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11972.html?_fr=mt2

“독도의용수비대원이 33명? 완전히 날조됐다”
등록 :2017-09-21 15:24 수정 :2017-09-22 11:12


서기종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장 거실 벽에 독도 사진 초대형 액자가 걸려 있다.

[한겨레21] 
10월 기념관 개관 앞두고 생존 대원 서기종 동지회장 주장…
정부 공식기록 ‘3년8개월 33명’, 홍순칠 수비대장 등이 뻥튀기한 수치

조선 후기에 안용복이 있었다면 1950년대엔 독도의용수비대(대장 홍순칠)가 있다. 역사가 기억하는 ‘독도를 지킨 영웅들’인 독도의용수비대는 ‘의용’이란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민간인들이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1950년대 울릉도에 사는 제대 군인들이 주축이 되어, 일본에 맞서 자발적으로 독도 경비에 나선 순수 민간단체다. 한국 정부는 독도의용수비대에 대해 “3년8개월(1953년 4월20일~1956년 12월30일) 동안 33명의 대원이 활동했다”고 기록한다.

이 기록이 엉터리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있다. 독도의용수비대 생존 대원인 서기종(88)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장이다. 그는 1950년대 당시 독도의용수비대 현장책임자(서기종의 증언)이자, 홍순칠 대장이 1984년 쓴 청원서에 등장하는 ‘제1전투대장’이다. 서 회장은 이런 공적을 인정받아 보국포장과 보국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현재 정부가 인정하는 공식 역사인 독도의용수비대의 활동 기간(3년8개월)과 대원 수(33명)가 날조됐다고 말한다. 활동 기간이 부풀려졌고, 대원 33명 중 절반가량은 ‘가짜’라는 것이다. 한국전쟁 참전 국가유공자이자 독도의용수비대 국가유공자인 그는, 왜 굳이 ‘영광스러운 역사’를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독도의용수비대 기념사업회는 10월 울릉도 독도의용수비대 기념관 개관을 앞두고 있다. 기념관은 의용수비대원 33명의 3년8개월간 활약상을 입체적으로 전시한다는 계획이다. 총사업비 129억원이 투입된다. <한겨레21>과 만난 서기종 회장은 “관심 없다”며 “완전 엉터리”라고 말했다. _편집자

독도엔 동도와 서도, 두 섬이 있다. 거실에 덩그러니 걸린 초대형 액자엔 독도 사진이 담겨 있었다. 그 반대편엔 독도 사진의 10분의 1도 안 되는 크기의 훈장 하나가 액자로 걸려 있다. 1953년 6월25일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전쟁 3년을 맞아 수여한 참전 무공훈장이다.

젊은 혈기와 정의감에 독도로

‘1948년 국방경비대에 입대. 6·25가 터진 해 1950년 충북 제천 전투에서 오른쪽 흉부 관통상. 이후 무공훈장 수여. 1954년 상사로 제대. 제대 직후 고향 울릉도로 귀향. 일본의 침탈에 맞서 독도의용수비대 현장책임자로 활약.’ 그의 20대를 관통하는 정신은 ‘나라를 위한 헌신’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젊은 혈기와 정의감으로 ‘갈매기똥 섞인 빗물’을 식수로 마셔가며 버텼던 독도의용수비대 활동은 각별한 기억으로 가슴에 남아 있다. 지난 8월30일 오후 3시 울산 중구 자택에서 <한겨레21>과 얼굴을 마주한 서기종(88) 독도의용수비대(이하 수비대) 동지회장은 한평생 마음에 품고 살았던 자부심을 드러냈다. “자꾸 독도, 독도 해쌌는데, 솔직한 말로 6·25 사변 나가지고 한국이 이북에 뺏기는 상황에서 아무도 독도, 신경도 안 썼어요. 내가 자부하는 건 말이야 우리가 있었으니까 일본한테 독도 안 뺏기고 했다, 이 말이지.”

6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1954년 8월1일, 고향 울릉도로 돌아왔다. 고향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우린 독도에서 이제 다 살았다 이거야. 일본 사람들이 마음대로 와서 미역 뜯어가고 못살게 한다는 거야. 전복도 따고, 소라도 따고, 미역도 따고, 오징어도 잡아야 하는데. 일본에 바다를 반을 내주는 거랑 같다는 거라.”

그러던 어느 날, 동갑내기 홍순칠이 그를 다방으로 불러냈다. 그는 대뜸 “수비대 대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서 회장은 “당신이 대장으로 있는데 뭔 대장이 또 필요하냐고 했더니 자기는 독도에 (자주) 못 간다. 보트랑 식량을 조달해야 하니 현장책임자를 맡아주면 어떻겠냐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덜컥 제안을 수락했다. “젊은 혈기” 때문이었다. 서 회장의 부모는 어민이 아니었다. 옥수수·감자 농사로 4남3녀를 길렀다. 가족들 생업이 걸린 일도 아니었지만, 그저 남 일 같지 않았다.

일본과 한국의 독도 영유권 분쟁은 1951년 9월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연합국과 일본이 체결한 대일강화조약에서 시작됐다. 조약 제2조는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거문도·울릉도를 포함하여 모든 권리 및 권원의 한국에 대한 청구를 포기한다”고 적혀 있다. 일본이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영토에 독도가 명기되지 않은 것이다.

“갈매기 똥물 받아먹으며 지켰다”

이듬해인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조약이 발효되며 미국의 일본 점령이 끝났다. 그 무렵부터 일본의 독도 인근 불법 어로가 본격화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1월18일 독도를 영해로 포함하는 ‘이승만 라인’(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을 선포했다. 일본은 이에 거칠게 반발했다. 일본 어민이 이승만 라인을 넘어오면, 한국 정부는 이들을 나포했다. 한국 외교부의 <독도문제개론>(1955)엔 독도 문제가 양국 간 영토 문제로 떠오르던 시기 양쪽이 주고받은 항의각서가 정리돼 있다. 이 기록에 수비대는 등장하지 않는다.

서 회장은 수비대가 1953년 4월20일 독도에 상륙했다는 공식 역사부터 잘못됐다고 말했다. 창설 시점은 1954년 5월 무렵이라는 것이다. 그가 1954년 8월 독도에 처음 상륙한 날, 동료 5~6명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서 회장이 “당신들은 언제 들어왔냐”고 물었다. 그들은 “민의원 선거 때 홍순칠 대장이 중도 사퇴하고 나서 들어왔다”고 답했다. 민의원(국회의원) 선거는 1954년 4월7일~5월20일 열렸다. 당시 홍순칠은 경북 울릉군(제34선거구) 선거 무소속 후보로 등록했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료).

수비대 창설 시점을 1954년 5월 무렵으로 볼 만한 또 다른 정황이 있다. 1954년 4월25일 울릉군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동아일보> 1954년 5월6일치 보도는 “4월 하순경 울릉도민이 자력으로 일본인 침범을 막기 위해 조직하기로 결의한 독도자위대에 대해 백두진 당시 국무총리가 5월3일 내무부 장관에게 적극 추진하도록 지시했다”고 설명한다. 독도자위대가 수비대의 원형이며 그 창설 시기는 일러야 1954년 4월 말로 추정할 수 있는 정황이다.

수비대 활동 시기와 관련해 정부의 공식 역사는 ‘1953년 7월12일 일본 순시선 격퇴 사건’을 수비대의 주요 공적으로 언급한다. 하지만 <독도문제개론>은 이 사건에 대해 “한국인 보호와 일본인 감시차 울릉경찰서 경찰관 3명으로 구성된 순라반이 독도 근처에 정박한 일본 순시선 책임자를 면담하고 돌려보냈다”고 적는다. 이 사건을 수비대가 아닌 경찰의 업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수비대 활동에서 가장 힘든 건 ‘물’이었다. “(감시 활동을 하는) 동도에서 (민물이 나는) 서도로 넘어가 물을 길어와야 하는데 파도가 거세 빗물로 해결해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도엔 갈매기들이 워낙 많아, 드럼통으로 받아 끓여 먹은 빗물은 갈매기 똥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서 회장은 “울릉군에서 쌀·김치·된장을 지원했고, 울릉경찰서가 각종 무기와 배삯(기름값 등)을 댔다”고 말했다. ‘홍순칠 대장이 사재를 털어 무기를 구입하지 않았냐’는 물음엔 “그런 건 없었다”고 단언했다. 이 또한 ‘홍순칠 주도로 창설자금 300만원을 (사재로) 마련해 무기와 장비를 마련했다’는 공식 역사와 다른 부분이다.

3년8개월 아닌 8개월

독도의용수비대 해산 시점에 대해서도 서 회장의 증언과 공식 역사는 다르다. 공식 역사는 1956년 12월30일 독도의용수비대가 해산했다고 기록했지만, 서 회장은 “1954년 12월31일자로 의용수비대 9명이 경찰로 특채되며 수비대는 해산돼버렸다”고 말했다. 그를 포함한 독도의용수비대원 9명은 1954년 말 울릉경찰서 경찰관으로 특채됐다. 이 내용은 1978년 3월30일 경북 경찰국 보고서에 담겨 있다. 특채된 이들 가운데 서기종·정원도·황영문은 독도의용수비대에서 각각 제1전투대장, 제2전투대장, 부관으로서 중책을 맡던 인물들이다. 서 회장은 이후 1956년 4월23일까지 울릉경찰서 울릉경비대 소속으로 근무했다. 이 시기 독도 경비를 담당한 것은 경찰이었다. 서 회장은 “특채로 뽑힌 수비대 출신 경찰들과 기존 경찰들이 교대로 독도 경비에 투입됐다”고 말했다.

논란거리는 활동 기간만이 아니다. 곧이어 ‘가짜 대원’이 생겨난다. 가짜 수비대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66년 무렵이다. 이런 잡음이 생겨난 것은 수비대 활동에 대한 서훈 움직임이 시작되면서였다. 자격 없는 사람을 대원에 넣다보니 활동 기간이 제멋대로 늘어나게 됐다.

어느 날 동료 대원 정원도가 당시 부두노동조합에서 일하던 서 회장 집에 찾아왔다. 대뜸 “순칠이가 서울에서 직업 하나를 구해준다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한사코 거절했지만 성화에 못 이겨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의 한 여관방에 11명가량 모였다. 이 자리에서 홍순칠은 “훈장을 받으러 청와대로 간다”고 말했다. “그중 절반 이상은 독도에 가보지도 않은 사람들”이었다. 처음엔 ‘훈장 따위 필요 없으니 울릉도로 다시 내려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원도의 청에 못 이겨 청와대로 향했다. 1966년 4월12일 홍순칠은 보국훈장을, 나머지 10명은 보국포장을 받았다.

1965~66년 독도 영유권 분쟁은 치열했다. ‘굴욕적’인 한-일 협정에 서명한 박정희 정권은 야당과 언론으로부터 ‘한-일 협정에서 독도 영유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수비대 11명에 대한 서훈은 그런 정치적 배경에서 갑작스레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국내외에 독도 영유권 수호 의지를 간접적으로 표명하는 효과를 누렸다.

11년 뒤 홍순칠은 추가 서훈을 청원했다. 홍순칠은 1977년 12월24일 총무처 장관(현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보낸 청원서에서 수비대 나머지 22명에게도 추가 서훈을 해달라고 했다. 경상북도 경찰국은 사실조사에 착수했다. 1978년 3월30일치 ‘청원서 사실조사 보고서’를 보면, 경찰국은 홍순칠이 제출한 독도의용수비대원 명단 총 33명 가운데 15명만 공적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심지어 1966년 4월 이미 보국포장을 받은 의용수비대원 중 3명(김병열·유원식·한상용)조차 당시 거주지, 직책, 직업 등을 근거로 볼 때 ‘독도 경비 사실이 없다’고 조사해 보고했다. 홍순칠이 이런 청원을 넣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경찰국 보고서는 이에 대해 “명단 33명 중 홍순칠의 처 박영희가 포함돼 있어 이 사실을 알게 된 당시의 대원이나 주민들은 자기 처를 훈장 받게 할 목적으로 제출한 것이라고 한결같이 비난하고, 공적은 없이 포상 받은 김병열·유원식·한상용 3명의 방위포장은 당연히 반납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음”이라고 보고했다. 홍순칠의 추가 서훈 청원은 결국 무산됐다.


서기종 회장의 한국전쟁 무공훈장(왼쪽)과 독도의 용수비대 활동 때 모습. 오른쪽 사진 가운데 위가 서기종.

2007년 감사원 발표 ‘실제 활동 인원 17명’

들쭉날쭉했던 수비대 활동 규모에 대한 기록이 굳어진 계기는 1983년 수비대 창설 30주년 기념식을 전후해서다. 그 무렵부터 ‘3년8개월, 33명 활약’이 공식 기록으로 굳어졌다. 당시 홍순칠은 울릉도를 떠나 경북 경주에서 젖소 목장을 운영하던 서 회장을 찾아왔다. 그는 기념식 얘기를 꺼내며 “인원수가 적으니 좀 늘리자”고 했다. 서 회장이 “그럴 순 없다”고 거부하자, 두 번을 더 찾아왔다. 서 회장은 “이러다 목장 사업에 지장을 줄 것 같고 귀찮기도 해 ‘정원도한테 물어봐라, 거기가 그리한다고 하면 나도 따라간다’”며 돌려보냈다. 1983년 7월25일 내무부 장관 초청으로 울릉도에서 열린 기념식 식순 자료에서 서 회장은 33명 명단을 처음 확인할 수 있었다. 명단에 홍순칠의 처 박영희씨가 포함돼 있었고, 독도에 가보지도 않은 김병열씨가 사회를 보고 있었다. 서 회장은 “그때 끝까지 반대하지 않은 게 늘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그 뒤 홍순칠과 그의 처 박영희는 ‘3년8개월, 33명’으로 각종 청원서·진정서를 작성했다. 홍순칠이 독도수비대동지회 이름으로 1984년 7월10일 국가보훈처장(당시 원호처장)에게 제출한 ‘독도의용수비대원 생계협조 청원서’와, 박영희가 1996년 3월14일 김영삼 대통령 앞으로 보낸 ‘독도의용수비대 33명 유공자 인정 요청’ 진정서가 대표적인 예다. 박영희가 진정서를 제출한 지 한 달 만인 4월6일 수비대 33명에게 보국훈장이 수여됐다. 서 회장도 그 무렵을 기억한다. “훈장 받기 전날 경주보훈지청에서 전화가 와서 훈장 받으러 갈 때 모시겠다”고 전해왔다. 그는 전화를 받은 뒤 다시 훈장을 받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에토 다카미 일본 총무청 장관의 “식민지 시대에 일본이 한국에 좋은 일도 했다”는 망언과 김영삼 대통령의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발언 등으로 마찰을 빚었다. 1996년 1~3월엔 한국 정부의 독도 접안시설 공사계획에 대해 일본이 맹반발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를 통해 독도 문제가 다시 한번 전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됐다. 그 와중에 33명에 대한 추가 서훈이 전격 결정된 것이다.

감사원은 2007년 4월12일, 1996년 이뤄진 수비대 33명에 대한 추가 서훈이 절차적·내용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서훈 과정에서 법률상 규정된 공적심사위원회 공적 심사가 누락됐고, 현장·사실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으며, 감사 과정에서 생존 대원 11명을 면담한 결과 33명 중 실제 독도에서 활동한 사람은 17명뿐’이라는 증언이 나왔다고 발표했다. 감사원은 국가보훈처의 면밀한 공적 재심사 및 조치와 (활동대원 수 33명, 활동 기간 3년8개월을 명기한) 수비대 지원법 개정 검토 방안을 강구하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 독도의용수비대 진상규명위원회는 2008년 2월21일 “명백한 반증자료가 있지 않는 현재 기록을 뒤바꿀 수는 없다”고 밝혔다. 각 대원들의 병적·경력 증명서, 경북 경찰국 보고서, 외교부의 <독도문제개론> 등을 반증자료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9월14일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2008년 진상규명위 조사 이후 수비대 공적에 대한 재조사는 없었다”고 말했다.

독도를 둘러싼 뒤틀린 애국주의

서 회장은 “당사자가 8개월 활동했다는데 있는 그대로 (기록)해줘야지, 국가보훈처가 가짜 얘기만 듣고 진짜 얘기는 안 듣는다, 화가 난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3년8개월 활동했다고 하면 좋지 왜 8개월을 고집하냐고 하는데 내가 활동한 것은 그것뿐이다. 3년8개월, 33명은 완전히 엉터리다.” 그의 집엔 1966년, 1996년 수비대 공적으로 받은 보국포장과 보국훈장이 없다.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도 알지 못하지만, 그 역시 찾을 생각이 없다. 독도를 둘러싼 뒤틀린 애국주의가 잉태한 한국 현대사의 기묘한 풍경이다.

울산=글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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