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했던 5·18 광주교도소 "계엄군에 끌려온 중상자 다음날 사라져"
배동민 입력 2017.09.11. 15:22
80년 5월 의무과 근무했던 민경덕 전 교도관 증언
【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1980년 5·18 민중항쟁 당시 시위를 벌이다 공수부대에 잡혀 전남대 인문대 강당에 끌려갔던 광주시민 150여 명은 5월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 직후 광주교도소로 이송됐다.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에 중상을 입은 이들 중 일부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이 11일 공개한 '광주사태 시 소요체포자 치료현황'. 이 문건은 광주교도소 의무과에서 작성됐다. 2017.09.11. (사진 =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 제공 자료 캡쳐) photo@newsis.com
【광주=뉴시스】배동민 기자 = "심각한 중환자였는데,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방치됐어요. 그리고 다음날 사라졌어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때 광주교도소 의무과에 근무했던 민경덕(69) 전 교도관은 11일 뉴시스와 전화 통화에서 그해 5월 참혹했던 교도소 내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민 전 교도관은 '광주사태시 소요체포자 치료현황' 문건을 작성한 광주교도소 의무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이 문건에는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자행됐던 1980년 5월21일 두 차례에 걸쳐 (데모대 체포자 중)중환자 54명과 (소요체포자 중)중환자 89명에 대해 응급조치를 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치료 현황은 같은 해 6월26일까지, 소요체포자 중 1496명의 환자를 치료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다만 5월22일 이후 기록이 '소요체포자 중 중환자 또는 부상자 000명'으로 명시, 중복 환자까지 포함된 것으로 보여 첫날 143명을 제외하고는 정확한 인원을 확인하긴 어렵다.
이에 대해 민 전 교도관은 "첫 날 저녁부터 밤까지 군용 트럭이 수차례 드나들며 시위대를 쏟아냈다"며 "의식을 잃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없어 창고로 옮겼다"고 설명했다.
당시 부상자들의 상태는 심각했다.
민 전 교도관은 "화상 환자가 많아서 거즈나 붕대를 많이 썼다. 2~3도 화상으로 꽤 심각한 수준이었다. 치료를 위해 다가가면 최루탄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을 못 뜰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화상 환자는 전남대에서 광주교도소로 이송 당시 시위대를 실은 차량에 계엄군이 화학탄을 떠뜨렸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어 "첫날 이외에 새로운 부상자가 실려들어온 것을 보거나 듣진 못했다"며 "아마 기록에 남아 있는 부상자 치료 숫자는 중복 집계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문건 기록에서 첫날 143명이었던 치료 인원은 다음날 96명으로 크게 줄었다. 47명이 하룻밤 사이 사라졌는데, 민 전 교도관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이들은 치료를 받고 부상을 회복했거나 치료 중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5월23일, 응급치료를 받은 중환자가 112명으로 늘어난 점을 감안할 경우 턱없이 부족한 의료 인력 때문에 부상자들에게 제때 필요한 치료가 이뤄지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 민 전 교도관은 "첫 날 치료에 동원된 의무직원은 의무과장과 남자 간호사, 교정직 공무원 등 4명이었다. 여기에 군의관 1명이 지원나왔다. 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중위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다음날부터 2명이 더 지원됐지만 의료 인력 부족은 그대로였다. 전문의료기관이 아니다보니 중상자들을 치료할 시설이나 의약품도 없었다. '치료현황' 기록에서 사용된 의약품은 해열진통제(살소노바킹주), 과산화수소수(옥시풀), 소독약(머큐롬) 등 기초약품들 뿐이었다.
민 전 교도관은 "부상자가 워낙 많으니까 나 같은 경우에도 치료에 투입됐다"며 "할 수 있는 게 응급처치 뿐이었다. 당시 기준에서 보더라도 제대로 된 치료가 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거의 죽기 직전의 상태였지만 방치되기도 했다.
그는 "첫날 치료를 제대로 못하고 다음날 아침에 가보니 어떤 사람이 몸을 못 움직이니까 그런건지 누운 채로 대소변을 봤더라. 그 정도로 심각한 수준의 부상자가 더러 있었다"며 "다음날에는 그 환자를 찾을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암매장 가능성에 대해 그는 "철조망으로 둘러쌓여 있던 교도소 내 전체 부지가 3만평 가량 됐다"며 "교도소 안에 암매장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얘기가 돌았던 적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교도소 근처 흙산이 있었는데 그곳에 시신을 암매장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며 "5·18 이후 현장에서 확인했지만 아마 것도 나오진 않았다"고 덧붙였다.
한편 광주교도소는 1971년 북구 문흥동 10만6000여㎡의 부지에 건립됐다. 1980년 5월에는 2700여명의 재소자가 수용돼있었고, 교도관 322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5·18 당시 다수의 시위대가 체포돼 이곳에서 조사를 받았으며 일부 사망자들의 암매장 장소로 지목되기도 했다. 지난 2015년 10월 44년간의 문흥동 시대를 마감하고 삼각동으로 옮겼다.
guggy@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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