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809161.html?_fr=mt2
“계엄군 헬기 사격에 친구 즉사…마음 아파서 ‘택시운전사’ 못봐”
등록 :2017-08-31 18:35 수정 :2017-08-31 21:12
5·18때 친구 떠나보낸 시민군 김인환씨 일문일답
“설마 사격하리라 생각 못했는데 무차별로 총 쏴”
“공수부대 마주쳤지만 차마 총 쏘지 못하겠더라”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현장을 지켰던 김인환씨가 31일 낮 서울 도봉구 창동의 한 공원에서 당시 시민군들을 향해 헬기에서 총격이 가해졌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그는 시민군이었다. 1980년 5월27일 새벽, 그는 함께 총을 들었던 ‘친구’를 보냈다. 서호빈(당시 21·전남대 공대 3학년)씨는 헬기에서 계엄군이 쏜 총을 맞고 옆에서 사망했다. “총을 맞고 ‘뽁뽁’ 기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이 미웠던 김인환(58·당시 전남대 공대 3학년)씨는 5월 현장에 있었다는 것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를 볼 용기를 아직 내지 못하고 있다. 김씨는 31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지금도 5·18과 광주라는 말을 들으면 눈물이 줄줄 흐른다”고 말했다.
80년 5월 27일 새벽 공수부대가 헬기에서 쏜 총을 맞고 숨진 서호빈(당시 21·전남대 공대 3학년)씨의 영정사진.
-80년 5월27일 왜 옛 전남도청에서 나가지 않았는가?
“5월19일 날 ‘사태’가 나서 ‘동생’(후배)들 데리고 여수에 내려 갈려고 터미널에 갔는데 표를 예매하지 못했다. 터미널이 불 타버렸다. 시위 참여는 5월22일인가, 23일부터인가 참여했다. 5월24일부터 무기를 회수하러 다녔다. 그 때 ‘최규하 대통령하고 협상한다’고 무기 회수하라고 했다. 그래서 조그만한 1톤 트럭 타고 8명이서 짐칸에 앉아 시내를 돌아 다녔다. (시민들에게) 총 반납하라고….”
-서호빈 친구에 대한 기억은?
“호빈이랑은 고등학교 친구다. 내성적이고 별로 말도 없었다. 같은 공대생이고, 전혀 데모하고는 상관없었다. 정부를 믿고 무기회수하러 다닌 것이다. 그런데 5월27일 되니까 마지막 경고를 하더라. 총기회수했던 것이 미안하더라. 그래서 도청에 남았다.”
-공수부대에 맞서 총을 쐈나?
“호빈이랑 (옛 전남도청) 뒷 담쪽에 있었다. 민방공 훈련할 때 있는 곳에서 경비서는 것처럼 한 8명 정도 서 있었다. 그런데 경찰청 지붕으로 (공수부대원들이) 내려오고 있었으니까. 칼빈 갖고 있었는데, 총을 당길 수 없었다. 두려움이 아니고…. 내가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대해…. 넓으면 1미터 정도하는 골목길인데, 친구하고 양 쪽에서 쏘면…. 그런데 차마 총을 못쏘겠더라. 같은 또래 친구들 아니냐?. 그 군인들도 2학년 정도 마치고 일병·상병달고 있었을텐데.”
-친구가 헬기 사격을 당했던 순간은?
“헬기에서도 로프를 타고 빙글빙글 돌면서 (군인들이) 내려오더라. 헬기에서 사격이 왔는데, 로프를 타고 내려오니까 360도로 사격이 됐다. 헬기에서도 총을 쐈다. 로프타고 내려 오면서 총을 쐈는데 헬기에서 사격을 안했겠느냐? (자기 부대원들) 엄호하려고도 사격을 했고. 공포감 같은 것은 없었다. 솔직히 설마 사격하리라고 생각을 못했다. 항복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무차별로 사격했다. (친구의 죽음이) 안 잊혀지진다. 총을 맞고 ‘뽁뽁’ 기는데 못 도와주고….(헬기) 위에서 사격하니가 가까이 있는 사람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위에서 계속 막 (엠16을) 자동으로 놓고 막 쏘는데… 땅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러다가 군인들이 총구를 대면서 ‘항복하라’고 하더라. 나 혼자고 군인들 3~4명이 에워싸는데 항복하는 수밖에….”
80년 5월 27일 새벽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숨진 서호빈(전남대 공대 3학년)이 묻혀 있는 국립5·18민주묘지. 정대하 기자
-현장에서 붙잡혀서 어떻게 됐나?
“에피소드가 있다. 처음에 들어가서 재수생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내 조사를 맡은) 광주 서부경찰서 차아무개 형사가 보안대 소속이 아니어서 거짓말을 덮어줬다. 보안대 쪽 만난 사람은 초주검이 됐다. 그래도 광주 형사는 광주 편을 많이 들어주더라. 전남대생이었다면 못 풀려났다. 보안대 쪽 사람들이 검증을 나갔는데 자취하던 집 딸이 나를 재수생이라고 말해줬다. 미리 부탁한 적도 없는데. 그래서 대학생들한테 휩쓸린 재수생인 것으로 됐다. 상무대 영창에서 100일간 살고 훈방으로 나왔다.”
-영창 생활이 힘들었다고 들었다.
“영창 2개월은 거의 굶겨버리더라. 그릇 하나에 밥하고 국만 준다. 세번 정도 수저를 뜨면 없어진다. 빵을 2주일 후부터 하나씩 주더라. (군인들이) ‘우리들 줄 콩밥도 없다’고 했다. 식량배급이 안돼 배가 고팠다. 당시 영창에서 벽에 부딪혀서 자살한 사람도 있었고. 벽 모퉁이에 박아서 머리가 깨진 사람도 있었다. 일단 구타가 심했다. 조사 받으러 나가기만 하면 무조건 딱 앉혀서 대답이 마음에 안들면 뒤쪽 보안대 건물 뒤로 끌려가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5·18 이후 삶의 행로가 바뀌었겠다.
“영창에서 나와 신체검사를 받을 때 군의관이 ‘군대가면 맞아죽을 것’이라며 보충역으로 빼주더라. 방위병으로 근무하다가 1983년 대학에 복학해 졸업했다. 졸업 후 엘지그룹에도 면접까지 다 받는데, (엘지 기업 내) 직장 중대본부에서 (나에 대해) ‘하자가 있다’고 클레임을 걸었다. 대기업 몇 군데 보다가 면접에서 떨어졌다. 졸업 후 두 해 동안 (서울에서) 취업을 시도하다가 포기했다. 배운 것이 공학 수학이어서, 수학학원을 차려 지금까지 가르치고 있다. 평생 취업을 한번 못해봤다.”
-가족들도 5·18 시민군이었다는 것을 몰랐나?
“우리 부인도 (내가 시민군 출신인지) 몰랐다. 서울에 와서 10년 쯤 지나, 서로 옆집에 살던 부모들끼리 이웃간에 소개해 아내를 만났다. 근래에 와서 한 5년 전부터 (나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됐다. 그동안 5·18 이야기를 안했다. 죽음의 현장에 있었다는 것 정도만 안다. 두 딸(26·24살)도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었을 정도다.”
-최근 영화 <택시운전사>가 인기다.
“영화도 마음이 아파서 아직 못봤다. 가족들은 가서 보았다. 영화를 볼 용기도 안나고…. 그것(영화 속 장면)보다 (그 때 현장이) 더 심했는데, 약하게 다뤘을 것 아니냐? (그랬으면) 속도 상하고 하니까. 그동안 광주 사람들은 얘기 듣고 5·18을 접했지만, 다른 지방 사람들은 진실을 몰라서 ‘빨갱이’니 뭐니 하고.”
-문재인 정부에서 발포명령·헬기 사격 등 5·18 진상 규명을 약속했다.
“(이번 5·18기념식에서 문 대통령의 발언을) 뉴스로 보고 그 당시에는 저절로 눈물이 나더라. 뇌 속에서는 (5·18) 생각을 말아야지 하면서도 뇌 밖에서는 저절로 눈물이 흐르고…. 그런데 솔직히 (진상규명 가능성에 대해선) 덤덤하다. 5·18 진상이 꼭 밝혀졌으면 좋겠지만. 밝혀질까 싶다.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군) 자료도 많이 폐기되고 (군이) 자료 조작도 했을 것같고. 기대는 크게 안하고 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계엄군 헬기 사격에 친구 즉사…마음 아파서 ‘택시운전사’ 못봐”
등록 :2017-08-31 18:35 수정 :2017-08-31 21:12
5·18때 친구 떠나보낸 시민군 김인환씨 일문일답
“설마 사격하리라 생각 못했는데 무차별로 총 쏴”
“공수부대 마주쳤지만 차마 총 쏘지 못하겠더라”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현장을 지켰던 김인환씨가 31일 낮 서울 도봉구 창동의 한 공원에서 당시 시민군들을 향해 헬기에서 총격이 가해졌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그는 시민군이었다. 1980년 5월27일 새벽, 그는 함께 총을 들었던 ‘친구’를 보냈다. 서호빈(당시 21·전남대 공대 3학년)씨는 헬기에서 계엄군이 쏜 총을 맞고 옆에서 사망했다. “총을 맞고 ‘뽁뽁’ 기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이 미웠던 김인환(58·당시 전남대 공대 3학년)씨는 5월 현장에 있었다는 것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를 볼 용기를 아직 내지 못하고 있다. 김씨는 31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지금도 5·18과 광주라는 말을 들으면 눈물이 줄줄 흐른다”고 말했다.
80년 5월 27일 새벽 공수부대가 헬기에서 쏜 총을 맞고 숨진 서호빈(당시 21·전남대 공대 3학년)씨의 영정사진.
-80년 5월27일 왜 옛 전남도청에서 나가지 않았는가?
“5월19일 날 ‘사태’가 나서 ‘동생’(후배)들 데리고 여수에 내려 갈려고 터미널에 갔는데 표를 예매하지 못했다. 터미널이 불 타버렸다. 시위 참여는 5월22일인가, 23일부터인가 참여했다. 5월24일부터 무기를 회수하러 다녔다. 그 때 ‘최규하 대통령하고 협상한다’고 무기 회수하라고 했다. 그래서 조그만한 1톤 트럭 타고 8명이서 짐칸에 앉아 시내를 돌아 다녔다. (시민들에게) 총 반납하라고….”
-서호빈 친구에 대한 기억은?
“호빈이랑은 고등학교 친구다. 내성적이고 별로 말도 없었다. 같은 공대생이고, 전혀 데모하고는 상관없었다. 정부를 믿고 무기회수하러 다닌 것이다. 그런데 5월27일 되니까 마지막 경고를 하더라. 총기회수했던 것이 미안하더라. 그래서 도청에 남았다.”
-공수부대에 맞서 총을 쐈나?
“호빈이랑 (옛 전남도청) 뒷 담쪽에 있었다. 민방공 훈련할 때 있는 곳에서 경비서는 것처럼 한 8명 정도 서 있었다. 그런데 경찰청 지붕으로 (공수부대원들이) 내려오고 있었으니까. 칼빈 갖고 있었는데, 총을 당길 수 없었다. 두려움이 아니고…. 내가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대해…. 넓으면 1미터 정도하는 골목길인데, 친구하고 양 쪽에서 쏘면…. 그런데 차마 총을 못쏘겠더라. 같은 또래 친구들 아니냐?. 그 군인들도 2학년 정도 마치고 일병·상병달고 있었을텐데.”
-친구가 헬기 사격을 당했던 순간은?
“헬기에서도 로프를 타고 빙글빙글 돌면서 (군인들이) 내려오더라. 헬기에서 사격이 왔는데, 로프를 타고 내려오니까 360도로 사격이 됐다. 헬기에서도 총을 쐈다. 로프타고 내려 오면서 총을 쐈는데 헬기에서 사격을 안했겠느냐? (자기 부대원들) 엄호하려고도 사격을 했고. 공포감 같은 것은 없었다. 솔직히 설마 사격하리라고 생각을 못했다. 항복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무차별로 사격했다. (친구의 죽음이) 안 잊혀지진다. 총을 맞고 ‘뽁뽁’ 기는데 못 도와주고….(헬기) 위에서 사격하니가 가까이 있는 사람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위에서 계속 막 (엠16을) 자동으로 놓고 막 쏘는데… 땅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러다가 군인들이 총구를 대면서 ‘항복하라’고 하더라. 나 혼자고 군인들 3~4명이 에워싸는데 항복하는 수밖에….”
80년 5월 27일 새벽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숨진 서호빈(전남대 공대 3학년)이 묻혀 있는 국립5·18민주묘지. 정대하 기자
-현장에서 붙잡혀서 어떻게 됐나?
“에피소드가 있다. 처음에 들어가서 재수생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내 조사를 맡은) 광주 서부경찰서 차아무개 형사가 보안대 소속이 아니어서 거짓말을 덮어줬다. 보안대 쪽 만난 사람은 초주검이 됐다. 그래도 광주 형사는 광주 편을 많이 들어주더라. 전남대생이었다면 못 풀려났다. 보안대 쪽 사람들이 검증을 나갔는데 자취하던 집 딸이 나를 재수생이라고 말해줬다. 미리 부탁한 적도 없는데. 그래서 대학생들한테 휩쓸린 재수생인 것으로 됐다. 상무대 영창에서 100일간 살고 훈방으로 나왔다.”
-영창 생활이 힘들었다고 들었다.
“영창 2개월은 거의 굶겨버리더라. 그릇 하나에 밥하고 국만 준다. 세번 정도 수저를 뜨면 없어진다. 빵을 2주일 후부터 하나씩 주더라. (군인들이) ‘우리들 줄 콩밥도 없다’고 했다. 식량배급이 안돼 배가 고팠다. 당시 영창에서 벽에 부딪혀서 자살한 사람도 있었고. 벽 모퉁이에 박아서 머리가 깨진 사람도 있었다. 일단 구타가 심했다. 조사 받으러 나가기만 하면 무조건 딱 앉혀서 대답이 마음에 안들면 뒤쪽 보안대 건물 뒤로 끌려가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5·18 이후 삶의 행로가 바뀌었겠다.
“영창에서 나와 신체검사를 받을 때 군의관이 ‘군대가면 맞아죽을 것’이라며 보충역으로 빼주더라. 방위병으로 근무하다가 1983년 대학에 복학해 졸업했다. 졸업 후 엘지그룹에도 면접까지 다 받는데, (엘지 기업 내) 직장 중대본부에서 (나에 대해) ‘하자가 있다’고 클레임을 걸었다. 대기업 몇 군데 보다가 면접에서 떨어졌다. 졸업 후 두 해 동안 (서울에서) 취업을 시도하다가 포기했다. 배운 것이 공학 수학이어서, 수학학원을 차려 지금까지 가르치고 있다. 평생 취업을 한번 못해봤다.”
-가족들도 5·18 시민군이었다는 것을 몰랐나?
“우리 부인도 (내가 시민군 출신인지) 몰랐다. 서울에 와서 10년 쯤 지나, 서로 옆집에 살던 부모들끼리 이웃간에 소개해 아내를 만났다. 근래에 와서 한 5년 전부터 (나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됐다. 그동안 5·18 이야기를 안했다. 죽음의 현장에 있었다는 것 정도만 안다. 두 딸(26·24살)도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었을 정도다.”
-최근 영화 <택시운전사>가 인기다.
“영화도 마음이 아파서 아직 못봤다. 가족들은 가서 보았다. 영화를 볼 용기도 안나고…. 그것(영화 속 장면)보다 (그 때 현장이) 더 심했는데, 약하게 다뤘을 것 아니냐? (그랬으면) 속도 상하고 하니까. 그동안 광주 사람들은 얘기 듣고 5·18을 접했지만, 다른 지방 사람들은 진실을 몰라서 ‘빨갱이’니 뭐니 하고.”
-문재인 정부에서 발포명령·헬기 사격 등 5·18 진상 규명을 약속했다.
“(이번 5·18기념식에서 문 대통령의 발언을) 뉴스로 보고 그 당시에는 저절로 눈물이 나더라. 뇌 속에서는 (5·18) 생각을 말아야지 하면서도 뇌 밖에서는 저절로 눈물이 흐르고…. 그런데 솔직히 (진상규명 가능성에 대해선) 덤덤하다. 5·18 진상이 꼭 밝혀졌으면 좋겠지만. 밝혀질까 싶다.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군) 자료도 많이 폐기되고 (군이) 자료 조작도 했을 것같고. 기대는 크게 안하고 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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