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뼈는 신경쓰지 않고 성병검진만 했다”
[기획-‘위안부’ ③] 일본이 만든 성 노예제의 실상
문형구 기자 mmt@mediatoday.co.kr 2017년 06월 03일 토요일
일본이 전시 성노예, 즉 위안부 제도를 만든 것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였다. 일본이 이같은 유례없이 참혹한 범죄를 기획한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남아있는 극소수의 문헌들에 비춰볼 때, 병사들의 사기 진작과 전력을 저하시키는 성병을 예방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일본은 이후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위안부 제도를 더욱 확대하고 체계화시켜 갔다.
일본은 근대화 이후로도 공창제 하에서의 인신매매를 묵인·방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창제와 인신매매의 기본 매커니즘에 근거해 위안부 제도를 창안해냈다. 1932년 상해 파견군 참모부장 오카무라 야스지는 “예전의 전쟁 시대에 위안부 등은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부끄럽지만 위안부안의 창설자이다. 쇼와 7년(1932년) 상해 사변 때 2,3 건의 강간죄가 발생하였기에 파견군 참모부장이었던 나는 같은 지역 해군을 본 떠, 나가사키현 지사에게 요청하여 위안부단을 데려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 생존자들의 증언을 보아도 1932년이 위안부 동원의 시작이었음이 확인된다.
▲ 상하이에서 발견된 일본군 직영 위안소 '어메이루 400호' 당시 이름은 ‘일본해군구락부’. 사진출처=상하이저널.
▲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매표소. 사진출처=상하이저널.
위안부 숫자는 1937년 이후로 크게 늘어난다. 정진성 교수가 1993년 기준 보건복지부에 신고된 175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논문에서도, 1932-36년까지 5년간 연행된 수는 전체의 9%(16명)에 불과한데 비해, 이후 5년간(1937-41)은 전체의 51%(90명)로 급증한다.
전쟁 확대 전엔 그 연령에 있어서도 상하 제한폭이 14-19세로 일정하며, 그 중에서도 16세와 17세에 집중되고 있다. 즉 일본은 체계적으로 미성년 여성을 전시 성노예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론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의 요구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위 175명을 기준으로 분석했을 때 그 연령이 11세부터 27세까지로 넓게 퍼져있다.(정진성, ‘일본군위안소 제도의 성립’.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묻는다)
일본이 전시성노예로 ‘사용’한 위안부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일본은 패전과 함께 전시 관련 자료를 모조리 소각했다. 이후 예상되는 전후 처리 과정에서 자신들의 범죄를 은폐하려는 목적에서다. 위안부 제도 실시 당시에도 “군의 위신 유지”를 위해 “주도면밀함”과 “긴밀함”을 강조(1938년 3월 일본 육군성 통첩)했던 일본은, 위안부 관련 자료들도 소각했을 뿐 아니라 위안부로 동원한 여성들까지 집단살상하는 잔혹성을 보였다.
전후 소각처리 되지 않고 남아 있는 자료들도 일본 정부는 자국 의회에서조차 공개를 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일본군이 동원했던 위안부 숫자는 어디까지나 추정치일 수밖에 없다.
일본 내 위안부 문제의 가장 권위있는 연구자인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는, 일본이 동원했던 위안부 수를 최소 8만에서 최대 20만명으로 보고 있다. 중국의 쑤즈량(蘇智良) 위안부문제연구센터 소장(상하이 사범대학 교수)은 중국인 피해자만 20만으로, 조선인까지 합한 전체 위안부 수는 36만~41만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큰 편차가 있긴 하지만 2차 대전에 참여했던 관련자들의 구술, 그리고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등 UN에서 정설로 인정받는 견해는 20만이다.
일본군이 설치했던 위안소의 경우 현재까지 파악된 것만 세계적으로 500여곳에 달한다. 일본의 공식 문서상으로도, 일본 이외의 지역에 설치된 위안소는 1942년 기준 총 400곳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부터는 오키나와에만 120여 곳의 위안소가 설치된 것으로 나타난다.
▲ 일본군 위안소 지도. 사진출처=일본군 위안부피해자e역사관.
자발적으로 ‘종군위안부’에 지원해 장교들만을 상대했던 소수의 일본인 위안부를 제외하면, 조선인을 포함한 피지배국 여성들은 강제로 끌려가 억류되고 집단 강간과 폭행, 살해위협에 시달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의 억류기간이나 강간의 횟수, 칼로 찌르는 등의 항시적인 폭행이 있었는지 등 구체적인 상황에선 편차가 있어 보인다.
윤정옥 교수가 생존 피해자들(보건사회부 신고 피해자 56명+정대협 신고 38명+일본 도쿄 신고전화 증언 32명)과 당시의 일본군인 증언을 종합해 본 결과, 억류기간은 2~4년이 가장 많고 5년~8년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 한다. 1932년 상해사변 당시부터 13년간 억류된 피해자도 있다.
위안부 피해자 1인을 강간한 일본군의 숫자는 하루 20~30명 정도가 많으며, 적은 경우는 3~4명, 많은 경우는 70명에서 100여명에 달했다는 증언도 있다.
어떤 곳에선 잠시나마 ‘외출’이 허용된 반면 어떤 곳에선 마당에조차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식생활 역시 소금물에 깻묵을 섞은 밥으로 연명한 경우도 있고, 어떤 곳에선 식생활에선 큰 불편이 없었던 사례도 있다.
윤 교수의 연구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중국 전선의 위안소들에선 일본군들이 고분고분하지 않다며 허벅지, 옆구리 등을 칼로 찌르거나, 칼로 성기를 째거나, 죽이는 일도 많았다. 위안부 소녀들을 살해한 뒤 가마솥에 넣어 삶았다는 증언들도 존재한다.
일본은 패전 후 위안부들을 집단 살상을 하는가 하면, 위안부들을 해외 각지에 놔두고 자신들만 도망쳐버린 경우도 있다.
“일본군은 ‘위안부’에 관한 문서를 불사르고 조선인 ‘위안부’를 여러 방법으로 죽였다고 말했다. 하야시는 답사중에, 참호에 들어가 있는 조선인 ‘위안부’를 지휘관이 폭탄을 던져 살해했고 중병에 걸려있는 조선인 ‘위안부’에게 독약주사를 놓았다는 증언을 들었으며, 구라하시도 ”성적 노예형 ‘위안부’였던 조선인 여성이 무참하게 일본군의 손에 걸려, 조직적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쓰고 있다.”(윤정옥. “‘조선 식민정책’의 일환으로서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
지난해 서울대 인권센터연구팀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을 현지조사해 일본군이 위안부 여성 30명을 총살한 중국윈난원정군의 작전일지(1944년 9월15일자)를 공개했다. 일본군은 윈난성 함락 직전인 13일 밤 탈출에 앞서 위안부들을 총살했다.(2016년 11월6일 경향신문 보도 “일본군, 조선인 여성 30명 총살” 위안부 학살 기록 원본 찾았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급부가 있었는지의 여부는,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강제성’을 부인하기 위해 논쟁거리로 삼고 있음에도 별다른 의미는 없어 보인다. 일본인 여성을 제외한 피지배국 위안부들은 공통적으로 ‘성노예형’이었고(구라바시(倉橋正直). ‘종군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연구’), 패전후 국가에 의한 집단살상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에게 ‘전표’ 등을 지급했는지에 대해선 부분적으로 해당하는 경우가 있지만, 전혀 아닌 경우가 많다.
일본이 전장으로 끌고간 수십만의 여성들이 ‘성 노예’였다는 사실은 이들을 대상으로 한 ‘건강 검진’의 방식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즉 군의관들이 실시했던 “정기 검진은 단지 성병 감염을 막기 위한 것이었고, 군인들이 여성들에게 가하는 담배불로 지진 상처, 멍, 총칼에 의한 자상, 부러진 뼈 등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1996년 유엔인권위원회 특별보고관 라디카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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