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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연타 반당 정권 창출, 唐軍 전면 철수 압박
<76> 토산 붕괴 
2013. 09. 11   17:33 입력

중국 요령성 해성(海城) 시 영성자촌에 위치한 고구려 안시성의 옛 터. 평범한 야산처럼 보이는 이곳이 그 옛날 당나라와 고구려의 격전지였다. 왼쪽이 당군이 안시성 공격을 위해 인공적으로 쌓은 토산이고, 오른쪽이 고구려 안시성이 위치했던 곳이다. 필자제공

당군은 안시성 동남쪽 귀퉁이에 흙으로 토산(土山)을 쌓았다. 고구려도 여기에 맞서 성을 높였다. 성과 토산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전투도 치열해졌다. 당은 사졸들을 교대로 투입해 하루 6~7 차례 교전했다. 석포에 성벽·성루가 무너지기도 했지만 고구려인들은 금세 나무목책을 세워 복구했다.
너무 높이 올라간 토산

토산은 바닥에 돌을 깔고 그 위에 흙을 올려 판축을 하며 올라갔던 것 같다. 지금은 형체를 알 수 없지만 안시성의 정문을 바라다보는 부분의 토산은 가파르고 그 반대쪽은 완만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당군이 토산을 고구려군으로부터 방어하고 정상에 병력과 물자를 수월하게 배치하려는 계산을 했다면 그러하다. 

‘자치통감’은 토산의 완성을 이렇게 전한다. “토산을 쌓는 일을 밤낮으로 쉬지 않아서 무릇 60일이나 되었는데 공력을 들인 것이 연인원 50만 명의 분량이었다. 토산 꼭대기에서 성곽까지는 몇 장(丈) 정도 떨어져 있어서 내려가서 성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도종이 과의 부복애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토산 꼭대기에서 적을 대기하였다.” 

안시성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이였다. 토산이 성벽을 누르자 안시성 사람들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언제 당나라군이 토산의 꼭대기에서 안시성으로 밀려올지 몰랐다. 

비가 내린 8월 어느 날이었다. 태종의 조카 도종과 그 부관 부복애(傅伏愛)가 자리를 비운 사이였다. 토산이 안시성 방향으로 무너졌다. 그쪽이 가파른 것이 화근이었으리라. 토산이 성벽과 이어지자 고구려 병사들이 쳐들어와 그곳을 점령해버렸다.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자신들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한 것이다. 

손자의 예언 안시성에서 현실화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토산이 무너져 성을 눌러버리니 성이 무너졌는데 마침 부복애는 사사롭게 거느리는 부대를 떠나 있었고 고려사람 수백 명이 성이 무너진 곳으로 나와서 싸우고 드디어 토산을 빼앗아 점거하고 참호를 파 이곳을 지켰다.”

당 태종은 인내의 한계를 넘었다. 책임자인 자신의 조카 도종을 참수할 수 없어 그의 부관 부복애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 토산을 재점령하기 위해 나흘 동안 총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고구려군의 철통방어에 막혔다.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 

‘손자병법’ 모공(謀攻) 편에서 성을 공격하는 일이 최하의 방법이라고 했다. “토산을 만드는 데 다시 3개월이 필요하다. 그 위에, 혈기에 넘치는 장군이,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해 병사를 개미떼처럼 성벽에 기어오르게 함으로써 성을 공격해 병력의 3분의 1을 죽이고도 성을 함락시킬 수가 없다면, 이는 재앙이다.” 손자의 이러한 지적이 안시성에서 재현되는 것 같았다. 

진주가한의 사망 · 설연타군 철수

한편 같은 시간에 장안의 정북 쪽 하주(夏州)에서는 당의 장군 집실사력이 설연타의 십만 기병과 싸우고 있었다. 설연타 진주가한의 아들 발작이 황하가 북쪽으로 엎어진 ‘ㄷ’자 형태로 휘어진 오르도스 지역으로 진입해 집실사력이 이끄는 당기병과 전투가 벌어졌다. 처음 집실사력은 설연타 군대와 싸우면서 조금씩 후퇴했다. 하주에 있는 그의 주력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였다. 도착한 직후 설연타의 기병들이 준비된 당군의 반격을 받았다. 

‘신당서 집실사력전은 이렇게 전한다. “(태종이) 요동토벌을 하러 갈 때 집실사력에게 조(詔)를 내려 금산도에 주둔하여 돌궐(기병)을 지휘하여 설연타를 대비하도록 했다. 설연타의 10만 기병이 하남을 침공하자 집실사력은 약하게 보여 적이 하주까지 들어오게 했다. 집실사력은 이내 진을 정비하여 설연타를 패배시키고 600리를 추격했다. 그런데 설연타의 (진주)비가가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적북에서 시위하고 돌아왔다.”

이 기록을 보면 설연타의 군대가 하주에서 전열 정비한 집실사력 군대의 공격을 받고 600리나 후퇴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집실사력은 설연타의 진주가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하지만 소식은 설연타 쪽에 먼저 전해졌으리라. 설연타의 군대가 하주에서 한 번의 반격을 받고 철수한 것은 전령에게 급보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8월 10일께 고구려 안시성 앞에서 설연타의 침공 소식을 접한 당 태종이 설연타 진주가한의 죽음을 짐작한 것은 대충 적중했다. 적어도 그때 설연타의 진주가한은 임종 직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발작의 형제 살해 · 설연타 정권 장악

진주가한의 아들 발작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이복 형 예망과 설연타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관계에 있었다. 발작은 곧장 본거지 몽골리아로 병력을 철수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휘하에 당과의 전쟁에 동원했던 10만 대군을 장악하고 있던 시점에서 피를 나눈 경쟁자를 제거해야 했다. 적자인 그가 장례를 주관했다. 서자 예망은 죽은 아버지 진주가한을 만나기 위해 살아있는 이복형제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이 자신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야 했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전한다.

“설예망은 성격이 조급하고 시끄럽고 가볍게 군사를 사용하여 설발작과 협조하지 아니하였다. 진주가한이 죽자 와서 모여서 상례를 치렀다. 장사를 지내고 나서 예망은 설발작이 자기를 도모할까 두려워서 먼저 거느리는 부(部)로 돌아갔는데, 발작이 그를 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다미(多彌)가한이 되었다.”

유목사회에서 왕위쟁탈전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이었다. 내분은 양날의 칼이었다. 유목제국을 파멸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야망에 찬 유능한 새 지도자가 배태되는 산고이기도 했다. 발작이 이복 형을 죽이고 즉위한 소식이 안시성 앞에 도착한 시점이 645년 9월 7일이었다고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司馬光)은 고증하고 있다. 그날 당 태종은 진주가한을 애도하는 의식을 치렀다. 
당 태종의 빗나간 예측

초원에서의 소식은 당 태종에게 의외였다. 정변 자체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둘 가운데 하나가 그렇게 신속하게 다른 하나를 제거하고 부중(部衆)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당은 진주가한 두 아들의 경쟁관계를 조장해 설연타를 약화시키려 시도해 왔다. 당 태종이 예측한 것은 이복형제 간의 끊임없는 내투였고, 장기적인 내란상태였다. 설연타의 침공에도 철수하지 않고 안시성을 집중 공격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예측이 빗나갔다. 안시성은 함락되지 않고 북쪽 초원에서 반당적인 설연타의 새 가한이 즉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태종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고구려와 설연타가 손을 잡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가시화됐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었다. 

다미가한으로 즉위한 발작이 다시 오르도스 지역을 침공해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자치통감’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설연타의 다미가한(발작)이 이미 즉위했는데 황상(당 태종)이 (고구려에) 출정했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군사를 이끌고 하남(오르도스)을 노략질했다.”

발작은 당의 분열정책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막대한 공작금을 지참한 고구려의 사절이 이러한 발작의 정권 장악을 지원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당 태종은 고구려에서 철수를 서둘러야 했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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