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05305.html
1500년전 신라 왕비와 자식이 잇따라 묻혔을까? 더욱 흥미진진해진 경주 서봉총 무덤주인 논란
등록 :2017-08-02 20:44
국립중앙박물관 2일 경주 서봉총 북분 발굴결과 발표
북분이 남분보다 2배 큰 연접분 규모 실체 드러나
왕비와 어린 자식 잇따라 묻혔다는 가설 나와
무덤주인 둘러싼 학계 논란 뜨거워질 듯
,공중에서 내려다 본 서봉총 발굴현장 모습.
1500여년전 신라 왕비와 그의 자식이 함께 묻힌 무덤이었을까? 천년왕조 신라가 4~6세기 마립간시대(17대 내물 마립간부터 22대 지증 마립간까지 왕을 마립간으로 불렀던 시대) 쌓은 왕릉급 고분들 가운데 하나인 경주 노서동 서봉총의 무덤 주인을 놓고 논쟁적인 물음을 던지는 발굴결과가 나왔다. 서봉총은 덩치가 큰 북쪽 봉분(북분)과 훨씬 작은 남쪽 봉분(남분)이 맞닿아 이뤄진 연접분인데, 큰 북분을 왕비, 남분을 자식의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출현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해 서봉총 남분에 이어 최근까지 조사한 북분 발굴조사 결과를 2일 발표했다. 조사 내용을 보면, 북분은 동서 방향으로 긴 타원 모양에, 긴 장축의 길이가 46.7m에 달했다.지난해 공개된 남분의 장축길이(25m)의 거의 두배다. 돌무더기를 쌓아 묘실을 보호한 봉분 내부의 적석부분도 북분의 규모는 18×11m인데, 남분은 절반에도 못미치는 7.6×5.5m였다.
두 무덤의 묘실과 봉분을 만들고 쌓는 방식도 크게 달랐다. 북분은 주검을 두는 매장주체부를 땅 위에 나무 구조물을 짜서 들여놓는 지상식이었다. 남분은 땅을 판 뒤 두겹으로 짜넣은 나무널(목곽)안에 매장주체부를 두는 지하식으로 드러났다. 남분은 지난해 발굴에서 북분의 호석(護石:무덤 둘레에 줄지어쌓은 돌들)과 봉토 일부를 걷어내고 만들어진 것으로 드러나 북분보다 늦게 조성됐다는 사실이 이미 확인됐었다.
발굴로 드러난 북분 매장주체부의 모습.
이번 발굴결과에 따라 서봉총 주인에 얽힌 학계 논란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거대한 신라 왕릉급 고분들 가운데 큰 무덤 작은 고분이 잇따라 붙은 연접분의 실체와 규모가 드러난 것은 서봉총이 처음이다.무덤주인의 수수께끼를 풀 추가 자료들이 확보된 셈이다. 앞서 북분에서는 일제강점기인 1926년 발굴조사를 통해 신라 여성귀족들이 끼었던 굵은 고리 금귀고리(태환이식)가 봉황장식 금관, 허리띠, 은합 등과 함께 나왔다. 하지만, 남성의 전용품인 큰칼(대도)은 출토되지 않았다. 반면, 1929년 영국인 퍼시벌 데이비드가 자비로 발굴한 남분(일명 데이비드총)에서는 남성이 착용한 얇은 고리 금귀고리(세환이식) 등이 소량 출토됐을 뿐이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규모가 큰 북분은 왕비나 공주 등의 여성, 왜소한 남분은 신분이 떨어지는 남성의 무덤이란 설이 정설로 자리잡고 있다. 훨씬 큰 북분이 절반도 안되는 남분과 연접해 있다는 사실은 최상위층 신분의 여성 왕족급 무덤주인을 북분에 묻고, 그의 수하에 있는 신분이 떨어지는 남성이 묻혔다는 것을 일러준다. 작은 무덤이 대체로 따로 조성되는 것과는 달리 남분은 큰 북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서로 특별한 관계임이 확실하다.
이런 맥락에서 우선 떠올릴 수 있는 가설이 북분에 최고위층 신분의 어머니가 묻히고 남분에 어린 자식이 묻혔다는 모자릉설이다. 더욱이 서봉총은 북서쪽에 인접한 대형고분인 서봉황대(미발굴)와 무덤 규모나 모양새가 비슷한 짝을 이뤄 서봉황대가 왕릉이고 서봉총은 왕비릉일 것이라는 억측도 진작부터 나온 바 있다. 좀더 고고학적인 상상력을 불어넣으면, 서봉황대와 서봉총은 신라 임금과 왕비, 자식이 한데 묻힌 특정 왕가의 무덤군이라는 설까지 나올 수 있다.
북분에서 나온 제사용 큰 항아리의 조각들. 지난해 발굴에 이어 확인된 것들이다.
더불어 주목되는 것은 남북분에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제사관련 용기와 시설들이다. 북분에서는 지난해 공개된 남분처럼 호석 바깥에 제사를 지내는데 쓰인 항아리가 최소 7점이 출토됐다. 또 남분 호석 바깥 1.2∼2.1m 지점에서는 세로 5.2m, 가로 3.3m 크기의 제단 추정 시설도 이번에 확인됐다.지난해 발굴에서는 남분에서 9점, 북분에서 3점의 제사용 큰 항아리가 출토된 바 있는데, 이번에도 많은 분량의 제사용 용기와 제단시설이 추가로 확인됐다. 고대 신라고분에서 고위층 신분의 망자를 묻은 뒤 어떻게 제례가 이뤄졌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물증이 다수 나왔다는 점에서 앞으로 관련 연구를 심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박물관 쪽은 “고대 무덤에서 봉분의 크기는 무덤주인의 신분과 직결된다. 서봉총 무덤규모가 구체적으로 확인된 만큼 앞으로 묻힌 이의 실체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논의할 수 있는 유력한 사료들을 얻게됐다”고 설명했다.
남분과 그 앞에서 발견된 네모진 제단의 흔적.
서봉총은 발굴과정에 여러 곡절들이 있었다. 1926년 일제가 경주읍 도심에 경주역을 지으면서동해남부선 기관차 차고를 짓는데 필요한 흙을 퍼내기 위해 공터를 파내는 도중 처음 자취가 드러났다. 당시 일본을 찾아온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가 고분 발굴 소식을 듣고 경주를 찾아와 봉황 모양의 금관을 발굴수습한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서봉총이란 명칭도 스웨덴의 한자 표기인 ‘서전’(瑞典)과 금관의 ‘봉황’(鳳凰) 장식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일제는 당시 출토유물을 거둬들이는데만 치중했고, 발굴조사 보고서를 남기지 않아 지난해부터 90년만에 재발굴조사가 이뤄졌다. 박물관 쪽은 발굴성과를 정리해 내년 말 보고서를 펴낼 계획이다.
발굴현장 설명회는 4일 오후 3시 경주 노서동 현장에서 열린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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