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1611051348001&code=920100
“박근혜 하야” 민심 키운 숨은 이유는 ‘경제난’
전병역 기자 junby@kyunghyang.com 입력 : 2016.11.05 13:48:00
서민경제가 무너지면서 서울 남대문시장 골목길이 손님들은 뜸한 채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박민규 기자
재벌 위주 정책으로 서민 지갑은 얇아지고 1300조원 가계부채 위험 커져
# “순전히 최순실 때문에 민심이 이 정도로 폭발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말로는 민생을 챙긴다고 해놓고 오히려 서민경제는 더 나빠졌어요. 이렇게 누적돼온 불만들이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터져나온 겁니다.”(최창우 전국세입자협회 대표)
# “경제도 사실상 공황상태에 이르렀다. 가계부채가 1300조원에 육박하고, 중소기업에 이어서 대기업이 부도가 나고, 매년 80만명의 자영업자가 폐업하고, 청년이 일자리 없이 거리를 떠도는데도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정책만 고수하고 있다.”(한양대 교수들이 10월 31일 ‘박 대통령 퇴진’을 촉구한 시국선언문 중)
박근혜 정부는 일순간에 민주공화정인 대한민국 체제를 ‘유사 신정국가’로 바꿔놓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박 대통령은 4일 대국민 담화에서 “제가 사이비종교에 빠졌다거나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말까지 나오는데, 결코 사실이 아니다”라고 적극 부인했다. 하지만 51.6%의 득표율로 선거에 따라 당선시켜준 대통령이라는 자리 위에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춰” 생긴 틈 사이로 정신적으로 영향력을 미쳐온 실체에 대해서는 부인하기 어렵게 됐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가볍게 오염시켰다.
‘경제난’은 민란의 주요 원동력이었다
최씨 일족의 행태에 비춰 비근한 예로 제정러시아 때를 거론하는 이들이 요즘 많다. 최태민이나 최순실을 당시 괴짜 승려로 불린 라스푸틴에 빗대기도 한다. 러시아가 결국 1917년 혁명으로 왕정을 끝낸 배경에는 라스푸틴에 농락당한 로마노프 왕가의 무책임함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에 못잖게 혁명이 가능했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다. 바로 경제난이다. 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불만이 고조된 데다 아이들 우유와 빵조차 부족할 만큼 심각한 경제난에 빠져 있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거꾸로 전쟁의 상흔이 없고 시민들이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라스푸틴이 무슨 짓을 했든 제정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에 휩싸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경제난은 혁명의 충분조건은 아니더라도, 중대한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은 여러 역사에서 되풀이돼 왔다. 진짜 문제는 단지 비선실세에 의한 국정농단 자체가 아니라, 바로 ‘밥’이다. 정권 붕괴는 그저 오는 법이 없다. 필히 경제난에서 추동되게 돼 있다. 프랑스혁명의 근원에도 역시 궁핍한 시민의 삶이 있었다. 거듭된 전쟁에 따른 재정난에 대기근까지 겹쳤기 때문이었다.
37년 전 10월 26일 즈음도 경제가 곤두박질치던 중이었다. 2차 오일쇼크(1978~79년) 아래 시민들의 삶은 찌들어갔다. 1978년 10.8%이던 경제성장률이 1979년 8.6%에 이어 1980년 -1.7%까지 추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눈치 없는 권력자들은 배고픈 이들을 수탈까지 하는 경향이 있다. 기업들이 미르재단이나 K스포츠재단에 약 800억원이나 낸 ‘헌금’은 어디서 나왔을까. 삼성 이재용 부회장 등의 개인 주머니가 아니다. 엄연히 기업의 공금이다. 그 과정에 몇몇 기업들은 이사회 의결마저 거치지도 않았다. 이 비자금 내지 여윳돈은 원래 누구 것일까. 최소한 주주의 몫이거나 야근·주말특근까지 소화해낸 직원들에게 돌려줘야 할 열매일 것이다. 또 상당 부분은 하청 협력사 직원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몫도 있다. 이런 피 같은 돈을 털어서 두 재단에 건넸다.
2일 서울 남대문시장. 20년 넘게 이곳에서 의류 소매업을 해오던 이주형씨는 올해 봄 가게를 정리했다. 지금 남대문시장상인회 상무라는 직함으로 일을 돕고 있는데, 사무실에 붙은 상가 현황판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액세서리 업종만 보더라도 200여 점포 가운데 23개에 주황색 형광펜이 칠해져 있다. 약 20%나 문을 닫거나 빈 상황임을 가리킨다. 12개는 보라색이 둘러져 있다. 점포를 내놓으려는 곳이다. 이 상무는 “10여년 전 5000만~7000만원 정도 하던 권리금도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대체로 7~8년 전부터 경기가 급격히 나빠졌다”고 밝혔다. 그는 “예전에 장사를 오래한 1세대는 열심히 한 만큼 보상도 받고 자수성가가 가능했지만, 소자본으로 들어온 40~50대 2세대 창업자들이 어려움이 많다”고 밝혔다.
재벌 대기업 위주 ‘낙수효과’는 거짓말
경기 급감을 체험한 시기는 대체로 이명박 정부 초기인 2008년 금융위기 이후로 보인다. 세계 경기가 나쁘니 시장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할 이도 있다. 그러나 내막은 꼭 그렇지 않다. 강만수 경제부총리가 앞장서 인위적 고환율 정책을 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수출대기업은 호황을 누렸다. 원화가치가 떨어지니 당연히 원유 같은 수입물가는 올라 서민 부담은 더 커졌다. 정부의 논리는 간단하다. ‘트리클다운 효과(낙수효과)’다. 윗물(대기업)이 풍요로 흘러넘치면 아래(중소기업, 서민)로 전해진다는 주장이다. 허나 이는 새빨간 거짓말로 드러났다.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한국자본주의2: 왜 분노해야 하는가>란 책에서 “한국 경제가 2008~2014년 사이 21.1% 성장하고 삼성전자 직원 실질임금은 경제성장률의 2배(41.5%) 증가했으나, 중소기업 노동자 임금 상승은 4.6%로 경제성장률의 4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비정규직 노동자는 명목임금이 12.4% 늘었으나 소비자 물가상승률(15.1%)을 감안하면 실질임금은 오히려 3% 감소했다”고 밝혔다. 경제성장의 열매를 주로 재벌 대기업이 차지한 셈이다.
상용근로자 임금 기준으로 최하위 10% 대비 최상위 10%의 임금 비율(배수)을 보면, 2013년의 경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3개 회원국 중 한국은 4.7배로 미국, 이스라엘, 터키에 이어 네 번째로 불평등이 심했다. 더구나 노동연구원이 임시직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를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불평등 배수가 5.9로 최고 수준이었다. 한국과 미국의 최상위 10% 소득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비교해봐도 그렇다. 장 교수는 저서에서 “특히 한국은 1995년 이후 불평등이 계속 악화됐고 미국과의 격차가 줄어든다”고 밝혔다. 2013년 미국은 최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7.8%를 차지했고, 한국은 44.9%로 닮아갔다. 1995년의 경우 이 수치가 한국은 29.2%(미국 40.5%)에 불과했다가 급등했다.
서민들은 시장에서 지갑을 열 여력조차 없는 실정이다. 경제성장의 결과 특히 기업소득은 크게 늘어난 반면, 노동소득(임금)은 작게 늘었다. 이는 국민소득 중에서 가계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줄어든 주요인이다. 가계소득은 주로 노동소득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1990~2014년 국민총소득(GNI)의 분배 비중을 보면, 가계소득은 70.1%에서 61.9%로 약 8%포인트 줄었다. 반면 기업소득은 17%에서 25.1%로 약 8%포인트 늘었다. 정부 몫은 13%로 거의 변화가 없다. 가계에서 줄어든 몫만큼 기업에 넘겨진 셈이다. 기업들은 조 단위의 사내유보금을 쌓아놓기만 하니 돈이 시장 바닥까지 돌아올 리 만무하다.
경제 거의 전 부분이 추락하는 가운데 부동산 같은 곳만 빛을 봤다. 월급쟁이들이 집을 수채씩 보유해서 월세 임대수익 받는 게 꿈인 세상이 됐다. 치킨집으로 대표되는 자영업은 언제 망할지 불안부터 앞선다. 이를 부추긴 대표적인 수단이 분양권 전매 완화였다. 분양만 받으면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1억원 넘게 프리미엄(일명 ‘P’)이란 명목으로 얹어서 되팔 수 있게 했다. 운 좋으면 미분양 아파트를 골라잡았다가 양도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는 ‘특혜’를 챙긴다. 너도나도 조금만 여유 있으면 집을 몇 채 더 사려고 달려든다. 전세금을 끼고도 여유자금이 부족하면 대출을 수천만원 받으면 된다. 열심히 저축하며 살아온 사람만 ‘시대에 뒤떨어진 바보’로 만든 게 정부다.
한술 더 떠 ‘아파트 10채 갖기 운동’ 같은 투기까지 번지고 있다. 다주택 보유자에게 세금을 중과하지 않고, 분양권 전매제한 완화, 청약 1순위 자격 완화, 미분양 지역 양도세 폐지 같은 부동산 부양책과 맞물려 ‘부동산 쇼핑 괴물’을 낳은 것이다. 가계부채는 올 6월 1257조원이고, 연말 1330조원을 넘어 내년 말 약 1460조원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폭탄이 터지면 충격은 대출자는 물론 애꿎은 서민들이 입게 돼 있다. 주택보급률이 2014년 103.5%까지 올랐지만, 자가점유율은 53.6%뿐이라는 사실을 박 대통령은 알고나 있을까.
최창우 전국세입자협회 대표는 “11월 3일 부동산 안정화 대책에 세입자 관련 대책은 없었다. 그동안 세입자는 투명인간이자 투기를 위한 불쏘시개였다”며 “불안한 서민들이 마을 졸이다가 빚내서 집을 사도록 해 건설경기를 띄웠다”고 비판했다. 최 대표는 “노동해서 살 생각보다 메뚜기떼처럼 휩쓸고 다니며 집을 쓸어모으고 가격거품만 올려놓고 빠지는 일이 벌어진다. 이게 나라냐”고 말했다. 이렇게 정부·여당은 서민들을 집값만 오르길 바라는 지지자로 만들어 한 배에 태웠다. 일단 운명공동체가 되면 표를 얻고, 양도소득세를 챙겨 세수 확보에도 도움이 된다. 최승섭 경실련 부동산·국책사업감시팀 부장은 “젊은층의 노동의욕마저 꺾는 부동산투기 수단부터 막아야 한다”며 “분양권 전매를 막고 공공주택은 무조건 완공 후 2~3년은 의무거주 기간을 둬야 한다. 후분양제까지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짜 서민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서울 성동구 응봉산 자락 비탈에는 지금도 유심히 보면 계단식 집터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빈민들이 겹겹이 살던 판자촌이 있던 자리다. 1960~70년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시기 서울로 상경했던 이들은 남산, 청계천 일대 빈민촌 재개발로 밖으로 밀려났다. 1차 저지선인 한강 앞에서 산비탈에 눌러앉은 곳이다. 이어 사당 일대로 갔다가 다시 밀려 경기도 광주(현 성남)까지 쫓겨났다. 거기서 터진 것이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이다. 상·하수도 시설조차 없는 곳에 15만명 이상 몰아넣자 벌어진 사달이다.
투기 열풍 불러온 부동산시장 부양책
당시보다는 번듯한 주택과 직업이긴 하지만 서울 외곽으로, 위성도시로 밀려나는 양태는 예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빈민들이 연탄을 짊어나르던 지게가 비정규직의 컴퓨터 자판으로 대체됐을 뿐이다. 서울 인구 1000만명 선이 올해 4월 무너졌다. 전·월세가격 등 집값을 비롯한 높은 생활물가에 버티지 못한 이들이 서울에 인접한 도시로 밀려나고, 다시 수도권에서도 더 먼 곳으로 쫓겨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파가 주류로서 집권해온 비결은 적당한 ‘매카시즘’을 이용한 공포 자극과 함께 “이밥에 고깃국은 먹게 해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사회·문화·환경적으로 물의는 빚더라도 ‘잘살게 해주면 되지 않느냐’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구조가 와해되고 있다. 적어도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보여준 행보는 그렇다. 한국 사회 불평등 구조 악화는 1997년 말 외환위기에서 심화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비정규직 일자리 양산에 책임이 크다. 과격한 위기수습에 급급했고, 대안모델도 제시하지 못했다. 이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단죄만이 능사가 아니라 더 멀리 내다봐야 할 이유다. 진짜 분노해야 할 지점은 ‘최순실의 프라다 신발’이 아니라 ‘서민들의 갈라터진 맨발’이다. 박근혜·최순실 때리기에 신난 야권이 정신차려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현 정부 누적적자 153조원, 국가채무 240조원 증가
그동안 잘나가던 주요 대기업마저 휘청대고 있다. 올해 3분기 실적에서 시가총액 1~3위인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는 매출·영업이익·당기순이익이 모두 전년 대비 감소했다. 산업생산은 5개월 만에 다시 감소세로 돌아섰다. 기업들의 경기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제조업의 11월 업황전망 BSI는 72로 집계됐다. 이는 9월에 조사한 10월 전망치(75)보다 3포인트 낮은 수치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토록 경제 돌파구라며 강조해온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북한 붕괴론에 기댄 남북관계 단절로 녹슬었다. 오히려 남한과 러시아를 잇는 허리띠를 끊어놓았다. ‘대북 퍼주기’ 운운하며 올 2월 개성공단마저 닫아버렸다. 개성공단기업 비상대책위원회 김서진 사무국장은 “개성공단 중단 조치에 비선개입 의혹까지 제기됐다. 개성공단을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 알기나 하느냐”고 지적했다.
내년 7월부터는 대기업집단(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지정 기준이 자산 5조원에서 10조원으로 대폭 상향되도록 박근혜 정부가 바꿨다. 기존 중소기업들은 사실상 대기업들이 중견기업 행세를 하는 데 불만이 적잖다. 이원섭 중소기업중앙회 정책총괄실장은 “규제완화라며 사실상 대기업이 중소기업으로서 혜택은 누리면서 사업영역을 침범하게 됐다”며 “필요한 규제도 있다는 건의문을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내년까지 박근혜 정부의 5년간 누적 재정적자가 152조8000억원으로 예상된다. 이명박 정부 때 98조9000원보다 54.5%나 늘어났다. 국가채무 증가액도 이명박 정부 143조9000억원보다 66.5% 많은 239조6000억원이나 된다.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참여정부 초대 청와대 정책실장)는 “두 정권에서 부자감세와 규제완화 정책으로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됐다. 서민과 중소기업이 너무 어려워졌다”며 “이명박 정부 때는 4대강 사업으로 재정을 악화시켰다면 박근혜 정부는 아무 한 일도 없이 왜 살림을 망쳤는지 이해조차 안 된다”고 말했다.
“박근혜 하야” 민심 키운 숨은 이유는 ‘경제난’
전병역 기자 junby@kyunghyang.com 입력 : 2016.11.05 13:48:00
서민경제가 무너지면서 서울 남대문시장 골목길이 손님들은 뜸한 채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박민규 기자
재벌 위주 정책으로 서민 지갑은 얇아지고 1300조원 가계부채 위험 커져
# “순전히 최순실 때문에 민심이 이 정도로 폭발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말로는 민생을 챙긴다고 해놓고 오히려 서민경제는 더 나빠졌어요. 이렇게 누적돼온 불만들이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터져나온 겁니다.”(최창우 전국세입자협회 대표)
# “경제도 사실상 공황상태에 이르렀다. 가계부채가 1300조원에 육박하고, 중소기업에 이어서 대기업이 부도가 나고, 매년 80만명의 자영업자가 폐업하고, 청년이 일자리 없이 거리를 떠도는데도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정책만 고수하고 있다.”(한양대 교수들이 10월 31일 ‘박 대통령 퇴진’을 촉구한 시국선언문 중)
박근혜 정부는 일순간에 민주공화정인 대한민국 체제를 ‘유사 신정국가’로 바꿔놓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박 대통령은 4일 대국민 담화에서 “제가 사이비종교에 빠졌다거나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말까지 나오는데, 결코 사실이 아니다”라고 적극 부인했다. 하지만 51.6%의 득표율로 선거에 따라 당선시켜준 대통령이라는 자리 위에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춰” 생긴 틈 사이로 정신적으로 영향력을 미쳐온 실체에 대해서는 부인하기 어렵게 됐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가볍게 오염시켰다.
‘경제난’은 민란의 주요 원동력이었다
최씨 일족의 행태에 비춰 비근한 예로 제정러시아 때를 거론하는 이들이 요즘 많다. 최태민이나 최순실을 당시 괴짜 승려로 불린 라스푸틴에 빗대기도 한다. 러시아가 결국 1917년 혁명으로 왕정을 끝낸 배경에는 라스푸틴에 농락당한 로마노프 왕가의 무책임함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에 못잖게 혁명이 가능했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다. 바로 경제난이다. 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불만이 고조된 데다 아이들 우유와 빵조차 부족할 만큼 심각한 경제난에 빠져 있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거꾸로 전쟁의 상흔이 없고 시민들이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라스푸틴이 무슨 짓을 했든 제정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에 휩싸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경제난은 혁명의 충분조건은 아니더라도, 중대한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은 여러 역사에서 되풀이돼 왔다. 진짜 문제는 단지 비선실세에 의한 국정농단 자체가 아니라, 바로 ‘밥’이다. 정권 붕괴는 그저 오는 법이 없다. 필히 경제난에서 추동되게 돼 있다. 프랑스혁명의 근원에도 역시 궁핍한 시민의 삶이 있었다. 거듭된 전쟁에 따른 재정난에 대기근까지 겹쳤기 때문이었다.
37년 전 10월 26일 즈음도 경제가 곤두박질치던 중이었다. 2차 오일쇼크(1978~79년) 아래 시민들의 삶은 찌들어갔다. 1978년 10.8%이던 경제성장률이 1979년 8.6%에 이어 1980년 -1.7%까지 추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눈치 없는 권력자들은 배고픈 이들을 수탈까지 하는 경향이 있다. 기업들이 미르재단이나 K스포츠재단에 약 800억원이나 낸 ‘헌금’은 어디서 나왔을까. 삼성 이재용 부회장 등의 개인 주머니가 아니다. 엄연히 기업의 공금이다. 그 과정에 몇몇 기업들은 이사회 의결마저 거치지도 않았다. 이 비자금 내지 여윳돈은 원래 누구 것일까. 최소한 주주의 몫이거나 야근·주말특근까지 소화해낸 직원들에게 돌려줘야 할 열매일 것이다. 또 상당 부분은 하청 협력사 직원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몫도 있다. 이런 피 같은 돈을 털어서 두 재단에 건넸다.
2일 서울 남대문시장. 20년 넘게 이곳에서 의류 소매업을 해오던 이주형씨는 올해 봄 가게를 정리했다. 지금 남대문시장상인회 상무라는 직함으로 일을 돕고 있는데, 사무실에 붙은 상가 현황판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액세서리 업종만 보더라도 200여 점포 가운데 23개에 주황색 형광펜이 칠해져 있다. 약 20%나 문을 닫거나 빈 상황임을 가리킨다. 12개는 보라색이 둘러져 있다. 점포를 내놓으려는 곳이다. 이 상무는 “10여년 전 5000만~7000만원 정도 하던 권리금도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대체로 7~8년 전부터 경기가 급격히 나빠졌다”고 밝혔다. 그는 “예전에 장사를 오래한 1세대는 열심히 한 만큼 보상도 받고 자수성가가 가능했지만, 소자본으로 들어온 40~50대 2세대 창업자들이 어려움이 많다”고 밝혔다.
재벌 대기업 위주 ‘낙수효과’는 거짓말
경기 급감을 체험한 시기는 대체로 이명박 정부 초기인 2008년 금융위기 이후로 보인다. 세계 경기가 나쁘니 시장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할 이도 있다. 그러나 내막은 꼭 그렇지 않다. 강만수 경제부총리가 앞장서 인위적 고환율 정책을 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수출대기업은 호황을 누렸다. 원화가치가 떨어지니 당연히 원유 같은 수입물가는 올라 서민 부담은 더 커졌다. 정부의 논리는 간단하다. ‘트리클다운 효과(낙수효과)’다. 윗물(대기업)이 풍요로 흘러넘치면 아래(중소기업, 서민)로 전해진다는 주장이다. 허나 이는 새빨간 거짓말로 드러났다.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한국자본주의2: 왜 분노해야 하는가>란 책에서 “한국 경제가 2008~2014년 사이 21.1% 성장하고 삼성전자 직원 실질임금은 경제성장률의 2배(41.5%) 증가했으나, 중소기업 노동자 임금 상승은 4.6%로 경제성장률의 4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비정규직 노동자는 명목임금이 12.4% 늘었으나 소비자 물가상승률(15.1%)을 감안하면 실질임금은 오히려 3% 감소했다”고 밝혔다. 경제성장의 열매를 주로 재벌 대기업이 차지한 셈이다.
상용근로자 임금 기준으로 최하위 10% 대비 최상위 10%의 임금 비율(배수)을 보면, 2013년의 경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3개 회원국 중 한국은 4.7배로 미국, 이스라엘, 터키에 이어 네 번째로 불평등이 심했다. 더구나 노동연구원이 임시직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를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불평등 배수가 5.9로 최고 수준이었다. 한국과 미국의 최상위 10% 소득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비교해봐도 그렇다. 장 교수는 저서에서 “특히 한국은 1995년 이후 불평등이 계속 악화됐고 미국과의 격차가 줄어든다”고 밝혔다. 2013년 미국은 최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7.8%를 차지했고, 한국은 44.9%로 닮아갔다. 1995년의 경우 이 수치가 한국은 29.2%(미국 40.5%)에 불과했다가 급등했다.
서민들은 시장에서 지갑을 열 여력조차 없는 실정이다. 경제성장의 결과 특히 기업소득은 크게 늘어난 반면, 노동소득(임금)은 작게 늘었다. 이는 국민소득 중에서 가계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줄어든 주요인이다. 가계소득은 주로 노동소득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1990~2014년 국민총소득(GNI)의 분배 비중을 보면, 가계소득은 70.1%에서 61.9%로 약 8%포인트 줄었다. 반면 기업소득은 17%에서 25.1%로 약 8%포인트 늘었다. 정부 몫은 13%로 거의 변화가 없다. 가계에서 줄어든 몫만큼 기업에 넘겨진 셈이다. 기업들은 조 단위의 사내유보금을 쌓아놓기만 하니 돈이 시장 바닥까지 돌아올 리 만무하다.
경제 거의 전 부분이 추락하는 가운데 부동산 같은 곳만 빛을 봤다. 월급쟁이들이 집을 수채씩 보유해서 월세 임대수익 받는 게 꿈인 세상이 됐다. 치킨집으로 대표되는 자영업은 언제 망할지 불안부터 앞선다. 이를 부추긴 대표적인 수단이 분양권 전매 완화였다. 분양만 받으면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1억원 넘게 프리미엄(일명 ‘P’)이란 명목으로 얹어서 되팔 수 있게 했다. 운 좋으면 미분양 아파트를 골라잡았다가 양도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는 ‘특혜’를 챙긴다. 너도나도 조금만 여유 있으면 집을 몇 채 더 사려고 달려든다. 전세금을 끼고도 여유자금이 부족하면 대출을 수천만원 받으면 된다. 열심히 저축하며 살아온 사람만 ‘시대에 뒤떨어진 바보’로 만든 게 정부다.
한술 더 떠 ‘아파트 10채 갖기 운동’ 같은 투기까지 번지고 있다. 다주택 보유자에게 세금을 중과하지 않고, 분양권 전매제한 완화, 청약 1순위 자격 완화, 미분양 지역 양도세 폐지 같은 부동산 부양책과 맞물려 ‘부동산 쇼핑 괴물’을 낳은 것이다. 가계부채는 올 6월 1257조원이고, 연말 1330조원을 넘어 내년 말 약 1460조원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폭탄이 터지면 충격은 대출자는 물론 애꿎은 서민들이 입게 돼 있다. 주택보급률이 2014년 103.5%까지 올랐지만, 자가점유율은 53.6%뿐이라는 사실을 박 대통령은 알고나 있을까.
최창우 전국세입자협회 대표는 “11월 3일 부동산 안정화 대책에 세입자 관련 대책은 없었다. 그동안 세입자는 투명인간이자 투기를 위한 불쏘시개였다”며 “불안한 서민들이 마을 졸이다가 빚내서 집을 사도록 해 건설경기를 띄웠다”고 비판했다. 최 대표는 “노동해서 살 생각보다 메뚜기떼처럼 휩쓸고 다니며 집을 쓸어모으고 가격거품만 올려놓고 빠지는 일이 벌어진다. 이게 나라냐”고 말했다. 이렇게 정부·여당은 서민들을 집값만 오르길 바라는 지지자로 만들어 한 배에 태웠다. 일단 운명공동체가 되면 표를 얻고, 양도소득세를 챙겨 세수 확보에도 도움이 된다. 최승섭 경실련 부동산·국책사업감시팀 부장은 “젊은층의 노동의욕마저 꺾는 부동산투기 수단부터 막아야 한다”며 “분양권 전매를 막고 공공주택은 무조건 완공 후 2~3년은 의무거주 기간을 둬야 한다. 후분양제까지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짜 서민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서울 성동구 응봉산 자락 비탈에는 지금도 유심히 보면 계단식 집터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빈민들이 겹겹이 살던 판자촌이 있던 자리다. 1960~70년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시기 서울로 상경했던 이들은 남산, 청계천 일대 빈민촌 재개발로 밖으로 밀려났다. 1차 저지선인 한강 앞에서 산비탈에 눌러앉은 곳이다. 이어 사당 일대로 갔다가 다시 밀려 경기도 광주(현 성남)까지 쫓겨났다. 거기서 터진 것이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이다. 상·하수도 시설조차 없는 곳에 15만명 이상 몰아넣자 벌어진 사달이다.
투기 열풍 불러온 부동산시장 부양책
당시보다는 번듯한 주택과 직업이긴 하지만 서울 외곽으로, 위성도시로 밀려나는 양태는 예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빈민들이 연탄을 짊어나르던 지게가 비정규직의 컴퓨터 자판으로 대체됐을 뿐이다. 서울 인구 1000만명 선이 올해 4월 무너졌다. 전·월세가격 등 집값을 비롯한 높은 생활물가에 버티지 못한 이들이 서울에 인접한 도시로 밀려나고, 다시 수도권에서도 더 먼 곳으로 쫓겨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파가 주류로서 집권해온 비결은 적당한 ‘매카시즘’을 이용한 공포 자극과 함께 “이밥에 고깃국은 먹게 해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사회·문화·환경적으로 물의는 빚더라도 ‘잘살게 해주면 되지 않느냐’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구조가 와해되고 있다. 적어도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보여준 행보는 그렇다. 한국 사회 불평등 구조 악화는 1997년 말 외환위기에서 심화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비정규직 일자리 양산에 책임이 크다. 과격한 위기수습에 급급했고, 대안모델도 제시하지 못했다. 이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단죄만이 능사가 아니라 더 멀리 내다봐야 할 이유다. 진짜 분노해야 할 지점은 ‘최순실의 프라다 신발’이 아니라 ‘서민들의 갈라터진 맨발’이다. 박근혜·최순실 때리기에 신난 야권이 정신차려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현 정부 누적적자 153조원, 국가채무 240조원 증가
그동안 잘나가던 주요 대기업마저 휘청대고 있다. 올해 3분기 실적에서 시가총액 1~3위인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는 매출·영업이익·당기순이익이 모두 전년 대비 감소했다. 산업생산은 5개월 만에 다시 감소세로 돌아섰다. 기업들의 경기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제조업의 11월 업황전망 BSI는 72로 집계됐다. 이는 9월에 조사한 10월 전망치(75)보다 3포인트 낮은 수치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토록 경제 돌파구라며 강조해온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북한 붕괴론에 기댄 남북관계 단절로 녹슬었다. 오히려 남한과 러시아를 잇는 허리띠를 끊어놓았다. ‘대북 퍼주기’ 운운하며 올 2월 개성공단마저 닫아버렸다. 개성공단기업 비상대책위원회 김서진 사무국장은 “개성공단 중단 조치에 비선개입 의혹까지 제기됐다. 개성공단을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 알기나 하느냐”고 지적했다.
내년 7월부터는 대기업집단(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지정 기준이 자산 5조원에서 10조원으로 대폭 상향되도록 박근혜 정부가 바꿨다. 기존 중소기업들은 사실상 대기업들이 중견기업 행세를 하는 데 불만이 적잖다. 이원섭 중소기업중앙회 정책총괄실장은 “규제완화라며 사실상 대기업이 중소기업으로서 혜택은 누리면서 사업영역을 침범하게 됐다”며 “필요한 규제도 있다는 건의문을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내년까지 박근혜 정부의 5년간 누적 재정적자가 152조8000억원으로 예상된다. 이명박 정부 때 98조9000원보다 54.5%나 늘어났다. 국가채무 증가액도 이명박 정부 143조9000억원보다 66.5% 많은 239조6000억원이나 된다.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참여정부 초대 청와대 정책실장)는 “두 정권에서 부자감세와 규제완화 정책으로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됐다. 서민과 중소기업이 너무 어려워졌다”며 “이명박 정부 때는 4대강 사업으로 재정을 악화시켰다면 박근혜 정부는 아무 한 일도 없이 왜 살림을 망쳤는지 이해조차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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