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w.aspx?CNTN_CD=A0002360615
팔뚝에 '반공' 문신, 유엔군의 '치졸한' 꼼수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29] 정전회담
17.09.20 15:08 l 최종 업데이트 17.09.20 16:23 l 글: 박도(parkdo45) 편집: 김지현(diediedie)
1952. 4. 판문점 정전회담장(왼쪽 흰색이 공산 측 막사, 오른쪽 검은 색이 유엔군 측 막사).ⓒ NARA
휴전협정이냐, 정전협정이냐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한 역사적 사건인 '정전협정'에 대한 용어가 2개로 혼용되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여러 문헌을 들춰보니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를 평소 친분이 두터운 동북아역사재단 장세윤 수석연구위원에게 문의하자 "영문협정서에는 'Armistice Agreement'로 돼 있는데,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정전협정'이 더 정확하다"라는 답변이었다.
또 다른 한국전쟁 전문 역사학자 박태균(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역시 <역사용어 바로 쓰기>(역사비평사 발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에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조인된 협정이 한글 문서상에서 '정전협정'으로 규정된 점은 중요하다. 또한 협정의 내용에는 협정이 발효된 이후 90일 이내에 정치적 협상을 하도록 규정하였기 때문에 전투 행위의 전면적인 중지를 선언한다는 의미의 '정전'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정전회담으로 쓰되 이미 굳어진 말, 예를 들면 '휴전선' '휴전회담 반대' 등은 그대로 쓰겠다.
1951. 11. 27. 판문점 정전회담장에서 북한 측 장평산 대표와 유엔군 측 머레이 대표가 지도를 펴고 휴전선 획정을 협의하면서 선을 긋고 있다.ⓒ NARA
정전협상 테이블 전투
소련대사 말리크의 정전협정 제안에 국제 여론 역시 대체로 조속한 종전 방향으로 흘러갔다. 말리크의 연설이 있은 지 그 얼마 뒤인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최초의 정전회담이 열렸다.
그러자 전선은 더욱 소강상태로 양측은 북위 38선을 마치 톱질하듯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지루한 전쟁을 이어갔다. 그러자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애꿎은 병사들과 백성들만 희생되고 있었다.
휴전회담이 열리자 이승만 대통령은 완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전국에서는 연일 휴전반대 관제 데모가 일어났다. '통일 없는 휴전은 있을 수 없다'면서 학생들까지 나섰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철저히 묵살했다.
개성에서 정전회담이 열리자 곧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은 본회담 시작 17일 만에 5개 항의 의제와 의사일정에 전격 합의했다.
951. 7. 11. 서울, 서울시민들이 덕수궁에서 정전회담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NARA
1953. 6. 11. 부산, 학생들이 정전회담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 NARA
한 서방기자는 한국전쟁 정전회담 취재차 3주간의 출장명령을 받고 한국에 왔다. 그만큼 서방 대부분 나라는 한국전쟁의 정전회담은 매우 쉽게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이었다. 막상 정전회담에 참석한 양측은 서로 전장이 아닌, 정전협상 테이블에서만은 자기네가 이기고 싶었다.
특히 세계 최강을 자부했던 미국은 그들이 형편없이 깔보던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은 자체를 치욕으로 느꼈다. 그래서 미국은 그들의 구겨진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정전회담에서 상대방에게 줄곧 무리한 요구를 했다.
1951. 10. 11 정전회담 양측 실무자들이 지도를 펴놓고 휴전선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 NARA
공산 측 "포로송환 제네바 협정대로 하자"
한편 중국도 이참에 그동안 국제 사회에서 '종이호랑이'로 실추된 그들의 자존심을 되살리고자 미국의 무리한 요구를 즐기면서 일축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정전회담장에서 미국과 대등하게 팽팽한 줄다리기하는 모습을 서방기자에게 보여주며, 이 기회에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慢慢的)를 마냥 즐겼다. 세월은 언제나 자기네 편이라는 몸에 밴 아주 느긋한 자세로.
그러자 정전회담은 전쟁을 멈추기 위한 회담이 아니라, 교전국의 체면을 세우기 위한 또 하나의 치열한 전쟁터가 됐다. 그래서 한국전쟁 정전회담은 그 어느 전쟁의 강화회담보다 매우 지루하고도 잔인하게 그리고 장기간 계속됐다.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이 정전협상 5개 항 가운데 가장 오랜 시일을 끈 난제는 제4의제인 전쟁포로 처리문제였다. 정전회담 제1의제는 의제 선택과 의사일정 문제로, 협상 13일 만에 쉽게 타결했다. 제2의제 군사분계선 문제는 4개월간 줄다리기 끝에 쌍방은 지상의 현 전투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고, 이를 중심으로 남북이 각 2km씩 후퇴해 비무장지대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1951. 7. 31. 개성. 북한군 측 경비병.ⓒ NARA
제3의제인 정전 감시조항과 실시기구의 구성, 권한 및 직책 문제도 협상 6개월여 만에 타결을 봤고, 제5의제인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방안도 협상 21일 만에 타결됐다. 사실 제4의제 포로 송환문제는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가장 쉽게 타결될 문제였다.
제네바 협정 제118조에는 "적극적인 적대 행위가 끝난 후에 전쟁포로들은 지체 없이 석방, 송환돼야 한다"라고, 포로의 자동송환 원칙을 밝히고 있었다. 그런데 유엔군 측은 이 의제에 대해 느닷없이 포로의 일대일 교환과, 포로 본인의 의사에 따른 '자유 송환'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나섰다.
하지만 공산 측은 이는 제네바 협정 위반으로 포로들의 전원 송환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자 정전협상 의제 가운데 이 문제는 최대 암초로 떠올랐다.
1953. 7. 25. 판문점, 정전회담 본회의장.ⓒ NARA
정전회담, 결렬되다
유엔군 측이 자유 송환을 계속 들고 나온 것은 공산군 측 포로들이 본국으로 송환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세계 여러 나라에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함과 아울러 북한과 중국의 체면을 구김으로써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명예로운 마무리를 하고 싶은 속내였다.
게다가 유엔군 측에 수용된 공산군 포로는 13만여 명 정도인데 견줘, 공산군 측에 수용된 유엔군 포로는 1만 1000여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유엔군 측은 북한에 억류된 유엔군 포로가 적어도 5~6만 명은 되리라는 예상했다. 하지만 이에 크게 미치지 못하자 포로의 일대일 교환과 '자유송환'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유엔군은 자존심 경쟁에 따른 잔류 포로의 확보를 위해 포로수용소 내에서 대대로 전향공작을 펼쳤다. 유엔군은 포로들에게 민간 정보교육과 공민교육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주입시켰다.
팔뚝에 공산주의와 소련을 반대한다고 문신을 새긴 포로들.ⓒ NARA
팔뚝에다 ‘반공항아’(反共抗俄,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러시아에 항거한다) 문자를 새긴 중국군 포로.ⓒ NARA
유엔군은 이 교육을 통해 다수의 친공 포로들을 반공 포로로 전향시켰다. 또 반공 포로로 전향한 자에게는 '멸공통일', '반공'과 같은 글자나 태극기를 팔뚝이나 배, 등에 문신으로 새기게 했다. 이는 나중에 반공 포로들이 변심해 고향에 가려고 해도 문신 때문에 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치졸한' 조치였다.
그런 가운데 정전회담장에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포로 송환문제를 둘러싸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계속했다. 양측은 서로 상대를 압박하고자 무력 공세도 서슴지 않았다. 유엔군은 폭격기로 북한의 수풍, 장진댐을 비롯한 수력발전소를 폭격했고, 그밖에 군수공장에도 폭탄을 쏟아부었다. 공산군도 이에 맞서 지상공세를 강화하자, 정전회담 기간 중 전선에서는 포로로 잡힌 병사보다 훨씬 더 많은 병사들이 죽어갔다.
1951. 9. 4. l 미 해군 전투기가 북한 진지에 폭탄을 투하하고자 항공모함을 떠나고 있다.ⓒ NARA
'압력펌프 작전'
1951년 8월 공산군 측은 정전회담이 열리고 있는 개성 일대에 대한 유엔군의 야간 폭격에 격분해 정전회담 결렬을 선언했다. 그러자 1951년 9월 6일 유엔군 측 리지웨이 사령관은 이를 타개하고자 회담장소를 바꾸자고 제의해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옮겼다. 하지만 양측 대표들은 회담장소가 바뀌어도 여전히 정전회담장에서 지루한 입씨름만 벌였다.
1952년 5월 무렵 정전회담에서 쌍방은 포로교환 문제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했다. 미국은 그해 11월에 있을 미국 대통령 선거 전에 협상을 마무리하고자 북한에 대한 압박 대응책을 썼다. 그것은 대대적인 북폭이었다. 미국의 폭격은 그해 7~8월 '압력펌프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더욱 강화됐다.
1950. 10. 24. 미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미 해군 전투기가 5인치 로켓포를 북한군 진지에 발사하고 있다. ⓒ NARA
1950. 8. 19. 미 B29 전투기가 청진의 공장지대를 융단폭격하고 있다.ⓒ NARA
"1952년 8월에는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78개 도시와 마을을 집중 폭격하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8월 29일 평양폭격에서만 6천 명이 사망했다. 10월로 접어들자 목표물로 삼을 도시와 산업시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다. …
지상전의 경우 1952년 가을부터 국지전으로 이루어졌으나 곳곳에서 고지를 뺐고 빼앗기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가장 대표적인 혈투가 백마고지 전투였다. 1952년 10월 6일부터 철원 북쪽의 백마고지에서 9사단은 열흘간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격전 끝에 이 고지를 지켰다. 중국군은 1개 사단을 잃었다." -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50년대 1권 309~311쪽 축약
이런 가운데 전쟁 당사국들은 정전회담을 조속히 매듭지어야 하는 화급한 사정이 발생했다.
1952. 12. 18. 치열한 전투로 최전방 참호와 교통호 일대가 불모지 화되었다.ⓒ NARA
아이젠하워의 등장과 스탈린의 사망
미국에서는 1952년 말 대통령선거에서 아이젠하워가 당선하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아이젠하워는 군 출신이지만, 대통령선거에서 한국전쟁의 종전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다. 미국인들은 1.4 후퇴의 악몽을 잊지 않고 있었던 터라, 아이젠하워의 대선 종전 공약은 설득력이 있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출범하지마자 한국전쟁을 끝내고자 적극 노력했다. 아이젠하워는 취임 전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전선을 조용히 시찰하기도 했다. 그런데다가 소련은 1953년 3월에 스탈린 수상이 사망했다. 스탈린 사망은 소련의 미국에 대한 냉전 분위기를 완화시켰다.
중국 역시 내전을 마친 지 1년 만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라 피폐한 국내 사정은 마냥 한국전쟁을 오랫동안 끌게 할 수 없었다. 북한지도부도 미군의 집요하고도 오랜 폭격으로 정신적 공황에 빠진 데다가 북한 주민들의 동요도 심상치 않았다.
1952. 12. 4.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에 앞서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있다. 뒤에 탄 사람이 클라크 주한 유엔사령관이다.ⓒ NARA
이런 상황에서 1953년 5월, 공산군 측은 유엔군 측의 주장을 반영한 포로교환 수정안을 제시했다. 그 수정안은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는 중립국 포로송환위원회에 넘겨 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수정 포로교환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비로소 정전회담의 최대 난제가 해결될 실마리가 보였다.
마침내 1952년 4월 8일부터 공산 측의 요구에 따라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는 포로들의 송환여부를 묻는 분리심사가 실시됐다. 그때부터 포로들은 저마다 'S'(South, 남)냐, 'N'(North,북)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섰다.
포로들이 남을 선택하면 그 순간부터 그는 반공 포로로 분리 수용됐다. 반공 포로들은 거제도를 떠나 부산, 마산, 영천, 광주, 논산 등 5개의 별도 포로수용소로 분산 수용됐다. 북쪽을 선택한 친공 포로들은 거제도포로수용소에 그대로 남거나 거제도 남쪽 용초동 포로수용소으로 갔고, 본국 송환을 거부한 중국군 반공 포로들은 제주 모슬포 포로수용소로 갔다.
(* 이 연재는 다음 회로 끝날 예정입니다.)
1951. 10. 11 정전회담 양측 실무자들이 지도를 펴놓고 휴전선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 NARA
1953. 9. 21. 판문점 정전회담장에서 중립국감시단들이 원탁회의를 하고 있다(체코, 스웨덴, 폴란드, 스위스 대표 등).ⓒ NARA
1953. 4. 8. 유엔군 측 대표 다니엘 제독이 정전회의 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NARA
1951. 7. 18. 개성, 북측 정전회담 대표(남일)가 회담장에 도착하고 있다.ⓒ NARA
덧붙이는 글 | * 필자는 <개화기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 이어 <미군정 3년사>를 곧(10월 중 예상) 출간할 예정입니다. 이 책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덮여진 미군정 3년사와 이제까지 공개되지 않은 비장의 사진도 소개될 예정입니다.
'근현대사 > 한국현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전쟁 이미지 복원 22] "북한 공격" 고집이 불러온 결과, '중국 참전' - 오마이뉴스 (0) | 2017.09.23 |
---|---|
[한국전쟁 이미지 복원 28] 포로수용소 안에서 벌어진 전쟁, 미군도 손을 들었다 - 오마이뉴스 (0) | 2017.09.23 |
[제주4·3사건] ③ 산사람한테 쌀 한 줌 줬다고 빨갱이 낙인 - 노컷 (0) | 2017.09.23 |
[제주4.3사건] ② 새벽에 붙잡혀 '무기징역형'…4·3 끝나도 옥살이 - 노컷 (0) | 2017.09.23 |
[한국전쟁 이미지 복원 30 - 마지막] 전쟁 포화 아래서도 해맑은 아이들, '슬프지만 아름다운' - 오마이뉴스 (0) | 2017.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