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w.aspx?CNTN_CD=A0002350058

맥아더가 북한에 알려준 '투항의 네 가지 방법'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19] 대한민국의 명운, '워커라인'에 달렸다
17.08.15 10:40 l 최종 업데이트 17.08.16 15:36 l 글: 박도(parkdo45) 편집: 김지현(diediedie)


1950. 8. 다부동전투에서 미 B-29 폭격기들이 북한군 진지 배후지인 왜관 약목 구미 일대에 이른바 ‘융단폭격’으로 폭탄을 염소가 똥을 쏟듯이 지상으로 무차별 투하하고 있다.ⓒ NARA

유엔군, 낙동강까지 후퇴하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한 달 조금 지난 7월 말. 그때 인민군은 대구와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대와 제주도를 남겨두고, 남한 전 지역의 약 90%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 무렵 한반도 지상은 인민군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과 바다의 사정은 달랐다. 유엔군은 제공권과 제해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개전 초기부터 유엔군, 주로 미군 전투기들은 한반도 전역을 자기네 안방처럼 누볐다. 이들 전투기들은 전방 전투지역뿐 아니라, 후방 깊숙한 북한의 평양 철교를 비롯하여 원산, 함흥 등지의 공장 및 항만시설들을 무차별적으로 타격했다. 그들은 후방(북한지역)에서 낙동강에 이르는 인민군 병참선을 끊고자 날마다 하늘을 까마귀떼처럼 휘젓고 다녔다.

그런 가운데도 김일성은 단시일에 이룬 자신들의 전과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자, 두 차례나 비밀리 남한 점령지를 내려왔다. 그는 "8월 15일까지 남한을 속전속결 해방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 지령에 따라 인민군은 전 전선에서 더욱 총공세로 나왔다. 그 무렵 북한 문화선전성은 남한의 전 점령지에 선전벽보를 덕지덕지 붙이며 독전했다.


NARA 서고 소장 북한 측 노획물에서 찾은 독전 격려 선전 벽보. ⓒ NARA

"적들을 일층 무자비하게 소탕하라! 부산과 진해는 지척에 있다. 승리의 깃발 높이 들고 앞으로! 앞으로!"
"조국을 위하여 모두 다- 전선에로!"

이런 분위기에 인민군의 공세는 속도전으로 사뭇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유엔군은 개전 초기와는 달리 마냥 당하지만은 않았다. 유엔군은 작전상 후퇴 중에도 '최후의 보루'인 부산과 대구를 지키고자 적절한 지연 작전을 펼쳤다. 

그 작전의 하나로 유엔군은 인민군 주력 일부를 호남지방으로 끌어들였다. 이에 인민군 제4사단과 제6사단이 서남방으로 우회해 전북과 전남을 휩쓸며 남하한 뒤 진주·마산 방면으로 동진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유엔군의 양동작전에 인민군이 말려든 셈이었다.


경북 칠곡. 다부동전적지기념관에서 바라본 격전지 유학산의 현재 모습ⓒ 박도

최후의 방어선 '워커라인'

낙동강까지 밀린 유엔군은 8월 1일 저녁, 군 수뇌부 합동작전회의에서 부산과 대구를 교두보로 최후의 방어선인 '워커라인'을 만들었다. 이 방어선은 당시 유엔군 측 작전권을 쥐고 있던 미8군 사령관 월튼 H. 워커(Walton H. Walker 1889~1950) 중장의 이름을 붙였다. 

이 '워커라인'은 마산 서남쪽의 진동을 기점으로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창녕군 남지읍을 거쳐,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왜관, 안동, 영덕을 잇는 선으로 남북 약 135킬로미터, 동서 약 90킬로미터의 네모꼴이었다. 유엔군은 이 '워커라인'을 대한민국의 명운이 걸린 최후의 보루요, 방어선으로 여기고 이곳에 사활을 걸었다. 이 방어선이 뚫리면 대구와 부산은 순식간에 점령당할 처지로 그야말로 백척간두(百尺竿頭)였다. 

1950년 8월 초순, 낙동강 인접 다부동 유학산 일대는 유엔군, 인민군 양측 병력이 총집결하여 대대적인 공방을 벌였다. 인민군은 2개 군단 5개 사단 병력으로 '워커라인'을 돌파하는 남하작전을 폈고, 유엔군은 미 제8군 4개 사단 그리고 국군 6개 사단 병력으로 이를 방어하는 데 총력전을 펼쳤다. 그러자 낙동강을 사이에 다부동 일대에는 양측 병력이 까마귀떼처럼 집결했다. 

8월 4일 새벽, 유엔군은 '워커라인' 방어선을 지키고자 낙동강 모든 다리를 폭파했다. 하지만 이튿날 인민군은 총탄이 빗발처럼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낙동강 도강을 감행해 유엔군의 '워커라인'을 압박했다. 그러자 유엔군은 낙동강 남쪽 강둑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결사적으로 강을 건너오는 인민군을 향해 난사했다. 

인민군 전사들은 유엔군 측의 빗발치는 총탄 공세에 도강치 못하고 북쪽으로 후퇴하는데 그때 미군 전투기들은 낙동강에다 휘발유를 쏟아부은 뒤 거기다가 네이팜탄을 쏘아댔다. 그러자 강물은 삽시간에 온통 불바다로, 인민군 일부는 우왕좌왕 강물 위에서 화마를 입는 생지옥 속에 수장됐다. 하지만 인민군은 유엔군의 그런 불벼락 작전에도 도강을 포기하지 않았다. 

인민군은 지난날 소련군이 썼던 전법으로, 낙동강에다 유엔군이 미처 예상치 못했던 수중교를 가설했다. 그들은 유엔군의 공습이 없는 야간에 수심이 얕은 낙동강 마진나루에다 모래를 넣은 가마니와 드럼통 등으로 강물 속에 다리를 만들었다. 이 수중교는 탱크까지 건널 수 있게 만든 일종의 부교였다. 그들은 이 부교로 도강을 감행했다. 하지만 유엔군은 뒤늦게 이를 알고 전투기 등 온갖 화력을 집중시켜 낙동강 남쪽으로 건너온 인민군을 다시 강북으로 밀어냈다.


1950. 8. 15. 경남 창녕. 남지 철교로 이 무렵은 핏빛 강물이 흘러내릴 만큼 격전지였다. ⓒ NARA

인민군, '워커라인'을 뚫지 못하다

유엔군과 인민군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연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방전을 벌였다. 8월 초순까지 지상전의 주도권은 주로 인민군이 쥐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한동안 양측의 전투력이 서로 팽팽히 맞서다가 날이 지날수록 화력이 우세하고 군수보급이 원활한 유엔군 측으로 점점 기울어져갔다. 인민군은 38선에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오는 동안 약 5만6000명의 병력과 탱크의 8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인민군은 개전 후 단숨에 낙동강까지는 거침없이 내려왔다. 하지만 8월로 접어든 뒤부터는 유엔군 측이 쳐놓은 낙동강 최후 방어선인 '워커라인'을 뚫지 못한 채 거기서 더 이상 남하하지 못했다. 유엔군 측은 이 '워커라인'을 배수진으로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유엔군 인민군 양측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사활을 건 공방전을 계속 벌였다. 그런 가운데 낙동강 다부동전선은 날이 갈수록 전세가 유엔군 측으로 기울었다. 

"급히 먹는 밥은 목이 멘다"는 말처럼, 개전 후 속전속결로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온 인민군은 낙동강 '워커라인'에서 그만 발목이 잡힌 꼴이 되고 말았다. 양측은 다부동 일대에서 한 달 남짓 서로 한 치 양보 없는 지루한 소모전을 벌였다. 

인민군은 유엔군의 폭격으로 병참선이 단절되는 등, 날이 갈수록 점차 전투력이 약해져갔다. 반면 유엔군은 병력과 각종 무기 등 보급품이 잇달아 미국과 일본 등, 세계 각지에서 부산항으로 들어와 전선으로 수송돼 전투력이 나날이 증강됐다.

8월 초순부터 미 제2사단, 미 제1임시해병여단 등, 새로운 전투부대가 부산항을 통해 속속 상륙해 전선에 배치됐다. 8월 하순에 이르자 유엔군 측 병력은 18만여 명에 전차가 600대에 이르렀다. 유엔군은 개천 초보다 병력은 2배 이상 늘어났고, 그동안 한 대도 없던 전차도 그새 신속한 배치로 인민군보다 훨씬 더 많이 보유하게 됐다.


전투기 폭격으로 불타고 있는 마을.ⓒ NARA

'융단폭격'

이때부터 그동안 한반도에서 무소불위의 맹위를 떨쳤던 인민군 소련제 T-34 전차는 점차 위력을 잃었다. 그 무렵 인민군 병력은 9만 8000여 명, 전차 100여 대로 개전 초에 견주어 대폭 줄어들었다. 날이 갈수록 유엔군 측이 더 강해졌다. 게다가 유엔군은 미 공군에다가 미 제7기동함대의 직접 지원을 받자 하늘과 바다는 그들의 독무대였다.

1950년 8월 16일 미 공군 B-29 폭격기들은 다부동전투 배후지에 폭탄을 마구 쏟아부었다. 그게 바로 그 유명한 '융단폭격'이었다. 이날 오전 11시 58분부터 오후 12시 24분까지 26분 동안 왜관 약목 구미 일대 너비 5~6킬로미터 거리 12킬로미터에 걸친 폭격지점에 B-29 폭격기 5개 편대 98대가 약 96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후 미군 비행기는 각종 삐라(선전물)를 산과 들 그리고 마을에 날마다 하얗게 뿌렸다.

"안전보장증명서 북한군 장병에게. 살려면 지금 넘어오시오."
"인민군들은 이미 모두가 포위되었다."
"이미 연합군포로수용소에 있는 그대의 전우들은 잘 먹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또 그들은 재빠른 치료를 받고 있다."


유엔군 측에서 비행기로 뿌린 북한군 투항 권고 전단.ⓒ NARA

SAFE CONDUCT PASS 안전보장증명서

북한군 장병들에게 
살려면 지금 넘어오시오.
1. 밤에 부대를 떠나서 날이 새거든 국제연합군이나 한국군 쪽으로 넘어오시오.
2. 큰 도로나 작은 길을 걸어오시오. 도로나 길이 없으면 들판을 걸어오시오.
3. 손을 머리 위로 들고 이 삐라를 흔들든지, 또는 될 수 있으면 흰 물건을 흔들면서 오시오. 이렇게 하면 국제연합군은 당신이 귀순하는 줄 알고 당신에게 사격을 하지 않을 겁니다.
4. 귀순할 때는 이 삐라를 가지고 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유엔군과 인민군은 1950년 8월초부터 1950년 9월 하순까지 낙동강 유역 다부동 유학산 일대에서 서로 물러날 수 없는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이를 '다부동전투'라 명명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다부동전선의 인민군은 남과 북에서 양면에서 공격을 받게 되자 그만 전의를 잃고 후퇴하기 급급했다. 이로써 다부동전투는 50여 일 동안 피아 약 3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낸 채 그 막을 내렸다.


다부동전적지기념관에 세워진 조지훈의 ‘다부원에서’ 시비로 그날을 증언하고 있다. ⓒ 박도

한 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 조지훈 '다부원에서' 

(* 다음 회는 '인천상륙작전' 편입니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직접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스캔한 원본대로 게재합니다. 사진 이미지가 다소 삐뚤어진 것은 원본 사진이 최소한 50년 전에 현상되었으므로 그 가운데 일부는 몹시 동그랗게 말려 있었기에 바로 펴 스캔하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유엔군 전투기 폭격 뒤 후폭풍 장면.ⓒ NARA


유엔군의 155mm 곡사포가 적진을 향하여 불을 뿜고 있다.ⓒ NARA


유리한 고지를 뺏기 위해 쌍방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NARA


1950. 7. 24. 유엔군 전차가 신작로를 지나가는데 갓을 쓴 노인들은 지팡이를 짚고 유유자적 갓길로 가고 있다.ⓒ NARA


경북 안동. 시가지가 불타는 것을 피란민들이 산 위에서 바라보고 있다. ⓒ NARA


1950. 8. 6. 미군병사들이 부산항 부두에 내려 전선으로 떠날 차비를 차리고 있다.ⓒ NARA


미 해군 전투기가 폭탄을 장전한 채 항공모함을 떠나 북한 진지로 비행하고 있다.ⓒ NARA


유엔군 포대가 전방 전투부대에 지원사격을 맹렬히 하고 있다.ⓒ NARA


미 L-19 정찰기가 적정을 살피고자 전선 상공을 선회하고 있다.ⓒ NARA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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