信이 그를 맞이했다. 풍장은 백제인의 구심점이 됐다. 

왜국의 지원을 받던 백제인들은 평양으로 갈 신라군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8월부터 문무왕의 장군들은 백제부흥군이 웅거한 옹산성에서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9월 19일, 왕은 모든 병력을 여기에 투입했고, 25일이 돼서야 신라군이 그곳을 포위했다. 27일, 큰 목책을 불사르고 백제부흥군 수천 명을 살상한 후 항복을 받아냈다. 이렇게 해서 9월 그달이 다 지나갔다.

돌궐기병의 압록강 돌파

661년 8월께 당나라 군대가 압록강에 막혀 있었다. 9월 계필하력의 돌궐기병이 압록강에 도착했다. 그들은 고구려 요하 부근의 고구려성들을 모두 무시하고 지나왔다. 이번 작전도 백제 사비성 공략 때처럼 고구려의 심장인 평양을 먼저 함락시키려 했다. 강 건너 의주에는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이 군대 수만을 주둔시키고 돌궐기병단의 도하를 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은 당나라의 편이었다. 그해 겨울은 혹한이 밀려왔다. 늦가을부터 압록강의 가장자리부터 얼기 시작하더니 강 가운데까지 옮겨갔다. 이윽고 얼음은 두꺼워졌고, 기병단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얼음 위로 돌궐기병들이 노도와 같이 밀려왔다. 공격지점을 선택해 병력을 집중할 수 있었던 그들은 강변에 넓게 병력을 분산시켜 방어하던 고구려 군대의 엷은 방어벽을 금세 허물어뜨렸다. 3만 명의 고구려군대가 돌궐기병의 급습을 받고 전사했고, 나머지는 포로가 됐다.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은 단신으로 빠져나왔다. 

계필하력의 유목군대는 압록강에서 대승을 거뒀고 소정방은 평양성을 포위한 상태였다. 고구려의 멸망이 눈앞에 있는 듯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계필하력의 유목기병에게 당나라 황제가 철수명령을 내렸다. 고구려를 궁지에 몰아넣고 마지막 최후의 일격을 앞둔 당고종은 갑자기 돌궐기병을 몽골리아로 돌려보냈다. 그것이 평양부근에 잔류한 당군에게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당 수뇌부는 모르고 있지 않았다. 

초원의 반란과 돌궐기병의 철수

그렇다면 661년 9월에 압록강에서 고구려 정병을 격파한 계필하력은 무엇 때문에 철수를 서둘렀을까. 서북방에서 철륵의 제부족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당조정의 소환을 받은 계필하력은 구성철륵(九姓鐵勒)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중국 서북방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철륵 제부족과의 전쟁에서 당은 패배했다. 장군 양지(楊志)가 사결(思結)과 다람갈(多濫葛)을 뒤쫓다 크게 패했으며, 정인태도 경기 1만4000명을 거느리고 선악하(仙?河)에 이르렀지만 소득 없이 회군하다 큰 눈을 만나 800기만 돌아왔다. 

물론 반란의 주동자인 회흘의 비속독(比粟毒)은 건재했다. 철륵도행군총관 정인태를 탄핵한 사헌대부 양덕예의 지적을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해골이 들을 덮게 만들고 갑옷을 버려서 도적들의 물자가 되게 했다.” 철륵과의 분쟁은 정치·외교적 수단으로 봉합됐다. 662년 3월 철륵도안무대사(鐵勒道安撫使)에 임명된 계필하력이 철륵 제부족과 화친을 맺고, 반란 주동자 엽호(葉護)·설(設)·특권(特勒) 등 200여 명을 처단하는 수준에서 종결됐다.

백제인들의 저항과 철륵 제부족의 반란은 661년 겨울 소정방의 군대를 평양에 완전히 고립시켰다. 압록강 전투에서 크게 패했지만 이제 고구려는 만주 방면의 전력을 평양성 전투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평양성에서 고구려군과 전투 중이던 당군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남쪽 신라로부터 보급품은 오지 않고 만주에서 그들을 죽일 고구려 증원군이 평양으로 대거 몰려오고 있지 않은가. 

‘일본서기’ 제명천황 7년(661) 12월 조를 보면 당시 고구려 사신은 “당나라 병사들이 무릎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唐兵抱膝而哭)”라며 당군의 절망적 모습을 왜국에 전하고 있다. 

고구려 대외공작

661년 고구려에 절대 유리하게 전개된 서북방의 정세 변화는 국제적 상황이 낳은 의도하지 않은 우연의 결과일까. 결정적 증거는 없다. 다만, 그 시기에 거란이 고구려의 사주를 받고 당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단서를 아사나충묘지명(阿史那忠墓誌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사나충은 일찍이 부친을 따라 당태종에게 귀부했던 동돌궐의 왕족이다. “고구려(遼碣) 원정에 군대를 일으키는 데 속하게 돼 (아사나충) 공(公)을 사(使)로 삼고 장잠도(長岑道)행군대총관에 임명했다. 대군이 멀리 나아가서 천자의 위엄을 멀리 떨치자 삼산( 三山)이 그로 인해 요동치고 고구려(九種) 사람들이 그 때문에 놀랐다. 거란이 고구려(白猿)의 동쪽과 황룡(黃龍 조양)에 있어서 가까이 회복(卉服)을 침범하고 밖으로 고구려(鳥夷)와 결탁했다. 공이 군대를 거느리고 주벌하고 시기에 따라 진멸(殄滅)시켰다.” 최근 최진열은 수당(隋唐)묘지명에 보이는 고구려 국명표기 연구에서 요갈·구종·백원·조이 등이 고구려의 이칭이라는 사실을 실증한 바 있다. 

‘아사나충비명(碑銘)’을 보면 그가 고구려 원정군에 편성된 것은 현경 5년, 660년이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자치통감’을 보면 그해 12월에 고구려 정벌의 행군총관 임명이 있었다. ‘책부원구’ 장례부를 보면 661년 1월에 그가 고구려 정벌을 앞두고 장안에서 개최된 연회에 참석했다. 그해 4월에 장잠도행군대총관인 그는 고구려를 향해 출발했던 것 같다. ‘장잠’은 최근 발견된 낙랑목간에도 보이는 황해도 대방현 부근 장잠현의 지명이다. ‘신당서’ 고종본기를 보면 661년 10월에 장잠도행군총관으로서 철륵의 반란 진압을 명받고 있다. 아사나충은 압록강까지 갔다가 9월에 철륵이 반란을 일으키자 계필하력의 돌궐병과 함께 이를 진압하기 위해 외몽골로 향했고, 시라무렌 지역을 지나가다 고구려의 사주를 받은 거란과 전투를 했다. 우리는 여기서 철륵 반란이 거란과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초원의 상황을 정확히 읽고 반란을 사주한 고구려의 ‘해외공작’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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