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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의 변호인' 안동일 변호사의 작심 토로
정희상 기자 입력 2017.08.04. 14:03

1979년 10·26 사건 당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국선 변호인이었던 안동일 변호사는 당시 재판이 합수부의 강압에 의해 진행되었다며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었다"라고 말했다.

7월6일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안동일 변호사(77)가 쓴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날 보기 드물게 보수와 진보 진영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보수 진영에서는 이회창 전 국무총리,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등이, 진보 쪽에서는 함세웅 신부와 박석무 전 의원 등이 연단에 번갈아 올랐다. ‘합리적 보수주의자’로 통하는 안 변호사는 1979년 10·26 사건 당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중정 부장)과 두 부하의 국선 변호인이었다. 당시 공판조서, 변호인 접견 기록, 수사 기록 등 170일간 재판 과정에서 확보한 자료를 토대로 책을 썼다. ‘김재규의 국선 변호인’ 안동일 변호사를 만났다.


ⓒ시사IN 조남진 안동일 변호사는 10·26 사건 당시 공판조서, 변호인 접견 기록, 수사 기록 등 170일간의 재판 관련 자료를 토대로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를 집필했다.

책을 펴낸 동기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된 뒤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이제는 시대 교체다”라고 했는데 공감이 갔다. 그 시대 교체를 사실은 10·26 때 했어야 한다. 10·26 당시 김재규 중정 부장의 거사 명분이 민주 회복과 적폐 청산이었다. 내가 겪은 170일간의 재판 기록을 책으로 펴내 10·26의 진실을 밝히는 디딤돌로 삼고 싶었다.

김 부장의 거사 명분을 적폐 청산이라고 보는 까닭은?

김 부장은 10·26 거사 명분을 ‘자유민주주의 회복’ ‘공화당 18년 정권에서 누적된 쓰레기를 치우는 설거지’라고 했다. 요즘 말로 하면 적폐 청산이라 할 수 있다.

보수 진영에서 이 책을 불편해하지 않나?

“국선 변호인으로서 김재규를 변론한 것은 이해하겠는데, 책을 내고 추모까지 해야겠느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옥중에 있고 재판받는 이때 하필 이런 책을 내느냐” “너 좌빨 아니냐”라 힐난하고 의문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사실 기록자다. 팩트 체크에는 보수·진보가 따로 없다.

김재규 부장의 국선 변론을 맡게 된 계기는?

군법무관시험 1기 출신으로 당시 군법무관 동기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지명된 것 같다. 처음 김재규 부장과 부하 세 사람(박흥주·이기주·유성옥)의 국선 변호를 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법정에 가보니까 김 부장에게는 30여 명의 사선 변호인단이 붙었고, 박흥주 대령에게도 변호사가 따로 있어서 처음에는 나머지 부하 두 사람만 변론하며 법정을 지켰다. 1심 재판 중간에 김 부장이 사선 변호를 거부하는 바람에 내가 현장에서 다시 선임됐다.

김재규 부장에 대한 첫인상은?

처음엔 나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의 발표대로 ‘패륜아’ ‘정권욕에 눈이 멀어 주군을 살해한 파렴치범’이 아닌가 생각했다. 접견을 하다 보니 진정성이 느껴졌다. 민주 회복을 위해 오랫동안 온건한 방법으로 박 전 대통령을 변화시키려 노력하다가 한계에 부딪혔고, 더 큰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그의 주장에 믿음이 갔다. 그때부터 이 사람을 적극 대변해줘야겠다고 결심하고 열심히 변론했다.

10·26이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고 보는 이유는?

김재규 부장은 3군단장 때 유신헌법을 보고는 “이건 박정희 영구 집권을 위한 헌법이지 민주주의 헌법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그때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 제거를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고 하더라. 3군단장 사령관실 울타리가 밖에서 안으로 못 들어오게 쳐져 있었는데, 거꾸로 안에서 바깥으로 못 나가게 바꿨다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군부대 시찰 올 때 연금을 시키겠다는 구상이었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고 했다. 이후 건설부 장관으로 부임하면서 바지 오른쪽 호주머니에 권총 담을 주머니를 따로 만들어 유사시에 거사를 하려고 준비했다고 한다. 실제 임명장 받을 때 찍힌 사진에 권총으로 불룩한 바지 주머니가 보여서 이것도 법정에 증거로 냈다.

나중에 만들어낸 거짓 주장일 수도 있는데 뒷받침할 증거라도 있었나?

민주주의 회복을 열망했다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직접 쓴 휘호다. 1979년 3월부터 10·26 거사 전까지 붓글씨로 써서 집에 보관해온 휘호 6개를 증거로 냈다. ‘자유민주주의’ ‘민주 민권 자유 평등’ ‘위대의(爲大義)’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 등 10·26 전 자기 심경을 담은 붓글씨들이었다. 또 육사를 졸업한 막내 동생이 소대장으로 임관할 때 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에도 불의에 맞서는 내용이 들어 있다.

유신체제의 첨병인 중앙정보부장 직책과 자유민주주의 회복 주장은 모순되지 않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야당을 상대로 정치공작을 했다는 점을 김 부장도 시인했다. 중앙정보부(중정)에서 우수한 인재를 많이 거느리고 국내 정보뿐 아니라 국제 정보를 다루다 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박 전 대통령에게 유신체제에 비판적인 보고를 올렸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에게 온건론을 건의하면 ‘중정이 그렇게 약해빠져서 어떡하느냐’고 야단맞고, “야당 국회의원들 딱딱 입건해서 잡아넣어야지, (비위) 정보만 쥐고 있으면 뭐하냐”고 혼나고. 그 이유로 차지철 경호실장이 옆에서 박 전 대통령을 부추기는 점도 작용했다고 하더라.


ⓒ시사IN포토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에서 10·26 사건에 대해 재심을 검토 중이다.

10월26일에 거사한 이유는?

결정적인 건, 부마사태가 일어나자 캄보디아 킬링필드에 빗대 ‘300만명 죽어도 까딱없는데 그거 하나 진압 못하느냐’고 차지철과 박 전 대통령이 강경책을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 부장은 그 지시대로 강경 진압책을 쓰면 부마사태가 전국 대도시를 비롯해 서울까지 확산된다고 보았다. 수많은 국민이 희생될 게 불 보듯 뻔한데, 그 희생을 막을 방법은 박 전 대통령을 제거하는 길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는 것이다.

함께 사형당한 부하 다섯 명에 대한 인상은?

김재규 부장이 얼마나 훌륭한 삶을 살았는지 부하들을 보고 알았다. 부하들은 보안 때문에 사전에 10·26 거사 언질을 받지 못했다. 어찌 보면 영문도 모른 채 사건에 휘말려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 부하들인데, 모두 “다시 그런 상황이 와도 똑같이 부장님 지시에 따르겠다”고 하더라. 또 사형을 앞두고 “평소에 부장님을 더 충실히 모시지 못하고 이렇게 떠나 죄송하다”라고까지 말하는 것을 보며, 김재규 부장이 얼마나 신망이 높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당시 김 부장의 법정 기록(항소 이유서)에 박근혜(영애)와 최태민 목사의 관계가 언급되었는데?

김재규 부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자녀 등 가족 관계와 여자관계에 대해서는 될 수 있으면 얘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다만 당시 박근혜와 최태민 목사 얘기는 항소 이유서를 쓰면서 ‘10·26 혁명’의 간접적인 동기로 집어넣었다. 당시 강신옥 변호사가 박선호 의전과장을 변호하면서 채홍사 얘길 들었다. 강 변호사가 나에게 대신 확인해달라 부탁했다. 내가 김 부장에게 이른바 ‘박정희 여자관계’를 물었더니 “안 변호사, 남자의 허리띠 아래는 말 안 하는 겁니다. 그만 물으세요”라고 하더라.

왜 그랬다고 보는가?

자유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대의를 위해 유신의 심장을 쏘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인간적으로 마지막 의리랄까 충정이랄까 그런 마음은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 같다. 본인 얘기대로, 유신을 종식시키는 방법은 한 사람만 제거하면 끝나는 것이지 다른 감정은 없다는 의미 같았다.

전두환 신군부는 10·26을 ‘내란 목적 살인’이라고 몰아갔는데?

집권 목적, 즉 내란 목적 살인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할 어떤 증거도 없었다. 법률적으로 내란 자체가 성립되지 않은 사건이다. 내란은 폭동이 있어야 한다. 부하들과 모의해 언제, 어떤 목적으로, 무엇을 맡으라는 그런 모의도 없었는데, 부하들에게까지 내란목적 살인죄를 적용했다.

10·26 재판을 어떻게 평가하나?

그때 재판은 합수부가 강압에 의해 자기들의 집권 시나리오 일부로 여기고 간섭했다.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었다.

구체적으로 신군부가 어떻게 압박했나?

대법정 옆방에 있는 법무감실에서 나를 불러들였다. 당시 합수부에는 검사, 판사들이 다 파견 나와 있었다. 들어가 보니까 한 10명이 쭉 앉아 있었고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하루 종일 재판 과정을 모니터링하는 곳이었다. 보안사 장군이 딱 버티고 앉아서 내게 훈계하더라. “국선 변호사가 눈치 없이 재판을 뭘 그리 열심히 하느냐. 너 손 좀 봐줘야겠다”라고 위압적으로 말했다. 그 방에선 재판부와 검찰관에게 일일이 쪽지를 넣어 재판을 보안사 입맛대로 끌어나가고 있었다. 보안사에서 나를 연행하려 했는데 합수부에 파견된 판사가 막아줬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 판사가 보안사 장군에게 “안동일 변호사한테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한다. 재판정에 외신 기자들도 많이 와 있는데, 안 변호사가 변론을 열심히 해야 공정한 재판이라고 외부에 알려지지 않겠는가”라고 만류해서 내가 화를 면했다고 귀띔해줬다.

그 정도라면 10·26 판결에 대해 재심이 필요하지 않나?

지금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에서 재심을 검토 중이다. 법리적으로는 어려운 부분도 있다. 기존 재심 사건들과 달리 이 사건은 일단 사람들이 죽었다. 살인은 틀림없지만 내란 목적이 아니라는 것과 저항권 여부가 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 당시 유신의 압제를 탈피하려고 국민을 대신해 저항했다는 측면에서 저항권 이론이 어느 정도 성립될 수 있을지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재심을 추진하는 이들을 최대한 법리적으로 도우려 한다.

신군부가 10·26의 진실을 덮기도 했지만, 김영삼·김대중 등 당시 유력 정치인도 김재규 부장에 대한 평가에 인색했는데?

그 당시 YS(김영삼)나 DJ(김대중)는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저마다 자기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10·26 평가는 고사하고 김재규 부장 구명에 관해서도 외면했다. 물론 그 후 둘 다 신군부에게 고초를 겪었다. 구명운동은 윤보선 전 대통령이나 천주교에서 주도했다.

출판기념회 때 이회창 전 국무총리가 참석해 축사를 했다.

사실 나오기 굉장히 꺼려했을 자리인데 이회창 선배를 어떻게 끌어냈느냐고 다들 묻더라(웃음). 이 전 총리도 10·26 사건 대법원 판결 당시 내란이 아니라는 소수 의견을 낸 대법관 여섯 명이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사직당한 것을 보고 사법부 역사의 오욕이라고 여겼다 하더라. 그때 가장 혹독하게 고초를 겪은 분이 양병호 대법관이었다. 이회창 전 총리만이 아니라 법조인이라면 10·26 사건은 사법 사상 가장 큰 오점을 남긴 재판이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당시 양병호·민문기·임항준·서윤홍·김윤행·정태원 등 대법원 판사 6명은 김재규 부장을 내란죄로 처벌할 수 없으며, 자연인 박정희를 살해한 행위가 국헌 문란 목적의 살인행위는 아니라는 소수 의견을 냈다).

끝으로 10·26 사건을 재조명해야 할 이유는?

10·26 사건이 일어난 지 38년이 지났어도 은폐되고 왜곡된 진실이 너무 많다. 흔히 일제 35년 잔재가 청산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박정희 정권 18년과 전두환·노태우 정권 12년 등 30년 군사정권 유산도 청산하지 못했다. YS도 유신 세력과 함께한 3당 합당, DJ도 유신 세력 JP와의 연합정권이라서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 그 뒤 노무현 정부에서도 군사정권의 적폐 청산은 이뤄내지 못했다. 그 숙제가 이제 문재인 정부로 넘어왔다. 그 과정에서 10·26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재평가하는 일은 결코 빠뜨릴 수 없다.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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