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809140.html

[단독] 5·18 도청 진압때 공수부대 ‘무장헬기 투입 문서’ 첫 확인
등록 :2017-08-31 17:46 수정 :2017-08-31 20:58

전투교육사령부 80년5월27일치 작전일지 ‘04:51부 3여단 무장 Hel(헬)기 지원 요청’ 
수화자란에 ‘항공 연락장교 05:35 지원’ 현장에 실제 투입 보여줘
“5월27일 새벽 헬기서 무차별 사격… “헬기에서 쏜 총 맞은 친구의 죽음 목격” 당시 시민군 김인환씨 주장 뒷받침

1980년 5월27일 광주항쟁에 나선 시민군을 제압하기 위해 계엄군인 3공수여단이 1항공여단에 무장헬기 지원을 요청한 사실을 담은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일지.
1980년 5월27일 광주항쟁에 나선 시민군을 제압하기 위해 계엄군인 3공수여단이 1항공여단에 무장헬기 지원을 요청한 사실을 담은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일지.

1980년 5·18항쟁 당시 시민군의 거점인 옛 전남도청 무력진압에 나선 공수부대가 5월27일 새벽 육군 항공단에 ‘무장헬기’ 지원을 요청한 군 문서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이는 공수특전부대의 진압작전 때 무차별 헬기 사격을 현장에서 목격했다는 시민군 김인환(58)씨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한겨레>가 31일 확보한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의 80년 5월27일치 작전일지를 보면, ‘04:51부 3여단 무장 Hel(헬)기 지원 요청’이라고 적혀 있다. 공수특전부대인 3여단은 7·11여단보다 더 늦은 5월20일 광주에 투입돼 계엄군의 이른바 ‘상무충정작전’ 때 옛 전남도청을 진압했다. 이 문서의 수화자란엔 ‘항공 연락장교 05:35 지원’이라고 적혀 있어 실제 헬기가 현장에 투입됐음을 보여준다.

무장헬기는 보통 500엠디(MD)와 20㎜ 벌컨포를 장착하는 공격용 헬기인 ‘코브라’(AH-1J) 2개 종을 말한다. 당시 3공수가 실제로 어떤 헬기를 지원받았는지, 누가 헬기 조종사로 참여했는지 등이 향후 재진상 조사 과정에서 밝혀져야 할 대목이다. 이번 문건엔 또 ‘5:04 포로 3명 생포(전일빌딩)’라는 대목도 나온다. 전일빌딩은 옛 전남도청 인근 건물로, 5·18 당시의 탄흔이 발견돼 지난해 12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조사를 통해 5·18 당시 헬기 ‘기총 소사’(기관총 연발사격) 사실이 밝혀진 곳이다.

그동안 20사단 병력이 5월21일 헬기 지원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군 문서를 통해 확인된 적은 있지만, 도청 진압 때 공수부대의 무장헬기 지원 요청 사실을 담은 군 문서 공개는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5·18 당시 광주에 출동한 헬기 조종사가 89년 2월 검찰에 제출한 고소장을 통해 31항공단 부조종사(당시 대위)가 “5월21일부터 28일까지 ‘코브라 (헬기)’ 부조종사로 참가하는 지상군 공중엄호 임무를 맡았으며, 20㎜ 벌컨 고폭탄을 적재했다”고 밝힌 진술서가 공개(관련기사: [단독] 80년 5·18 출동헬기 조종사 “기관총 실탄 2천발 싣고 작전”)되면서 ‘코브라’ 무장헬기 출동 사실이 확인됐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현장을 지켰던 김인환씨가 31일 낮 서울 도봉구 창동의 한 공원에서 당시 시민군들을 향해 헬기에서 총격이 가해졌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현장을 지켰던 김인환씨가 31일 낮 서울 도봉구 창동의 한 공원에서 당시 시민군들을 향해 헬기에서 총격이 가해졌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이런 사실은 계엄군의 광주 진압 작전 때 옛 전남도청에서 저항한 시민군 김인환(58·당시 전남대 공대 3학년)씨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김씨는 5월27일 새벽 옛 전남도청 후문에서 보초를 서던 중 헬기사격으로 고교 친구인 서호빈(21·당시 전남대 공대 3학년)씨가 숨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김씨는 31일 <한겨레>와 통화에서 “(계엄군이) 헬기에서 로프를 타고 360도로 빙글빙글 돌면서 무차별 사격을 했다”며 “로프를 타고 내려오면서 총을 쐈는데 헬기에서 사격을 안했겠느냐. 헬기에서도 총을 쏘았다”고 말했다. 서씨는 광주항쟁 당시 헬기 사격으로 숨진 상황의 목격자가 있는 매우 드문 경우다.



김씨는 “공수부대가 설마 사격하리라고는 생각 못하고 항복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무차별 사격을 했다”며 “바로 옆에서 보초를 섰던 친구 호빈이가 총을 맞고 ‘뽁뽁’ 기어가던 모습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계엄군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어요. 친구 호빈이하고 양쪽에서 쏘았으면 그들이 죽었을 거예요. 그런데 나와 같은 또래의 젊은 군인들을 향해 차마 총을 못쏘겠더라고요….” 김씨는 “나 말고도 당시 시민군 6명도 호빈이가 헬기에서 쏜 총에 맞은 것을 목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1980년 5·18 당시 시민군의 거점이던 옛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 맞서 저항하다가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숨진 서호빈(당시 전남대 공대 3학년)씨가 묻힌 국립 5·18 8민주묘지 2묘역. 정대하 기자
1980년 5·18 당시 시민군의 거점이던 옛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 맞서 저항하다가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숨진 서호빈(당시 전남대 공대 3학년)씨가 묻힌 국립 5·18 8민주묘지 2묘역. 정대하 기자

헬기 사격을 둘러싼 논란은 앞으로 5·18진상규명 과정에서 밝혀져야 할 핵심 쟁점이다. 정수만 5·18연구소 비상임연구원은 “21사단뿐 아니라 공수부대가 광주 마지막 진압작전에 무장헬기 지원을 요청했다는 군 문서는 당시 계엄군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말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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