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1942709
44년 고구려 5대 모본왕은 현재의 북경 근처인 北平 漁陽 上谷 太原 등을 습격하였다.
수도인 국내성에서 무려 3000여리에 해당하는 먼거리이다. 이어 6대인 태조대왕은 기병 1만을 거느리고 한의 현도성을 공격했으며, 요서지방에 10성을 쌓아 지재할수 있었을까? 그런데 초기국가인 고구려는 어떻게 그 먼 거리를 이동해서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을까? 기마군단 때문이다.
기마민의 전술은 비밀스럽게 먼거리를 이동을 해서 갑자기 기습을 하고 타격을 입힌 다음에, 불리하다고 판단하면 재빨리 퇴각하는 작전(HIT AND RUN)이다. 보병은 무장을 가볍게 한 상태에서 하루에 약 20~30km 밖에 행군을 못하지만, 기병은 최소한 80km를 달린다. 때로는 3~ 4마리의 말을 끌고 말 잔등에서 자면서 몇일씩 계속 달리기도 한다.
말은 효율성이 뛰어난 운송 수단이면서, 그 자체가 군사와 함께 움직이는 살아있는 식량이다. 동시에 무엇보다도 기마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파괴력이 강한 무기이다. 말을 활용한 기마군단은 이동하는 속도와 이동과정 및 구사하는 전략전술이 보병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며 전장의 범위도 매우 광대했다.
더구나 재갈과 고삐, 안장과 등자 등의 소도구가 발명되거나 개량되면서 기마전의 양상은 달라졌다. 특히 활과 같은 기마용 무기가 효과적으로 활용되면서 기마전은 가공할 만한 군사력으로 고대전쟁의 화려한 꽃이 되었다.
광활한 초원과 평원에서 북방종족이나 한족들과 대결해서 살아남고 승리하려면 지칠줄 모르고 잘 달리는 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했다. 최초의 민족국가인 고조선은 남만주일대를 핵심영토로 삼았기 때문에 필시 강력한 기마군대가 있었을 것이다. 漢書 조선전에는 기원전 109년에 조선이 한에게 화의하는 대가로 말 5천필과 군량미를 주었다고 기록 되어있다. 그만큼 위만조선에도 많은 기마군대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후의 국가인 부여는 흥안령 이남에서 농사와 목축을 겸했던 사회인지라 명마의 산지로 이름이 나있다. 부여는 왕 아래의 족장세력에게 馬加 牛加 猪加 狗加 등 가축명을 붙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마가이다. 삼국지 부여전에는 ‘그 나라는 소를 잘 사육하고 명마가 나온다’라고 하였다.(--其國善養牲 出名馬云云).
이 부여마를 고구려인들은 神馬라고도 부르며 (大武神王때 잃어버렸던 신마가 부여마 1백필을 몰고 왔다.)구하려고 공격하곤 하였다. 부여의 땅이었던 농안 대안 등에 가면 지금도 말들을 많이 사육하고 있고, 주민들이 아직도 진흙으로 만든 집에서 양과 말을 키우며 살고 있다.
善射者라는 의미의 건국자인 주몽은 마조총에 그려진 벽화처럼 마굿간에서 말을 길렀던 목동이고, 무용총을 비롯한 몇몇 고분벽화에서 보이듯 말을 타고 사냥을 하였던 기마민이었다. 그는 기마병을 데리고 부여를 탈출한 후에 토착세력인 졸본부여를 점령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주몽은 평상시에도 기린굴을 통해서 하늘을 올라다녔고, 죽을 때에는 말채찍만을 남기고 승천했다. 초기부터 위로는 강력한 기마군단을 갖춘 북방유목종족들과 전쟁을 벌이고, 서쪽으로는 조직화된 한족의 대군과 늘 싸움을 계속해야 하므로 기마전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중국인들은 삼국지 등에서 고구려와 濊에는 과하마(果下馬)가 유명했었는데 키가 불과 3척(1m)이 채 안 돼 나무밑을 지나다닐 수 있기에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였다. 중국지역에 파는 무역품이기도 하였다. 이 기록 때문에 마치 고구려의 말은 과하마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물론 과하마는 튼튼하고 산에 잘 오르기 때문에 산골과 좁은 평야가 많은 초기의 고구려가 활동한 지형에는 걸맞고, 특히 산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하지만 평원에서 대규모의 군사가 격돌하는 본격적인 기마전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특히 북방족이나 한족과 전쟁을 할 때는 덩치도 크고 빨리 달리는 말이 필요하다.
그래서 훌륭한 말을 사육하고 보급받는 시스템을 국가적으로 구축해야 했다. 덕흥리 벽화고분의 동벽에는 연못, 마굿간이 그려져 있고, 서벽에는 다락과 창고가, 남벽에 마굿간과 외양간 등이 그려져 있다. 그 외에도 여러고분에 말과 마굿간 그림이 있다.
목축업이 발달했다는 간접적인 증거이다. 또 외부에서 공급받을 목적으로 부여지역을 넘어 흥안령 주변과 동몽골지역의 초원을 공격하였고, 때로는 요동지방에서 생산한 철과 교환하는 마철교역을 하였으며, 일부는 전략물자로서 중국남방으로 중계무역하였다. 235년에는 양자강 유역에 있었던 손권의 오나라에게 말을 수 백필을 주었으나 사신선이 적어 결국 80필만을 싣고 갔다. 광개토태왕은 산동반도의 남연(南燕)에서 물소나 앵무새 등을 수입하기도 하고, 북방의 말이나 모피 또는 화살 등을 수출하였는데,<태평어람> 천리마라고 되어있다.
장수왕 때인 439년에는 무려 800필의 말을 배에 실어 역시 강남지역에 있었던 송나라에게 수출하였다. 이는 경제적인 목적 외에 분단된 중국의 남북조를 이용하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말이 얼마나 풍부했는지를 알려주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권21, 보장왕 4년 5월)를 보면 요동을 지키던 고구려군이 당나라에 항복하였는데 이 때 당군이 말 50.000마리와 함께 소 50.000마리를 얻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무용총과 쌍영총 수렵총 약수리고분 등에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사내들의 모습들이 기운차게 그려져 있다. 3월 3일날에 벌어진 국중대회는 고구려의 젊은이들이 말을 타고 달리며 화살을 날리며 기예를 겨루는 행사이다. 여기 출전한 온달이 탄 말을 골라준 여인이 평강공주이다. 이러한 행사는 무용총 쌍영총 등의 고분벽화에서 현실감나게 잘 표현하였다.
고구려인들은 말을 단순하게 이용하지 않고 매우 효율적인 군사무기로 활용하였다.
요동지방과 압록강하구를 놓고 벌어진 전쟁에서 동천왕은 242년에 선제공격을 하였고, 이어 246년에는 위나라군이 반격을 가하였다. 고구려는 승리를 거듭하다가 나중에는 鐵騎 5천으로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였다. 이 때 철기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광개토태왕은 즉위한 첫해에 요서북쪽초원에 거주하는 유목종족인 거란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우마군양, 즉 소 말 양떼들을 몰고 개선하였다.
그런데 공격지역의 환경을 보거나 적군의 편제를 볼 때 고구려군은 당연히 기마병이어야만 한다. 400년에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남진할 때도 기마병이 이동하기에 불편한 한반도 동남부의 지형을 고려하여 보병을 섞어서 5만을 파견했다. 광개토태왕의 엄청난 정복활동과 영토확장은 강력한 기마군단의 존재를 빼놓고는 상상할수 없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기병 혹은 철기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쌍영총, 삼실총, 개마총, 안악 3호분, 덕흥리고분 벽화 등에는 행렬도 전투도 등이 있다. 이를 보면 병사들은 투구에서부터 목가리개가 있는 철제갑옷을 입고 발끝 신발까지 철제로 무장했다. 타고 있는 말도 전체를 철제 갑옷으로 입혔으며, 말머리를 보호하는 말투구를 씌웠다. 심지어는 꼬리에도 철로 만든 장식품을 붙여서 위엄을 높이는 한편 안정성을 확보하였다.
그만큼 기마전과 말을 중요시 여겼다는 뜻이다. 광개토태왕이 신라 가야 지역으로 남진한 이후에 영향을 받아 제작한 가야고분에서는 갑옷, 철제투구, 말머리에 씌운 투구와 갑옷 조각들이 발견됐다. 부산의 복천동 11호분에서는 철제 목가리개, 말 엉덩이 꼬리 쪽에 달았던 철제 깃발 꽂이까지 출토되었다. 이렇게 일종의 중무장한 기병대, 즉 철기병을 개마무사라고 부른다. 만주 집안시 외곽에 있는 삼실총에는 말위에 올라탄 개마무사들 끼리 긴창을 휘두르며 전투하는 장면이 금방 피가 튈 것처럼 박진감있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말이기에 고구려인들은 말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거기다가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신령스러운 존재이므로 주인이 죽어 영혼이 되면 하늘로 태우고 올라갈 수 있게 도와주는 영물이라고 여겨 말을 순장시켰다. 안악 1호분에는 날개를 단 말이 하늘을 날라가고 있고, 무용총의 천정 북면에도 네다리를 활짝 펼친 천마도가 있다. 아마 기린마로 표현된 것들도 말을 변형시켜 표현한 것이리라.
21세기 지금은 기마문화에 대한 경험과 기억을 다 상실해서 낯설게 느껴지지만 적어도 발해가 만주대륙을 차지하고 있을때 까지만 해도 아주 친숙했을 뿐 만 아니라 절실했었다. 농경문화적인 기준으로 유목문화를, 정주적(stability)인 성격의 문화로 이동성(mobility)문화를 이해하려 하면 진실을 알 수 없게 된다.
유목민족들은 영토도 농경민족들과 달리 적의 군사력을 무력화 시킨 다음에는 토착세력인 족장들을 회유한 다음에 이용해서 간접지배를 하였다. 고구려 또한 마찬가지로 이러한 시스템을 활용해서 장춘 이북의 부여 옛 지방과 이북은 간접지배하는 방식을 취했으며, 외곽지역은 영향권으로 흡수한 것 같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영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넓어진다.
먼 옛날 드넓은 만주벌판을 철갑 옷을 입은 무사가 큰 칼을 찬 채 말타고 달린다. 그의 모습에서 건강함, 민첩함, 활달함과 고귀함이 흘러나온다. 언젠가 다시 그날이 다가온다면---
/ 윤명철(동국대 교수)
고구려 발전의 힘 '기마군단'
기사입력 2008-02-25 10:35 | 최종수정 2008-02-26 10:5
44년 고구려 5대 모본왕은 현재의 북경 근처인 北平 漁陽 上谷 太原 등을 습격하였다.
수도인 국내성에서 무려 3000여리에 해당하는 먼거리이다. 이어 6대인 태조대왕은 기병 1만을 거느리고 한의 현도성을 공격했으며, 요서지방에 10성을 쌓아 지재할수 있었을까? 그런데 초기국가인 고구려는 어떻게 그 먼 거리를 이동해서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을까? 기마군단 때문이다.
기마민의 전술은 비밀스럽게 먼거리를 이동을 해서 갑자기 기습을 하고 타격을 입힌 다음에, 불리하다고 판단하면 재빨리 퇴각하는 작전(HIT AND RUN)이다. 보병은 무장을 가볍게 한 상태에서 하루에 약 20~30km 밖에 행군을 못하지만, 기병은 최소한 80km를 달린다. 때로는 3~ 4마리의 말을 끌고 말 잔등에서 자면서 몇일씩 계속 달리기도 한다.
말은 효율성이 뛰어난 운송 수단이면서, 그 자체가 군사와 함께 움직이는 살아있는 식량이다. 동시에 무엇보다도 기마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파괴력이 강한 무기이다. 말을 활용한 기마군단은 이동하는 속도와 이동과정 및 구사하는 전략전술이 보병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며 전장의 범위도 매우 광대했다.
더구나 재갈과 고삐, 안장과 등자 등의 소도구가 발명되거나 개량되면서 기마전의 양상은 달라졌다. 특히 활과 같은 기마용 무기가 효과적으로 활용되면서 기마전은 가공할 만한 군사력으로 고대전쟁의 화려한 꽃이 되었다.
광활한 초원과 평원에서 북방종족이나 한족들과 대결해서 살아남고 승리하려면 지칠줄 모르고 잘 달리는 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했다. 최초의 민족국가인 고조선은 남만주일대를 핵심영토로 삼았기 때문에 필시 강력한 기마군대가 있었을 것이다. 漢書 조선전에는 기원전 109년에 조선이 한에게 화의하는 대가로 말 5천필과 군량미를 주었다고 기록 되어있다. 그만큼 위만조선에도 많은 기마군대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후의 국가인 부여는 흥안령 이남에서 농사와 목축을 겸했던 사회인지라 명마의 산지로 이름이 나있다. 부여는 왕 아래의 족장세력에게 馬加 牛加 猪加 狗加 등 가축명을 붙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마가이다. 삼국지 부여전에는 ‘그 나라는 소를 잘 사육하고 명마가 나온다’라고 하였다.(--其國善養牲 出名馬云云).
이 부여마를 고구려인들은 神馬라고도 부르며 (大武神王때 잃어버렸던 신마가 부여마 1백필을 몰고 왔다.)구하려고 공격하곤 하였다. 부여의 땅이었던 농안 대안 등에 가면 지금도 말들을 많이 사육하고 있고, 주민들이 아직도 진흙으로 만든 집에서 양과 말을 키우며 살고 있다.
善射者라는 의미의 건국자인 주몽은 마조총에 그려진 벽화처럼 마굿간에서 말을 길렀던 목동이고, 무용총을 비롯한 몇몇 고분벽화에서 보이듯 말을 타고 사냥을 하였던 기마민이었다. 그는 기마병을 데리고 부여를 탈출한 후에 토착세력인 졸본부여를 점령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주몽은 평상시에도 기린굴을 통해서 하늘을 올라다녔고, 죽을 때에는 말채찍만을 남기고 승천했다. 초기부터 위로는 강력한 기마군단을 갖춘 북방유목종족들과 전쟁을 벌이고, 서쪽으로는 조직화된 한족의 대군과 늘 싸움을 계속해야 하므로 기마전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중국인들은 삼국지 등에서 고구려와 濊에는 과하마(果下馬)가 유명했었는데 키가 불과 3척(1m)이 채 안 돼 나무밑을 지나다닐 수 있기에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였다. 중국지역에 파는 무역품이기도 하였다. 이 기록 때문에 마치 고구려의 말은 과하마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물론 과하마는 튼튼하고 산에 잘 오르기 때문에 산골과 좁은 평야가 많은 초기의 고구려가 활동한 지형에는 걸맞고, 특히 산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하지만 평원에서 대규모의 군사가 격돌하는 본격적인 기마전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특히 북방족이나 한족과 전쟁을 할 때는 덩치도 크고 빨리 달리는 말이 필요하다.
그래서 훌륭한 말을 사육하고 보급받는 시스템을 국가적으로 구축해야 했다. 덕흥리 벽화고분의 동벽에는 연못, 마굿간이 그려져 있고, 서벽에는 다락과 창고가, 남벽에 마굿간과 외양간 등이 그려져 있다. 그 외에도 여러고분에 말과 마굿간 그림이 있다.
목축업이 발달했다는 간접적인 증거이다. 또 외부에서 공급받을 목적으로 부여지역을 넘어 흥안령 주변과 동몽골지역의 초원을 공격하였고, 때로는 요동지방에서 생산한 철과 교환하는 마철교역을 하였으며, 일부는 전략물자로서 중국남방으로 중계무역하였다. 235년에는 양자강 유역에 있었던 손권의 오나라에게 말을 수 백필을 주었으나 사신선이 적어 결국 80필만을 싣고 갔다. 광개토태왕은 산동반도의 남연(南燕)에서 물소나 앵무새 등을 수입하기도 하고, 북방의 말이나 모피 또는 화살 등을 수출하였는데,<태평어람> 천리마라고 되어있다.
장수왕 때인 439년에는 무려 800필의 말을 배에 실어 역시 강남지역에 있었던 송나라에게 수출하였다. 이는 경제적인 목적 외에 분단된 중국의 남북조를 이용하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말이 얼마나 풍부했는지를 알려주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권21, 보장왕 4년 5월)를 보면 요동을 지키던 고구려군이 당나라에 항복하였는데 이 때 당군이 말 50.000마리와 함께 소 50.000마리를 얻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무용총과 쌍영총 수렵총 약수리고분 등에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사내들의 모습들이 기운차게 그려져 있다. 3월 3일날에 벌어진 국중대회는 고구려의 젊은이들이 말을 타고 달리며 화살을 날리며 기예를 겨루는 행사이다. 여기 출전한 온달이 탄 말을 골라준 여인이 평강공주이다. 이러한 행사는 무용총 쌍영총 등의 고분벽화에서 현실감나게 잘 표현하였다.
고구려인들은 말을 단순하게 이용하지 않고 매우 효율적인 군사무기로 활용하였다.
요동지방과 압록강하구를 놓고 벌어진 전쟁에서 동천왕은 242년에 선제공격을 하였고, 이어 246년에는 위나라군이 반격을 가하였다. 고구려는 승리를 거듭하다가 나중에는 鐵騎 5천으로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였다. 이 때 철기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 광개토태왕은 즉위한 첫해에 요서북쪽초원에 거주하는 유목종족인 거란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우마군양, 즉 소 말 양떼들을 몰고 개선하였다.
그런데 공격지역의 환경을 보거나 적군의 편제를 볼 때 고구려군은 당연히 기마병이어야만 한다. 400년에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남진할 때도 기마병이 이동하기에 불편한 한반도 동남부의 지형을 고려하여 보병을 섞어서 5만을 파견했다. 광개토태왕의 엄청난 정복활동과 영토확장은 강력한 기마군단의 존재를 빼놓고는 상상할수 없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기병 혹은 철기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쌍영총, 삼실총, 개마총, 안악 3호분, 덕흥리고분 벽화 등에는 행렬도 전투도 등이 있다. 이를 보면 병사들은 투구에서부터 목가리개가 있는 철제갑옷을 입고 발끝 신발까지 철제로 무장했다. 타고 있는 말도 전체를 철제 갑옷으로 입혔으며, 말머리를 보호하는 말투구를 씌웠다. 심지어는 꼬리에도 철로 만든 장식품을 붙여서 위엄을 높이는 한편 안정성을 확보하였다.
그만큼 기마전과 말을 중요시 여겼다는 뜻이다. 광개토태왕이 신라 가야 지역으로 남진한 이후에 영향을 받아 제작한 가야고분에서는 갑옷, 철제투구, 말머리에 씌운 투구와 갑옷 조각들이 발견됐다. 부산의 복천동 11호분에서는 철제 목가리개, 말 엉덩이 꼬리 쪽에 달았던 철제 깃발 꽂이까지 출토되었다. 이렇게 일종의 중무장한 기병대, 즉 철기병을 개마무사라고 부른다. 만주 집안시 외곽에 있는 삼실총에는 말위에 올라탄 개마무사들 끼리 긴창을 휘두르며 전투하는 장면이 금방 피가 튈 것처럼 박진감있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말이기에 고구려인들은 말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거기다가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신령스러운 존재이므로 주인이 죽어 영혼이 되면 하늘로 태우고 올라갈 수 있게 도와주는 영물이라고 여겨 말을 순장시켰다. 안악 1호분에는 날개를 단 말이 하늘을 날라가고 있고, 무용총의 천정 북면에도 네다리를 활짝 펼친 천마도가 있다. 아마 기린마로 표현된 것들도 말을 변형시켜 표현한 것이리라.
21세기 지금은 기마문화에 대한 경험과 기억을 다 상실해서 낯설게 느껴지지만 적어도 발해가 만주대륙을 차지하고 있을때 까지만 해도 아주 친숙했을 뿐 만 아니라 절실했었다. 농경문화적인 기준으로 유목문화를, 정주적(stability)인 성격의 문화로 이동성(mobility)문화를 이해하려 하면 진실을 알 수 없게 된다.
유목민족들은 영토도 농경민족들과 달리 적의 군사력을 무력화 시킨 다음에는 토착세력인 족장들을 회유한 다음에 이용해서 간접지배를 하였다. 고구려 또한 마찬가지로 이러한 시스템을 활용해서 장춘 이북의 부여 옛 지방과 이북은 간접지배하는 방식을 취했으며, 외곽지역은 영향권으로 흡수한 것 같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영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넓어진다.
먼 옛날 드넓은 만주벌판을 철갑 옷을 입은 무사가 큰 칼을 찬 채 말타고 달린다. 그의 모습에서 건강함, 민첩함, 활달함과 고귀함이 흘러나온다. 언젠가 다시 그날이 다가온다면---
/ 윤명철(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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