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65456
"수고하세요" 한글날엔 이 말 쓰지 맙시다
[한글날] 휘청거리는 우리말 우리글, 한글날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자
17.10.09 11:19 l 최종 업데이트 17.10.09 11:19 l 글: 이명수(mysoo501) 편집: 박혜경(jdishkys)
추석 연휴를 앞두고 퇴근하면서 한 직원이 "즐거운 연휴 되세요"라고 말한다. 어법에 맞지 않은 말이지만 흔히 들어서 그런지 이 말이 어색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즐거운 연휴를 지내라는 뜻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
명색이 작가이고 오랫동안 책을 편집하는 일을 해온 사람이라서 그런지 글이나 말의 오류를 발견하는 순간 바로잡아 주고 싶은 생각이 치민다. 일종의 직업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남의 잘못을 모집어 준다는 것은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좋은 뜻으로 말을 해도 듣는 사람의 귀에 거슬리기 때문에 '지적질'로 받아들이기에 십상이다. 접미사 '질'이 붙어 이루어진 단어 중 나쁜 의미의 말이 유독 많다. 도둑질, 고자질, 서방질, 오입질, 갑(甲)질 등등.
"좋은 하루 되세요.", "즐거운 한가위 되세요.", "행복한 명절 되세요."
귀에 익은 말이지만 비문(非文)이다. 이 말을 단순히 풀이하면 화자가 청자에게 '하루', '한가위', '명절'이 되라는 뜻이다. 사람이 어떻게 하루가 되고 명절이 될 수 있겠는가? '어쨌든 뜻만 통하면 되지 뭘 그런 것을 따져?'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의미가 통한다는 이유로 그냥 내버려 두면 우리의 말글살이가 한없이 어지럽혀지고 망가질 것이다.
어법도 법이고 문법도 법이다. 법은 공동체가 지키자고 정해진 것이다. 어법상, 문법상 맞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쓰는 것은 위법인지 뻔히 알면서도 교통법규를 어기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다. 교통법규를 어기면 교통질서가 어지러워져서 사고를 유발한다. 어법 역시 문란해지면 이런저런 사고를 부를 수 있다. 거친 말과 무신경한 말이 씨가 되어 일어난 사고가 그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생활 속에서 잘못 쓰고 있는 우리말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고 할 수 있다. 습관적으로 굳어져 버린 잘못된 표현들도 있고, 혹은 많은 사람이 그렇게 쓰고 있으므로 당연히 옳다고 생각하는 표현들도 있다. 맞춤법, 어휘, 발음, 높임법, 외래어 표기 등에서 잘못 쓰이고 있는 표현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30년 동안 글쟁이 겸 편집쟁이로 살아온 나도 모르는 것투성이고, 헷갈리는 문법이 적지 않다. 저명한 국어학자라 할지라도 국어사전을 꿰듯이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수고하세요" 생각해보면 이상한 인사말
▲ 서울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 김종성
"수고하세요"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쓰고 자주 듣는 말이다. 특히 헤어질 때 인사말로 많이 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남발해서는 결례가 되는 말이다. '수고하다'는 '일을 하느라 힘을 들이고 애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어렵고 고된 일, 즉 고생을 상대방에게 하라고 권할 수 없는 말이다. 사전적 의미와 실생활에서 쓰는 것이 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단어를 많은 사람이 관용적으로 많이 써서 사전적 의미와 다르게 쓰일 수 있지만, 잘못된 표현을 사람들이 많이 쓴다고 해서 그것이 올바른 표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좋고 친근한 인사말도 많은데 하필이면 '고생'하라는 악담을 한단 말인가.
직장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들에게 "수고하세요"라는 말을 쓰는 것은 자연스럽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일 열심히 하라고 독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권장할 인사말은 아니다. 그 상황에 맞는 느낌이 좋고 어감도 좋은 작별인사 말을 생각하여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최악의 용법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수고하세요" 하는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직급도 낮은 사람이 윗사람에게 '일 열심히 하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 상당히 예의에 어긋나는 말이다. 하지만 과거형인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표현은 괜찮다. '고생 많으셨지요?'라는 위로의 뜻으로 해석된다. 일을 하고 들어오실 때 쓰면 적절하다.
"행복하세요", "건강하세요"도 어법에 맞지 않은 대표적인 표현이다. '건강하다, 행복하다'는 형용사이다. 형용사는 청유형이나 명령형으로 활용할 수 없다. 명령형으로 쓸 수 있는 말은 '가다, 먹다, 일어나다' 따위의 동사이거나, '공부, 일, 운동' 따위처럼 '-하다'가 붙어서 동사형으로 쓰이는 낱말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행복하게 지내세요" 하든지, "건강하게 계십시오"처럼 말해야 한다. 다만, "행복하세요?" 또는 "건강하십니까?"라고 물어보는 말, 곧 의문형으로 쓰는 것은 올바른 표현이다.
또한, "행복하소서!"는 어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소서'는 간절한 기원을 나타내는 어말어미이다. '-하시기를(-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의 종결어미가 '-소서'이다. '-소서'는 명령형 어미가 아니므로 형용사에도 붙을 수 있다.
'다르다'와 '틀리다'도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다. 둘은 명백하게 서로 '다른 것'이다. '다르다'는 '같지 않다'는 뜻이며, '틀리다'는 '바르지 않다, 옳지 않다'는 뜻이다. "나와 당신의 생각은 틀리다"라고 말하면 상대방이 '옳지 않다'고 비난하는 뜻이 된다. 내 생각과 내 사고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옳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 속담에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르다"라는 말이 있다. 같은 내용의 이야기라도 이렇게 말하여 다르고 저렇게 말하여 다르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속담이다. 속담에 나타난 그대로 '아'라는 모음을 쓰는 것과 '어'라는 모음을 쓰는 것에 따라 어감뿐만 아니라 의미까지도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무심코 저지르는 말실수를 조곤조곤 설명하면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한다. 그런데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입으로는 잘 안 되는 말도 상당하다. 언어 규칙과는 괴리가 있지만 실생활에서 많이 쓰인다는 이유로 덩달아 쓰는 경우도 있다.
남편을 '오빠' 또는 '아빠'라고 부르는 여자를 가끔 본다. 대단히 잘못된 호칭이다. 남편에 대한 호칭어, 지칭어에 어려움을 느끼는 아내들이 많은 것 같다. 결혼 전의 호칭을 결혼 후에도 그대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는데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듣기에도 거북스럽고, '윤리 도덕을 모르는 사람' 또는 '무식한 사람'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수도 있다.
'아빠'는 유아어이고,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를 직접 부르거나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아버님'은 남의 아버지를 직접 부르거나 지칭할 때,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부르거나 가리킬 때,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쓰는 말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호칭, 지칭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는 경우가 아주 많다.
성인이 되어 시집가고 장가간 사람도 '아빠'라는 유아어를 서슴없이 쓴다. 심지어는 며느리가 깍듯이 모셔야 할 시아버지를 '(시)아빠'라고 부르기도 한다. 철들 나이가 되면 자기 아버지는 '아빠'도 '아버님'도 아닌 '아버지'로 불러야 한다. 이런 구별도 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철부지다. 성인이 되면 의젓하게 어른 말을 써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유아어를 쓰면 생각이나 행동에서 어린이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많다. 제대로 된 호칭은 예절의 기본 요소이다. 자신과 상대편의 나이, 위상, 대화 상황에 걸맞은 호칭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야채=채소? 이렇게 다릅니다
손윗사람에게 반말투로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버릇없고 예절을 모르는 것은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이다. 모든 교육의 시작은 가정에서부터 비롯된다. 문제가 있는 아이 뒤에는 문제를 가진 부모가 있다.
요즘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 경어법의 관습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상도 심각하지만, 그나마 사용하고 있는 존댓말도 그 원칙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존대를 하지 않아도 될 경우에 높임말을 쓰고, 높임말을 안 써야 할 대목에서 필요 이상의 존댓말을 쓰는 경우가 자주 눈에 띈다.
"커피 나오셨습니다. 뜨거우시니 조심하십시오." 커피숍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극존칭 어법이다. 듣기에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어서 더 문제다. '커피'가 주어인 문장에 '나오시다'나 '뜨거우시다'라는 극존칭을 쓰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말끝에 무조건 '-세요'나 '-시'를 붙이면 다 존칭이 되는 줄 아는 사람이 뜻밖에 많지만, 상품을 높이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자고로 과공은 비례라 했다. 지나친 높임말 사용은 오히려 역효과를 줄 때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편집자가 원고를 검토할 때는 그 내용을 의심하고 봐야 한다. 술술 읽히는 문장도 내용이 엉터리일 수 있다. 대충 읽으면 말짱해 보이는 글이 유심히 보면 비과학적이거나 문법에 어긋난 경우가 흔하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일본식 용어나 구문, 일본식 조어, 일본식 한자어를 그대로 직역해 놓은 듯한 일어 번역투와 영어 직역투 문장이 수두룩하다. 번역문의 영향은 우리 사회 지식인들이 쓰는 말과 글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런 사례는 워낙 많으므로 일일이 바로잡을 수도 없는 지경이다.
없어도 그만인 일본식 조어 '-적(的)', 일본어 주격조사 'の'의 남용 등은 심각한 수준이다. 하지만 조사 '-의'를 쓰면 문장이 짧아지고 간결해지는 효과가 있다. 이미 '-의'를 널리 쓰고 있으므로 남발하지 말고 꼭 쓸 곳에 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포용할 것은 포용하고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는 융통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말을 영어 직역투로 쓰는 대표적인 기형 서술어가 '-을 갖는다'는 표현이다. 우리말에서 잘 어울리는 서술어가 있음에도 '가지다', '갖다'를 남용하는 것은 영어의 'have+명사'를 '가지다' 또는 준말인 '갖다'로 단순 번역하는 데 익숙한 탓이다. 가지다는 소유의 개념 외에도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어 두루 쓸 수 있는 단어이긴 하지만, 잘 분별해서 써야 한다. 전시회나 전람회, 박람회, 품평회, 공청회 등은 '한다', '연다', '개회한다'고 하는 것이 옳다. 워낙 난무하는 영어 번역체에 익숙하다 보니 오히려 우리말이 어색해졌다.
출판할 책의 원고 교정을 볼 때 문법과 맞춤법이 많이 틀린 경우는 두통거리다. 보통 빨간 펜으로 교정을 보는데, 교정지가 빨갛게 물든 경우가 많다. 편집자들 사이에서는 여기저기 울긋불긋 빨가면 '딸기밭 교정'이라고 하고, 그 정도가 심하면 '피바다 교정'이라고 한다. 대부분 저자는 편집부 교정에 고마움을 표하지만 가끔 민감하게 반응하는 저자도 있다.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 중 하나는 잘못을 지적하면 기분 나빠한다는 것이다. 한번은 '야채(野菜)'를 '채소'로 교정했더니 저자는 원고대로 '야채'로 해달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자기는 그렇게 배웠다는 것이다. 야채(野菜)는 야생의 상태로 자라는 '들나물'을 의미하고, 채소(菜蔬)는 밭에서 인위적으로 기르고 관리한 식물을 일컫는 말이다.
야채가 흔히 사용되는 이유는 일본식 표현을 그대로 여과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본디 일본에서도 '채소(蔬菜 そさい)'와 '야채(野菜 やさい)'를 구분하여 썼으나, 그들의 상용한자에서 '나물 소(蔬)'자가 빠지면서 산나물과 들나물과 채소를 통틀어 '야채'로 쓴 것이다. '굴착기'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상용한자에 착(鑿)자가 없어 삭(削)을 대용하여 굴삭기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포크레인'은 그 기계를 만든 프랑스 회사의 이름이다.
한번은 "영어는 되고 일본어는 안 됩니까?" 하면서 따지는 저자를 만났다. 글로벌 세상 어쩌면서 영어가 난무하고 동사무소도 '센터'라고 부르는 세상인데, 많은 국민이 저항감 없이 늘 사용하는 단어를 일본어 찌꺼기라고 물고 늘어지는 진짜 의도는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외래어 수용에 편파적인 면이 있다. 영어에는 관대하고 일본어에는 상대적으로 인색하다. 여기에는 일제강점기 때 우리 민족을 고통받게 했던 일본에 대한 복잡한 심경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 사회는 그 시절을 겪지 않았더라도 트라우마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뜻밖에 우리말로 알고 있었던 단어가 일본어에서 차용된 것이 많다. 예컨대 '가방', '구두', '가족'도 일본어에서 차용된 말이라고 한다. 우리말에 깊이 뿌리를 내린 단어가 하도 많으므로 일제 식민 잔재 청산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부지불식간에 일본말을 많이 쓰고 있다. 어려서부터 알게 모르게 번역투의 글에 익숙해 있기에 잘못 사용하거나 곡해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를 보며 전부라고 판단하는 오류도 적지 않다. 이 글에서도 몇 번 사용한 '경어(敬語)'라는 단어도 일본어에서 온 말이니 '높임말' 또는 '존댓말'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보았다. 너무 지나친 감도 있지만 우리말을 찾고 지키려는 그런 노력은 평가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수한 의도에서 국어사전이나 간행물의 잘못된 부분을 자주 지적하는 그런 분들 덕분에 바로잡힌 부분이 적지 않다. '벤토'가 '도시락'으로, '와루바시'가 '나무젓가락'으로 바뀌었듯이 우리가 쓰고 있는 일본말을 제대로 알려주기만 해도 한글 순화에 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고수부지', 신문과 방송이 퍼뜨린 잘못된 말
▲ 훈민정음 한지등. ⓒ 이현정
198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한강변 '고수부지'는 정돈된 한강의 면모를 보이면서 서울 시민의 휴식처로 애용되어 왔다. 그런데 고수부지는 국적 불명의 조어이다. '고수(高水)'는 직역하면 '높은 물'인데, 빈 땅을 가리키는 일본말 '부지(敷地)'를 합하여 나온 말이다. 한강 변의 무질서한 땅들이 새 단장 되었을 때 신문과 방송에서 그곳을 '고수부지'라 불렀고, 그 때문에 사람들이 그 말의 정확한 뜻도 모른 채 따라 쓴 것이 많은 사람이 쓰는 통용어가 되어 버렸다. 요즘은 언론에서 '둔치' 또는 '강턱'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수부지란 말을 즐겨 쓰고 있다. 이처럼 한번 쓰기 시작한 말은 좀처럼 고치기 어렵다는 걸 생각할 때 처음 쓰는 말은 신중히 해야 한다.
현대는 세계화 시대이다. 도도한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지구촌 모든 나라가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세계를 무대로 하는 현실에서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영어 등의 외국어 교육의 필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학업이나 일에 필요하다면 영어, 중국어, 일어 등을 배워야 경쟁력이 있다. 하지만 근본은 우리말이다. 근본인 한국어를 정확하게 말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외국어도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다. 그런데 국어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에게 조기 외국어부터 강요하고 있는 현실이다. 비싼 돈 들여 얼치기를 만드는 교육이다.
그래서인지 날이 갈수록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얼치기 인간들이 넘쳐난다. 요즘 잘못 쓰는 높임말부터 정체불명의 외계어까지 일상에서 우리말을 잘못 쓰는 경우가 셀 수 없이 많다. 엉터리로 표기된 낱말이 너무 많다. 일상에서 외국어를 생각 없이 쓴다. 노래 가사는 태반이 영어투성이다. 그것도 우스꽝스러운 K팝 콩글리시 가사라서 국제사회에서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영어 발음과 철자를 틀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 여기면서 우리말을 잘못 쓰는 것에 창피한 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SNS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심각성이 더하다. 비속어와 은어가 난무하다. 절친, 즐감, 열공, 훈남, 완소, 솔까말 등의 줄임말 표현은 빠르게 전달할 필요성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또래끼리 어울리면서 쓰는 그들만의 은어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 그것도 한때이고 지나고 보면 추억으로 남는다. 성장기 때 사용하는 은어는 어느 시대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웃고 넘기기에는 심한 비속어도 많은 듯하다. 존나, 똘추, 열폭, 담탱이, 개, 처, 레알, 찐찌버거 등 알아듣기 어려운 은어와 욕설이 뒤섞여 시궁창 냄새가 진동하는 외계어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비속어를 습관적으로 쓰면 상스럽고 천박한 사람이 된다.
우리네 말글살이가 날로 거칠어지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교육과 방송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영어 지상주의 교육에 국어가 너무 홀대를 받고 있다. 심지어 영어 철자법에는 자신이 있는데 한글 맞춤법은 어렵다고 무슨 자랑거리라도 되는 듯이 이야기하는 지식인을 본 적도 있다. 그것을 결국 우리말을 소홀하게 생각한 데서 비롯된 결과이다. 영어 공부하는데 썼던 노력과 정성을 10분의 1만 썼어도 그런 말이 나올까?
세계 공용어로 간주하는 영어 교육의 중요성은 공감하지만, 모국어보다 우선시되는 영어 교육은 주객이 전도된 현상이다. 아무리 세계화가 시대적 요청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생활 기반과 터전의 언어 체계는 한국어이다.
인터넷과 방송이 언어 파괴의 주범이라는 말도 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주요 언론이 앞장서서 우리말을 파괴하고 있다. 방송 프로 제목과 신문 제목부터 영어투성이고, 그 내용 속에는 온갖 것들이 잡탕이 되어 있다. 현대 사회에서 언론, 특히 방송이 갖는 영향력은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정확한 표준어가 사용되는 뉴스 프로그램에서 외래어, 외국어가 불필요하게 많이 사용되는가 하면 어법이 틀린 말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오용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언젠가 텔레비전 뉴스를 보는데, 대통령이 방북 '수속절차'를 밟고 있다고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반복했다. '수속'은 우리말 '절차'에 해당하는 일본말이다. '애매'가 일본말이고 '모호'가 우리말인 것과 같다. 텔레비전 자막의 오류도 많이 발견된다. '방방곡곡'을 '방방곳곳'으로, '풍비박산'을 '풍지박삭'으로, '혈혈단신'을 '홀홀단신'으로 잘못 표기하는 예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자막이 틀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말과 글의 전문가 집단에 있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언어 질서를 파괴해 버리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독자와 시청자에게 돌아간다. 방송에서 잘못된 우리말을 지적하지 않고 사용하다 보니 분별없는 국민이나 학생들은 잘못된 말인 줄 모르고 공공연히 사용하는 것이다. 방송 말은 당연히 표준어를 구사하고 한글 맞춤법에 맞아야 한다.
틀린 말도 귀에 익으면 자연스럽게 들린다
어법에 틀린 말도 자주 들으면 자연스럽게 들린다. 귀에 익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들린다고 해서 바른말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자연스러운지 아닌지'가 아니라, 그 표현이 우리말 어법에 맞느냐 아니냐 하는 점이다. 제아무리 많은 사람이 쓰더라도 틀린 것을 바로잡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언어 사용자들이 공감하고 자주 쓰면 표준어나 관용구로 자리 잡을 날이 올 것이다.
예컨대 '자장면'이 표준어임에도 한국어 사용자가 주로 '짜장면'으로 쓰기 때문에 언중의 입말을 존중하여 복수 표준어로 인정되었다. 어법이 언어 대중보다 우선하지는 않는다. 표준어는 중요하지만 생활 속에서 쓰는 말도 중요하다. 표준어에 지나치게 매달려서 표준어와 다르다는 이유로 쓰지 말아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도 좋은 자세는 아니다. 이것은 내가 글을 쓰거나 교정을 볼 때 늘 고민하는 문제이다.
독일의 시인 괴테는 "한 나라의 정신은 말과 글에 있다"라고 했다. 문화의 으뜸이 말과 글이다.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멜 선생님이 우리에게 프랑스어에 대해서 차례차례로 말씀해 주셨다. 프랑스어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분명하고, 가장 완벽한 언어라고. 이를테면 어떤 백성들이 노예의 신분이 되더라도 자기 나라의 국어를 견실하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마치 자기가 갇힌 감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프랑스어를 우리들은 소중하게 지키고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1870년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프랑스가 패하게 되는 바람에 소설 속 주인공이 살던 알자스 로렌 지역에서 프랑스어 사용이 금지되는데, 그 금지되는 프랑스어로 하는 마지막 수업을 어린 학생의 눈으로 바라본 소설이다. 아멜 선생님은 마지막 수업을 마치며 칠판에 '프랑스 만세'라고 적어 놓는다. 이 결말 부분에서 가슴이 찡해 오는 비장한 감동을 받는다.
문화 선진국 프랑스는 '국어 보호법'을 제정하여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모국어를 보호하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거실에 사전을 두고 들춰본다고 한다. 주체성이 있는 민족은 자기의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잘 지킨다. 일찍이 주시경 선생은, 말과 글을 정리하는 일은 집 안을 청소하는 일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집 안이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정신마저 혼몽해지는 일이 있듯이, 우리말을 갈고 닦지 않으면 국민정신이 해이해지고 나라의 힘이 약해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강점기 때 조선어학회 사건과 같은 한글 탄압 정책에도 꿋꿋하게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켜 온 것이다.
자연 생태계가 외래종에 의해 무너지듯이 문화 생태계는 무분별하게 쓰는 말과 글로 말미암아 무너지게 된다. 조야한 언어의 남용은 우리의 정서를 거칠게 하고 사회적 혼돈을 부추긴다. 신문 방송뿐만 아니라 거리의 간판과 상품 이름, 인터넷 포털 사이트도 외국어와 외래어가 넘쳐난다. 교육과 언론이 앞장서서 말글을 오염시키고 있는 관계로 출판도 시나브로 오염되었다. 하물며 자기 이름으로 책을 펴내겠다는 저자들조차 외국어와 외래어를 마구 쓰고 문법이 무시된 글을 쓰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네 말글살이에 종사하는 사람들, 즉 작가와 언론 방송인들은 우리말을 쉽고, 편하고, 아름답고, 세련되게 다듬어야 한다. 그것은 글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책무다. 정지용, 백석 등의 시가 우수한 것은 시 속에서 우리말을 지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말은 그 사람 영혼의 표출이다. 품격 있는 사람은 말도 품격 있게 한다. 하나씩 맞는 표현을 익히고 생활에서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노력할 필요는 있다.
"수고하세요" 한글날엔 이 말 쓰지 맙시다
[한글날] 휘청거리는 우리말 우리글, 한글날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자
17.10.09 11:19 l 최종 업데이트 17.10.09 11:19 l 글: 이명수(mysoo501) 편집: 박혜경(jdishkys)
추석 연휴를 앞두고 퇴근하면서 한 직원이 "즐거운 연휴 되세요"라고 말한다. 어법에 맞지 않은 말이지만 흔히 들어서 그런지 이 말이 어색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즐거운 연휴를 지내라는 뜻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
명색이 작가이고 오랫동안 책을 편집하는 일을 해온 사람이라서 그런지 글이나 말의 오류를 발견하는 순간 바로잡아 주고 싶은 생각이 치민다. 일종의 직업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남의 잘못을 모집어 준다는 것은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좋은 뜻으로 말을 해도 듣는 사람의 귀에 거슬리기 때문에 '지적질'로 받아들이기에 십상이다. 접미사 '질'이 붙어 이루어진 단어 중 나쁜 의미의 말이 유독 많다. 도둑질, 고자질, 서방질, 오입질, 갑(甲)질 등등.
"좋은 하루 되세요.", "즐거운 한가위 되세요.", "행복한 명절 되세요."
귀에 익은 말이지만 비문(非文)이다. 이 말을 단순히 풀이하면 화자가 청자에게 '하루', '한가위', '명절'이 되라는 뜻이다. 사람이 어떻게 하루가 되고 명절이 될 수 있겠는가? '어쨌든 뜻만 통하면 되지 뭘 그런 것을 따져?'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의미가 통한다는 이유로 그냥 내버려 두면 우리의 말글살이가 한없이 어지럽혀지고 망가질 것이다.
어법도 법이고 문법도 법이다. 법은 공동체가 지키자고 정해진 것이다. 어법상, 문법상 맞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쓰는 것은 위법인지 뻔히 알면서도 교통법규를 어기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다. 교통법규를 어기면 교통질서가 어지러워져서 사고를 유발한다. 어법 역시 문란해지면 이런저런 사고를 부를 수 있다. 거친 말과 무신경한 말이 씨가 되어 일어난 사고가 그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생활 속에서 잘못 쓰고 있는 우리말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고 할 수 있다. 습관적으로 굳어져 버린 잘못된 표현들도 있고, 혹은 많은 사람이 그렇게 쓰고 있으므로 당연히 옳다고 생각하는 표현들도 있다. 맞춤법, 어휘, 발음, 높임법, 외래어 표기 등에서 잘못 쓰이고 있는 표현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30년 동안 글쟁이 겸 편집쟁이로 살아온 나도 모르는 것투성이고, 헷갈리는 문법이 적지 않다. 저명한 국어학자라 할지라도 국어사전을 꿰듯이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수고하세요" 생각해보면 이상한 인사말
▲ 서울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 김종성
"수고하세요"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쓰고 자주 듣는 말이다. 특히 헤어질 때 인사말로 많이 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남발해서는 결례가 되는 말이다. '수고하다'는 '일을 하느라 힘을 들이고 애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어렵고 고된 일, 즉 고생을 상대방에게 하라고 권할 수 없는 말이다. 사전적 의미와 실생활에서 쓰는 것이 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단어를 많은 사람이 관용적으로 많이 써서 사전적 의미와 다르게 쓰일 수 있지만, 잘못된 표현을 사람들이 많이 쓴다고 해서 그것이 올바른 표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좋고 친근한 인사말도 많은데 하필이면 '고생'하라는 악담을 한단 말인가.
직장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들에게 "수고하세요"라는 말을 쓰는 것은 자연스럽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일 열심히 하라고 독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권장할 인사말은 아니다. 그 상황에 맞는 느낌이 좋고 어감도 좋은 작별인사 말을 생각하여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최악의 용법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수고하세요" 하는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직급도 낮은 사람이 윗사람에게 '일 열심히 하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 상당히 예의에 어긋나는 말이다. 하지만 과거형인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표현은 괜찮다. '고생 많으셨지요?'라는 위로의 뜻으로 해석된다. 일을 하고 들어오실 때 쓰면 적절하다.
"행복하세요", "건강하세요"도 어법에 맞지 않은 대표적인 표현이다. '건강하다, 행복하다'는 형용사이다. 형용사는 청유형이나 명령형으로 활용할 수 없다. 명령형으로 쓸 수 있는 말은 '가다, 먹다, 일어나다' 따위의 동사이거나, '공부, 일, 운동' 따위처럼 '-하다'가 붙어서 동사형으로 쓰이는 낱말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행복하게 지내세요" 하든지, "건강하게 계십시오"처럼 말해야 한다. 다만, "행복하세요?" 또는 "건강하십니까?"라고 물어보는 말, 곧 의문형으로 쓰는 것은 올바른 표현이다.
또한, "행복하소서!"는 어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소서'는 간절한 기원을 나타내는 어말어미이다. '-하시기를(-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의 종결어미가 '-소서'이다. '-소서'는 명령형 어미가 아니므로 형용사에도 붙을 수 있다.
'다르다'와 '틀리다'도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다. 둘은 명백하게 서로 '다른 것'이다. '다르다'는 '같지 않다'는 뜻이며, '틀리다'는 '바르지 않다, 옳지 않다'는 뜻이다. "나와 당신의 생각은 틀리다"라고 말하면 상대방이 '옳지 않다'고 비난하는 뜻이 된다. 내 생각과 내 사고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옳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 속담에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르다"라는 말이 있다. 같은 내용의 이야기라도 이렇게 말하여 다르고 저렇게 말하여 다르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속담이다. 속담에 나타난 그대로 '아'라는 모음을 쓰는 것과 '어'라는 모음을 쓰는 것에 따라 어감뿐만 아니라 의미까지도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무심코 저지르는 말실수를 조곤조곤 설명하면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한다. 그런데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입으로는 잘 안 되는 말도 상당하다. 언어 규칙과는 괴리가 있지만 실생활에서 많이 쓰인다는 이유로 덩달아 쓰는 경우도 있다.
남편을 '오빠' 또는 '아빠'라고 부르는 여자를 가끔 본다. 대단히 잘못된 호칭이다. 남편에 대한 호칭어, 지칭어에 어려움을 느끼는 아내들이 많은 것 같다. 결혼 전의 호칭을 결혼 후에도 그대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는데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듣기에도 거북스럽고, '윤리 도덕을 모르는 사람' 또는 '무식한 사람'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수도 있다.
'아빠'는 유아어이고,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를 직접 부르거나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아버님'은 남의 아버지를 직접 부르거나 지칭할 때,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부르거나 가리킬 때,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쓰는 말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호칭, 지칭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는 경우가 아주 많다.
성인이 되어 시집가고 장가간 사람도 '아빠'라는 유아어를 서슴없이 쓴다. 심지어는 며느리가 깍듯이 모셔야 할 시아버지를 '(시)아빠'라고 부르기도 한다. 철들 나이가 되면 자기 아버지는 '아빠'도 '아버님'도 아닌 '아버지'로 불러야 한다. 이런 구별도 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철부지다. 성인이 되면 의젓하게 어른 말을 써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유아어를 쓰면 생각이나 행동에서 어린이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많다. 제대로 된 호칭은 예절의 기본 요소이다. 자신과 상대편의 나이, 위상, 대화 상황에 걸맞은 호칭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야채=채소? 이렇게 다릅니다
손윗사람에게 반말투로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버릇없고 예절을 모르는 것은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이다. 모든 교육의 시작은 가정에서부터 비롯된다. 문제가 있는 아이 뒤에는 문제를 가진 부모가 있다.
요즘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 경어법의 관습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상도 심각하지만, 그나마 사용하고 있는 존댓말도 그 원칙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존대를 하지 않아도 될 경우에 높임말을 쓰고, 높임말을 안 써야 할 대목에서 필요 이상의 존댓말을 쓰는 경우가 자주 눈에 띈다.
"커피 나오셨습니다. 뜨거우시니 조심하십시오." 커피숍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극존칭 어법이다. 듣기에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어서 더 문제다. '커피'가 주어인 문장에 '나오시다'나 '뜨거우시다'라는 극존칭을 쓰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말끝에 무조건 '-세요'나 '-시'를 붙이면 다 존칭이 되는 줄 아는 사람이 뜻밖에 많지만, 상품을 높이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자고로 과공은 비례라 했다. 지나친 높임말 사용은 오히려 역효과를 줄 때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편집자가 원고를 검토할 때는 그 내용을 의심하고 봐야 한다. 술술 읽히는 문장도 내용이 엉터리일 수 있다. 대충 읽으면 말짱해 보이는 글이 유심히 보면 비과학적이거나 문법에 어긋난 경우가 흔하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일본식 용어나 구문, 일본식 조어, 일본식 한자어를 그대로 직역해 놓은 듯한 일어 번역투와 영어 직역투 문장이 수두룩하다. 번역문의 영향은 우리 사회 지식인들이 쓰는 말과 글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런 사례는 워낙 많으므로 일일이 바로잡을 수도 없는 지경이다.
없어도 그만인 일본식 조어 '-적(的)', 일본어 주격조사 'の'의 남용 등은 심각한 수준이다. 하지만 조사 '-의'를 쓰면 문장이 짧아지고 간결해지는 효과가 있다. 이미 '-의'를 널리 쓰고 있으므로 남발하지 말고 꼭 쓸 곳에 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포용할 것은 포용하고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는 융통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말을 영어 직역투로 쓰는 대표적인 기형 서술어가 '-을 갖는다'는 표현이다. 우리말에서 잘 어울리는 서술어가 있음에도 '가지다', '갖다'를 남용하는 것은 영어의 'have+명사'를 '가지다' 또는 준말인 '갖다'로 단순 번역하는 데 익숙한 탓이다. 가지다는 소유의 개념 외에도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어 두루 쓸 수 있는 단어이긴 하지만, 잘 분별해서 써야 한다. 전시회나 전람회, 박람회, 품평회, 공청회 등은 '한다', '연다', '개회한다'고 하는 것이 옳다. 워낙 난무하는 영어 번역체에 익숙하다 보니 오히려 우리말이 어색해졌다.
출판할 책의 원고 교정을 볼 때 문법과 맞춤법이 많이 틀린 경우는 두통거리다. 보통 빨간 펜으로 교정을 보는데, 교정지가 빨갛게 물든 경우가 많다. 편집자들 사이에서는 여기저기 울긋불긋 빨가면 '딸기밭 교정'이라고 하고, 그 정도가 심하면 '피바다 교정'이라고 한다. 대부분 저자는 편집부 교정에 고마움을 표하지만 가끔 민감하게 반응하는 저자도 있다.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 중 하나는 잘못을 지적하면 기분 나빠한다는 것이다. 한번은 '야채(野菜)'를 '채소'로 교정했더니 저자는 원고대로 '야채'로 해달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자기는 그렇게 배웠다는 것이다. 야채(野菜)는 야생의 상태로 자라는 '들나물'을 의미하고, 채소(菜蔬)는 밭에서 인위적으로 기르고 관리한 식물을 일컫는 말이다.
야채가 흔히 사용되는 이유는 일본식 표현을 그대로 여과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본디 일본에서도 '채소(蔬菜 そさい)'와 '야채(野菜 やさい)'를 구분하여 썼으나, 그들의 상용한자에서 '나물 소(蔬)'자가 빠지면서 산나물과 들나물과 채소를 통틀어 '야채'로 쓴 것이다. '굴착기'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상용한자에 착(鑿)자가 없어 삭(削)을 대용하여 굴삭기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포크레인'은 그 기계를 만든 프랑스 회사의 이름이다.
한번은 "영어는 되고 일본어는 안 됩니까?" 하면서 따지는 저자를 만났다. 글로벌 세상 어쩌면서 영어가 난무하고 동사무소도 '센터'라고 부르는 세상인데, 많은 국민이 저항감 없이 늘 사용하는 단어를 일본어 찌꺼기라고 물고 늘어지는 진짜 의도는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외래어 수용에 편파적인 면이 있다. 영어에는 관대하고 일본어에는 상대적으로 인색하다. 여기에는 일제강점기 때 우리 민족을 고통받게 했던 일본에 대한 복잡한 심경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 사회는 그 시절을 겪지 않았더라도 트라우마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뜻밖에 우리말로 알고 있었던 단어가 일본어에서 차용된 것이 많다. 예컨대 '가방', '구두', '가족'도 일본어에서 차용된 말이라고 한다. 우리말에 깊이 뿌리를 내린 단어가 하도 많으므로 일제 식민 잔재 청산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부지불식간에 일본말을 많이 쓰고 있다. 어려서부터 알게 모르게 번역투의 글에 익숙해 있기에 잘못 사용하거나 곡해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를 보며 전부라고 판단하는 오류도 적지 않다. 이 글에서도 몇 번 사용한 '경어(敬語)'라는 단어도 일본어에서 온 말이니 '높임말' 또는 '존댓말'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보았다. 너무 지나친 감도 있지만 우리말을 찾고 지키려는 그런 노력은 평가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수한 의도에서 국어사전이나 간행물의 잘못된 부분을 자주 지적하는 그런 분들 덕분에 바로잡힌 부분이 적지 않다. '벤토'가 '도시락'으로, '와루바시'가 '나무젓가락'으로 바뀌었듯이 우리가 쓰고 있는 일본말을 제대로 알려주기만 해도 한글 순화에 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고수부지', 신문과 방송이 퍼뜨린 잘못된 말
▲ 훈민정음 한지등. ⓒ 이현정
198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한강변 '고수부지'는 정돈된 한강의 면모를 보이면서 서울 시민의 휴식처로 애용되어 왔다. 그런데 고수부지는 국적 불명의 조어이다. '고수(高水)'는 직역하면 '높은 물'인데, 빈 땅을 가리키는 일본말 '부지(敷地)'를 합하여 나온 말이다. 한강 변의 무질서한 땅들이 새 단장 되었을 때 신문과 방송에서 그곳을 '고수부지'라 불렀고, 그 때문에 사람들이 그 말의 정확한 뜻도 모른 채 따라 쓴 것이 많은 사람이 쓰는 통용어가 되어 버렸다. 요즘은 언론에서 '둔치' 또는 '강턱'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고수부지란 말을 즐겨 쓰고 있다. 이처럼 한번 쓰기 시작한 말은 좀처럼 고치기 어렵다는 걸 생각할 때 처음 쓰는 말은 신중히 해야 한다.
현대는 세계화 시대이다. 도도한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지구촌 모든 나라가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세계를 무대로 하는 현실에서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영어 등의 외국어 교육의 필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학업이나 일에 필요하다면 영어, 중국어, 일어 등을 배워야 경쟁력이 있다. 하지만 근본은 우리말이다. 근본인 한국어를 정확하게 말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외국어도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다. 그런데 국어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에게 조기 외국어부터 강요하고 있는 현실이다. 비싼 돈 들여 얼치기를 만드는 교육이다.
그래서인지 날이 갈수록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얼치기 인간들이 넘쳐난다. 요즘 잘못 쓰는 높임말부터 정체불명의 외계어까지 일상에서 우리말을 잘못 쓰는 경우가 셀 수 없이 많다. 엉터리로 표기된 낱말이 너무 많다. 일상에서 외국어를 생각 없이 쓴다. 노래 가사는 태반이 영어투성이다. 그것도 우스꽝스러운 K팝 콩글리시 가사라서 국제사회에서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영어 발음과 철자를 틀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 여기면서 우리말을 잘못 쓰는 것에 창피한 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SNS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심각성이 더하다. 비속어와 은어가 난무하다. 절친, 즐감, 열공, 훈남, 완소, 솔까말 등의 줄임말 표현은 빠르게 전달할 필요성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또래끼리 어울리면서 쓰는 그들만의 은어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 그것도 한때이고 지나고 보면 추억으로 남는다. 성장기 때 사용하는 은어는 어느 시대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웃고 넘기기에는 심한 비속어도 많은 듯하다. 존나, 똘추, 열폭, 담탱이, 개, 처, 레알, 찐찌버거 등 알아듣기 어려운 은어와 욕설이 뒤섞여 시궁창 냄새가 진동하는 외계어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비속어를 습관적으로 쓰면 상스럽고 천박한 사람이 된다.
우리네 말글살이가 날로 거칠어지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교육과 방송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영어 지상주의 교육에 국어가 너무 홀대를 받고 있다. 심지어 영어 철자법에는 자신이 있는데 한글 맞춤법은 어렵다고 무슨 자랑거리라도 되는 듯이 이야기하는 지식인을 본 적도 있다. 그것을 결국 우리말을 소홀하게 생각한 데서 비롯된 결과이다. 영어 공부하는데 썼던 노력과 정성을 10분의 1만 썼어도 그런 말이 나올까?
세계 공용어로 간주하는 영어 교육의 중요성은 공감하지만, 모국어보다 우선시되는 영어 교육은 주객이 전도된 현상이다. 아무리 세계화가 시대적 요청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생활 기반과 터전의 언어 체계는 한국어이다.
인터넷과 방송이 언어 파괴의 주범이라는 말도 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주요 언론이 앞장서서 우리말을 파괴하고 있다. 방송 프로 제목과 신문 제목부터 영어투성이고, 그 내용 속에는 온갖 것들이 잡탕이 되어 있다. 현대 사회에서 언론, 특히 방송이 갖는 영향력은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정확한 표준어가 사용되는 뉴스 프로그램에서 외래어, 외국어가 불필요하게 많이 사용되는가 하면 어법이 틀린 말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오용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언젠가 텔레비전 뉴스를 보는데, 대통령이 방북 '수속절차'를 밟고 있다고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반복했다. '수속'은 우리말 '절차'에 해당하는 일본말이다. '애매'가 일본말이고 '모호'가 우리말인 것과 같다. 텔레비전 자막의 오류도 많이 발견된다. '방방곡곡'을 '방방곳곳'으로, '풍비박산'을 '풍지박삭'으로, '혈혈단신'을 '홀홀단신'으로 잘못 표기하는 예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자막이 틀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말과 글의 전문가 집단에 있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언어 질서를 파괴해 버리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독자와 시청자에게 돌아간다. 방송에서 잘못된 우리말을 지적하지 않고 사용하다 보니 분별없는 국민이나 학생들은 잘못된 말인 줄 모르고 공공연히 사용하는 것이다. 방송 말은 당연히 표준어를 구사하고 한글 맞춤법에 맞아야 한다.
틀린 말도 귀에 익으면 자연스럽게 들린다
어법에 틀린 말도 자주 들으면 자연스럽게 들린다. 귀에 익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들린다고 해서 바른말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자연스러운지 아닌지'가 아니라, 그 표현이 우리말 어법에 맞느냐 아니냐 하는 점이다. 제아무리 많은 사람이 쓰더라도 틀린 것을 바로잡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언어 사용자들이 공감하고 자주 쓰면 표준어나 관용구로 자리 잡을 날이 올 것이다.
예컨대 '자장면'이 표준어임에도 한국어 사용자가 주로 '짜장면'으로 쓰기 때문에 언중의 입말을 존중하여 복수 표준어로 인정되었다. 어법이 언어 대중보다 우선하지는 않는다. 표준어는 중요하지만 생활 속에서 쓰는 말도 중요하다. 표준어에 지나치게 매달려서 표준어와 다르다는 이유로 쓰지 말아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도 좋은 자세는 아니다. 이것은 내가 글을 쓰거나 교정을 볼 때 늘 고민하는 문제이다.
독일의 시인 괴테는 "한 나라의 정신은 말과 글에 있다"라고 했다. 문화의 으뜸이 말과 글이다.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멜 선생님이 우리에게 프랑스어에 대해서 차례차례로 말씀해 주셨다. 프랑스어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분명하고, 가장 완벽한 언어라고. 이를테면 어떤 백성들이 노예의 신분이 되더라도 자기 나라의 국어를 견실하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마치 자기가 갇힌 감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프랑스어를 우리들은 소중하게 지키고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1870년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프랑스가 패하게 되는 바람에 소설 속 주인공이 살던 알자스 로렌 지역에서 프랑스어 사용이 금지되는데, 그 금지되는 프랑스어로 하는 마지막 수업을 어린 학생의 눈으로 바라본 소설이다. 아멜 선생님은 마지막 수업을 마치며 칠판에 '프랑스 만세'라고 적어 놓는다. 이 결말 부분에서 가슴이 찡해 오는 비장한 감동을 받는다.
문화 선진국 프랑스는 '국어 보호법'을 제정하여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모국어를 보호하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거실에 사전을 두고 들춰본다고 한다. 주체성이 있는 민족은 자기의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잘 지킨다. 일찍이 주시경 선생은, 말과 글을 정리하는 일은 집 안을 청소하는 일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집 안이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정신마저 혼몽해지는 일이 있듯이, 우리말을 갈고 닦지 않으면 국민정신이 해이해지고 나라의 힘이 약해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강점기 때 조선어학회 사건과 같은 한글 탄압 정책에도 꿋꿋하게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켜 온 것이다.
자연 생태계가 외래종에 의해 무너지듯이 문화 생태계는 무분별하게 쓰는 말과 글로 말미암아 무너지게 된다. 조야한 언어의 남용은 우리의 정서를 거칠게 하고 사회적 혼돈을 부추긴다. 신문 방송뿐만 아니라 거리의 간판과 상품 이름, 인터넷 포털 사이트도 외국어와 외래어가 넘쳐난다. 교육과 언론이 앞장서서 말글을 오염시키고 있는 관계로 출판도 시나브로 오염되었다. 하물며 자기 이름으로 책을 펴내겠다는 저자들조차 외국어와 외래어를 마구 쓰고 문법이 무시된 글을 쓰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네 말글살이에 종사하는 사람들, 즉 작가와 언론 방송인들은 우리말을 쉽고, 편하고, 아름답고, 세련되게 다듬어야 한다. 그것은 글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책무다. 정지용, 백석 등의 시가 우수한 것은 시 속에서 우리말을 지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말은 그 사람 영혼의 표출이다. 품격 있는 사람은 말도 품격 있게 한다. 하나씩 맞는 표현을 익히고 생활에서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노력할 필요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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