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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진두지휘한 '유학생 간첩 조작 사건', 41년만에 무죄
박재찬 기자 입력 2016.12.18 17:22 수정 2016.12.18 17:31 

억울한 옥살이 목회자 3명

나도현 전병생 김명수 목사(왼쪽부터). 기장총회 제공
나도현 전병생 김명수 목사(왼쪽부터). 기장총회 제공

1975년 10월 19일 이른 새벽. 정체불명의 남자 4명이 당시 한국신학대(현 한신대) 신학대학원 2학년생이던 김명수(68·충주 예함의집) 목사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영문도 모른 채 그가 끌려간 곳은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이하 중정·국가정보원의 전신) 대공분실이었다. 지하 고문실에 감금된 채 한 달 동안 모진 고문과 협박 구타 회유 세례를 받았다. 혐의는 ‘재일동포 유학생 김철현의 지령을 받아 유신철폐 시위를 배후조종했다’는 것이었다.

 ‘학원 침투 북괴 간첩단 일망타진.’ 김 목사가 끌려간 지 한 달 쯤 지난 그해 11월 22일 주요 일간지 1면 기사를 본 김 목사 가족들은 아연실색했다. 간첩단 조직도엔 종교계 침투공작조 ‘간첩 김명수’란 단어가 선명했다. 같은 학교 선후배였던 나도현(69·서천 송석교회), 전병생(66·익산 단비교회) 목사도 간첩단에 포함돼 있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 조작 사건’은 이렇게 외부에 알려졌다. 중정이 고국으로 유학 온 재일동포들을 간첩으로 조작하고, 한신대 등 국내 대학생들을 연루시킨 것이다. 피의자들은 법정에서 전부 중형을 언도받았다. 이 사건 조작을 진두지휘한 인물은 당시 중정 대공수사국장이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고 김 목사 등은 증언한다. 최근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은 유학생 간첩 조작사건과 김 전 비서실장에 대해 일부 다루기도 했다.

 지난 15일 서울고등법원은 이 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김 목사 등 3명의 재심청구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유죄 선고 후 꼭 41년 만이다. 법원은 “피고인들이 수사과정에서 고문과 구타를 당한 정황이 확인되고, 이에 따른 허위자백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선고이유를 밝혔다.

 김 목사는 18일 국민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감옥을 출소했지만, 지난 40년 동안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며 “억눌린 감정 속에 살아왔는데 이제야 해방감을 느낀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그는 1심 무기징역, 2심 10년을 선고받고 4년 3개월이나 복역했다.

 출소한 뒤에도 10년 넘게 정보당국의 감시 속에 지내야 했다. 부산의 한 대학에서 20년 넘게 교수로 일하면서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정보당국에 보고됐다. 교직에서 은퇴한 김 목사는 현재 충북 충주 노인요양시설 ‘예함의 집’에서 치매 노인들을 돌보고 있다.

 함께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다른 두 목사의 인생도 순탄치 않았다. 간첩 방조죄와 반공법 위반죄로 각각 4년 3개월, 2년을 교도소에서 보낸 그들을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여기저기를 전전하던 두 목사는 시골교회를 개척해 지금까지 30년 넘게 섬기고 있다.

 나 목사는 “기독교인들은 항상 가시밭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면서 “비난과 오해를 받는 일이 불편했지만 개의치 않는다”고 애써 담담해 했다.

 3인의 재심 신청은 6년 전쯤 이뤄졌다. 간첩조작 사건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던 재일동포들이 먼저 재심절차를 진행하며 동참을 권유한 것. 김 목사는 “다 지난 일을 들춰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후대에 바른 역사를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에 나서게 됐다”고 했다. 이들은 이번 재심에 대한 검찰의 항고 여부를 지켜본 뒤 국가를 상대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소송 제기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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