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거란 전쟁의 재검토 - 강성봉" 중 "3.양국의 군사체계와 전술 - 1) 거란의 군사습속과 전술" 부분을 가져왔습니다.
거란의 군사습속과 전술
강성봉 성북문화원 2014
거란은 화북, 만주, 몽골을 포함한 지역 일대에서 200년 이상(916~1125) 왕조를 유지했다. 원래 거란은 양, 말, 돼지뿐만 아니라 농작물은 고작 수수 정도에 의존하는 반유목민이었다. 그들은 초원지대와 농경지대에 걸친 경계지역을 장악하고, 기병에 의한 군사력과 경작농민에 의한 경제적 생필품의 공급을 결합시킨 혼합경제생활을 하였다.9)
거란 군제의 특징은 유목민의 유습을 이어받은 총동원체제로 표현되는 병민일치이자, 군정일치라 할 수 있다. 『遼史』 병위지와 『거란국지(契丹國志)』 건관제도(建官制度)에 ‘거란의 병제는 15세 이상, 50세 이하면 모두 병적에 예속되었다.’10)라는 말은 거란인 모두가 군인이라는 의미로 국민개병제를 뜻한다.11)
일반적으로 거란의 군인은 민과 차이가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거란족의 오랜 유목전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유목민은 4~5세가 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배우기 시작한다. 바로 이러한 삶의 과정 자체가 기병의 훈련과정과 흡사하다. 또한 거란족의 거주지는 바로 병영이었다.
거란족은 전쟁이 임박하면 각 부족의 형편에 알맞게 부대를 조직하였다. 이를 ‘部族軍’이라 하였다. 『요사(遼史)』 영위지(營衛志) 에 ‘유사시에 공전(攻戰)하는 것이 임무이며, 한가할 때에는 생업에 종사한다.’12)는 말처럼 아무 때라도 민이 군으로, 군은 민으로 전화될 수 있는 ‘적병적역병역목(亦兵亦牧)’의 상태에서 군과 민이 결합된 사회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거란은 인구는 많지 않았으나,13) 신속하게 무장을 하게되면 수만에서 수십만에 달하는 군대가 바로 조직될 수 있었다.14)
거란군의 또 다른 특성 하나는 생산과정과 전쟁과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거란은 평상시에도 대형 수렵을 할 때는 천군만마를 투입하여 5내지 10명의 기병단위로 사냥전투를 방불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거란은 주생활이 유목과 수렵이었으므로 평시에도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말타기, 활쏘기 등의 전기를 스스로 연마하였다.15) 그리고 이러한 실습과정을 통하여 유능한 전사와 지휘관을 배출시켰다. 유목과 수렵시의 동원이나 훈련은 부족단위로 실시하였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하나의 정치단위가 됨과 동시에 최고의 군사조직이었다.
거란군이 출정시에는 기병이 최대한의 전투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편성되어 있었다. 거란군은 출정시 매 정군(正軍) 1인이 말 3필을 가지고 다녔다. 이는 장거리를 이동한 뒤에도 적 공격시 말의 기동력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전투병사의 보급을 위하여 타초곡기(打草谷騎)와 수영포가정(守營鋪家丁)을 각각 1인씩 두었다.16) 그리고 매 병사마다 활 3, 화살 300, 장단금창(長短金倉), 금골(金骨), 금타(金朶), 부월(斧鉞), 소기(小旗), 퇴추(鎚錐), 화도석(火刀石), 마우(馬盂), 미소(米少) 1말, 미소대(米少袋)1, 탑금모산(搭金毛傘) 1, 미마승(縻馬繩) 2백척을 모두 스스로 준비하게 하였다. 사람과 말에게 군량과 풀을 주지 않았는데, 그 공급은 타초곡기의 책임이었다.17) 거란군은 가장 많았을 때가 1,642,800명이었다고 한다.18)
거란군의 특징 가운데 또 하나는 전쟁시라 할지라도 보급을 스스로 취하였다는 점이다. 유목의 특성상 자신의 식량은 스스로 해결하여야만 하였다. 그러므로 평화시에는 목축과 수렵에 직접 참가하여 자기 몫의 양식을 해결하여야 하였지만, 전시에는 상대로부터 전리품과 식량을 얻지 못하면 바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출 수가 없었다. 특히 타초곡의 임무는 병사가 출정시 병기와 장구를 조달하고 군량 고갈시 그 보급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거란은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 속에서 기병의 공격력과 요새화된 도시를 포위하는 기술을 결합시키는 방법을 습득하게 되었다. 그들의 침공은 광활한 평원에서는 더욱더 뛰어났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십, 백, 천 단위 조직에 기초한 전초대, 좌우익대, 주력부대(중군), 그리고 황제친위대가 시계처럼 정밀한 조직체로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거란군은 만명 이상의 정찰대를 선두에 배치하였으며, 야간 순찰과 봉화 북 피리 기 암호 동라 조적으로 구성된 복잡한 신호를 사용하였다. 그들은 전진할 때에 좌우익군을 평행선 노상에 배치하였는데, 힘든 적과의 접근전을 회피하는 대신 적의 보급을 끊어 버리고 복병과 기동 전략을 사용하였다. 공성작전시에는 성 주변에 있는 호를 메우기 위하여 중국인들을 징발하였고, 성곽을 파괴하기 위하여서는 중국의 투석기를 사용하였다. 도시를 기습할 때에는 중국인 포로들을 그들의 동향이노가 친척들을 앞에 세우고 들어갔다.19)
거란군의 구성
(1) 금위제군-거란의 최정예군으로 어장친군(御帳親軍)과 궁위기군(宮衛騎軍)으로 나뉜다.
1) 어장친군:황실에 직속된 군대로 전국에서 뛰어난 전사를 뽑아 편성한 부대.20)
-皮室軍(피실군:황제직속부대로 30만명이며, 남,북,좌,우,황의 5개 부대로 구성됨)
屬珊軍(속산군:황후직속부대로 20만명이며, 2개부대로 구성됨)
2) 궁위기군-황제의 근위부대로 평소에는 궁과 관청을 경호하고 왕이 출정하면 호종한다.
병력은 9만2천 명. 최고의 대우를 받는 정예부대로 완전히 황실에 직속되었다.21)
(2) 부족군
1) 대수령부족군(大首領部族軍)-왕족인 친왕과 대신이 거느리는 부대로 사병적인 성격이 강했다. 규모도 1천 명에서 수백 명으로 제각각이고 명칭도 태자군, 무슨무슨 왕군 하는 식으로 불렀다. 그러나 국가에서 요청하면 자기 부족에서 선발하여 5천 명까지도 징발하였다.
2) 중부족군(衆部族軍)-여러 부족군이라는 뜻으로 대수령부족보다 한 단계 낮은 부족의 군대다. 전성기에 거란의 총 부족은 32부였다. 이들은 사방 국경의 방어를 맡았다.
(3) 향병
5경(상경,중경,동경,남경,서경)의 방어를 담당한 군대다. 거란인은 어디에 거주하든 어장친군이나 부족군 등에 속했다. 따라서 향병은 거란인 이외의 민족으로 5경에 거주하는 이들로 구성되었다. 대체로 한족, 해인, 발해인이 주를 이루었다. 이 중 한족의 수가 가장 많고, 다음이 발해 유민이었다.
(4) 속국군
거란의 정규군이 아니고 여진, 말갈, 서해(西奚) 등 거란에 복속한 민족, 부족에서 내놓는 군대다. 거란측 목록에는 무려 59개국의 명칭이 나타난다. 속국이 아닌 곳도 포함시켜져 있다(고려,신라).
부대 편제
기초단위 隊: 500~700명
도(道): 10대(隊)가 1도(道)를 이룸(1道가 전투부대의 기본단위로 5,000~7,000명)
로(路): 10도(道)가 1로(路)를 이룸(1로에서 호가군(본대)3만명, 선봉군(호가군의 전후좌우에 배치됨)은 3천명으로 구성) → 1로군의 병력은 5만~7만 명
요군 전술의 특징
요군은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부대를 주축으로 삼고 있었으므로 속전속결의 단기전을 중요시하였다. 그리하여 거란군은 봄의 경우에는 1월에 출병하여 4월에 철수하고, 가을에는 9월에 출병하여 12월에 철병하는 것을 상례로 하였다. 외정은 황제의 친정도 있고, 황제의 위임을 받아 조정의 중신이 나서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체로 동원병력의 규모는 10만 내외였다. 거란군의 최소기본단위는 1대로 500~700명의 규모였다. 그리고 10대를 1도(5,000~7,000명), 10도를 1면(50,000명~70,000명)으로 하여 전투임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최선두 부대는 적진으로 달려들어 득이 있으면 다음 부대가 점점 전진시켰고, 여의치 않으면 물러나 다음 공격을 준비하기 위하여 휴식을 취하고 다음 부대가 계속하여 같은 형태의 공격을 축차적, 파상적으로 전개하였다.
특히 거란군은 공격시에 적의 성 방어와 수비가 견고하여 공격할 수가 없으면 군사를 이끌고 이를 통과해 버린다. 그리고 적을 겁주어 성 밖으로 나오도록 포위하여 활을 쏘고 북을 치며 시끄럽게하며 거짓 공격을 한다. 적이 성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통하는 길을 끊고 다른 곳과의 연락을 두절시켜 고립무원의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거란군은 공성작전이 개시되면, 양민들을 동원하여 토목을 운반하게 하여 성지 주변의 참호를 메우게 하였다. 또한 양민을 위협하여 공성부대의 선두에서 성벽을 기어오르게 하였다. 이는 적군이 방어를 위하여 쏘아대는 화살과 투석으로부터 부대를 보호하는 한편 적의 전력 소모후에 결정적인 시기를 틈타 일제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전과를 극대화시키려는 전술이었다.22)
한편, 적측의 요새 사이의 모든 교통로에 순찰기병을 배치하여 부단히 보급로와 적측 요새 상호간의 연락을 차단하여 철저히 고립시켰다. 수색대인 원심탄자군(遠探攔子軍)은 각 수십인으로 선봉군 전후 20여 리에서 전진하였다. 야간에는 5~10리를 단위로 천천히 달리다가 말에서 내려 사람과 말의 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상황판단을 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적이 있으면 즉시 이를 사로잡고, 적의 세력이 감당하기 어려우면 신속히 선봉부대와 주력부대에 보고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원탐탄자군은 기동간 경계 및 수색임무 이외에도 숙영지에서의 경계임무도 아울러 수행하였다.23)
또 요군은 항상 5~10기를 단위로 하는 조를 편성하여, 구성원 중의 한 사람이 적의 뒤를 추격할 경우에는 반드시 나머지 해당 조원도 함께 추격에 가담하여 서로 협조하도록 하는 군령을 제정하고, 만약에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그 구성원 전원을 극형에 처하였다. 이 때문에 요군의 기병들은 항상 개인행동을 삼가고, 적과 맞서서 싸울 때에는 서로 힘을 합하여 목숨을 내걸고 싸웠던 것이다.24)
전시에 요군은 병력을 세등급으로 나누어 제1등급은 최정예병으로 편성하여 최고급의 완전한 장비를 지급하고 전열의 최후방에 배치하였다. 제2등급에 속하는 기능 보유병사들에게는 장비를 절반만 지급하여 전열의 제2선에 배치하였다. 반면에 가장 낮은 전투기술 보유 병사들에게는 비무장이나 다를 바 없는 장비를 지급한 상태로 전열 최전선에서 적의 예봉을 맞아 싸우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전투기술이 미숙한 병사들은 전기 향상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전기를 연마하였다.25) 이와 같은 거란족의 독특한 병력운용방식은 별다른 훈련과정 없이도 평상시에 다수의 정예기병을 확보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26)
주석
9) 존 킹 페어뱅크/중국사연구회, 『신중국사』, 까지, 1994, 313~314쪽.
10) 『遼史』 卷34, 志4, 兵衛志上, “遼國兵制 凡民年十五以上 五十以下 隸兵籍”. ; 『契丹國志』 卷23, 建官制度,“凡民年十五以上 五十以下 皆籍爲兵”.
11) 한편, 거란은 군사를 징발할 때에 장정들은 전쟁터에 나가고 노약자들은 능침을 지키게 하였다(『遼史』, 卷31, 志1, 營衛志上, 宮衛, “有調發 則丁壯從戎事 老弱居守”). 이는 노약자는 향토방위의 임무를 지고, 외정을 주로 하는 공방전은 젊은 용사들이 전담하였던 상황을 전해 준다.
12) 『遼史』 卷31, 志1, 營衛志上, “有事則以攻戰爲務 閑暇則以畋漁爲生”.
13) 400만 정도라고 하였다(존 킹 페어뱅크/중국사연구회, 『신중국사』, 까지, 1994, 153쪽).
14) 『거란족문화사』, 흑룡강인민출판사, 1994, 355쪽.
15) 『遼史』 卷34, 志4, 兵衛志上, 兵制.
16) 『遼史』 卷34, 志4, 兵衛志上, 兵制, “每正軍一名 馬三疋 打草穀,守營鋪家丁各一人”
17) 거란 초기에는 거란인마에 양식과 마초를 주지 않고 매일 기병을 사방으로 내어보내 약탈을 해 와서 군수품으로 제공하였는데 이것을 타초곡이라 하였다. 대군이 정벌에 나서면 매 정군 1명에게 타초곡과 수영포가정 각 1명씩을 배치하였다. 이후 요나라는 점차 각지에 농업이 발달하면서 타초곡은 점차 방식과 마초를 공급하는 보조수단으로 변하였다. 성종 이래 연변 각 처에 둔전수병을 두어서 비축한 양곡으로 군량을 나누어 주게 되니 타초곡법은 점차 폐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풍속이 완전히 사라지기는 어려운 것이어서 요 일대에는 간혹 이를 행하기도 하였다.
18) 『遼史』 卷34, 志4, 兵衛志上, 兵制.
19) 『遼史』 卷34, 志4, 兵衛志上, 兵制.
20) 금군이 황제의 친위군과 황후의 친위군이라는 희한한 편제를 한 이유는 거란의 부족체제 때문이다. 황제는 야율씨, 황후는 술율씨에서 나왔다. 거란의 황실은 야율씨와 술율씨의 연합세력인 셈이었고, 그것이 군 편제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 할수 있겠다.
21) 유사시소집 명령을 받으면 여타부대의 징집이나 편성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수도로 집결하여 순식간에 10만 대군을 형성했다.
22) 『遼史』 卷34, 志4, 兵衛志上, 兵制.
23) 『遼史』 卷34, 志4, 兵衛志上, 兵制 ; 松井 等, 「거란의 국군편제 및 전술」 『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4, 동경대학 문과대학, 1918, 38~42쪽.
24) 『遼史拾遺』 권13에 인용된 儒林公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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