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64696

마지막일지 모르는 미국행... "북한 자료 찾아오겠다"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알려지지 않은 '민족의 아픔'을 밝혀내겠다
17.10.09 11:16 l 최종 업데이트 17.10.09 11:16 l 글: 박도(parkdo45) 편집: 김지현(diediedie)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전경 2005년 12월 촬영
▲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전경 2005년 12월 촬영 ⓒ 박도

드디어 '미국행 항공권'을 발권하다

"박도 님, 항공권 결제요청이 완료됐습니다. 결제 확인 후 항공권을 발권 진행하겠습니다."

나는 발권을 의뢰한 한 여행사 메일을 확인한 뒤, 지시에 따라 가상계좌로 입금하자 곧 입금이 됐다는 회신과 함께 워싱턴행 왕복항공권이 발권됐다. 순간 내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참 이번 미국행은 어렵게 가게 된다.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연재 그 뒷이야기와 제4차 방미 발권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가감 없이 솔직히 들려드리고자 한다.

지난해 연말 내 책을 펴내준 한 출판사 대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사연인즉 5년 전에 펴낸 나의 산문집 <카사, 그리고 나>의 재고가 600여 권 남았는데 인수를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요즘 대부분 출판사는 초판에 1000부를 찍는데, 그는 책의 내용이 좋아 잘 나갈 것 같다면서 2000부를 찍었다. 그동안 1300여 부는 잘 팔았는데 나머지는 재고로 쌓였단다. 곧 이사를 하는데 재고를 인수해주시면 좋겠다는 애소였다.

사실 그는 대학교재만을 출판하다가 일반 출판에 뛰어든 이였다. 요즘 출판 현실을 잘 몰랐기에 저지른 잘못이었다. 내가 남은 재고를 책임져야 할 의무는 없지만 그의 애소에 그만 마음이 약해져 550권을 모두 떠안았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후배들에게 그런 사정을 얘기하자 세 분이 호응해 줘서 300부를 소모했다. 나머지 책은 동창회에 기부하기도, 북 콘서트 하객들에게 증정했다. 그래도 100여 권이 내 서가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농사꾼은 값이 폭락해도 이듬해 씨앗을 뿌리지 않을 수 없듯이, 올해 초 한국전쟁 집필 계획을 세운 뒤 내 단골 출판사인 상암동 눈빛출판사로 향했다. 14년 전 첫 거래를 할 때는 성산동에서 한옥을 통째로 쓰면서 7인의 직원들이 나란히 사무실 입구에 서서 제비떼처럼 종알거리며 나를 반겨 맞았다. 그새 한 사람씩 줄어들더니 이제는 자그마한 오피스텔에서 네 사람이 나를 반겨 맞았다.

 오마이뉴스 성금으로 미국 갔을 때 워싱턴 덜레스 공항 입국장에 마중나온 재미동포들(가운데 흰옷 권중희 선생, 그 오른쪽 필자)
▲  오마이뉴스 성금으로 미국 갔을 때 워싱턴 덜레스 공항 입국장에 마중나온 재미동포들(가운데 흰옷 권중희 선생, 그 오른쪽 필자) ⓒ 박도

우리 출판계의 현실

출판사 대표 부부와 따님 그리고 한 직원이었다. 셋은 가족으로 가족 외 직원은 1인이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출판계의 대체적인 현실이다. 그날 나는 직원에게 재고를 묻자 그는 '박도 선생님 저서 재고 현황표'를 출력해줬다.

나는 눈빛출판사에서 2004년부터 거의 해마다 1권 정도로 모두 14권을 출판했는데 8종은 품절상태로 재고가 없었다. 그러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847권, <항일유적답사기> 348권, <약속> 407권, <허형식 장군> 157권이라는 숫자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앞의 두 책은 2쇄, 3쇄라서 조금은 이해가 갔으나 <약속>과 <허형식 장군>은 고향 구미를 배경으로 내 고향에는 일본군 장교만 아니라 이런 항일명장도 있다는, 필생의 작업으로 썼는데 초판도 나가지 않다니….

그 순간, 나는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함께 불황에 허덕이는 출판사를 돕고자 이즈음 유행하는 스토리펀딩을 하면 재고 책도 줄이고, 이참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가서 한국전쟁 자료도 입수해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 일감(프로젝트)은 '도랑치고 가재 잡는 일거양득이다'라는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그 자리에서 이 구상을 제안하자 이규상 대표는 당신이 판매에 소홀히 해서 빚어진 결과라고 만류했다.  

집에 돌아온 뒤 아내한테 상의하자 아내도 극구 반대했다. 이제 "당신은 남의 신세를 질 나이가 아니라는 것"과 아침저녁마다 약을 한 봉투씩 먹고 지내는 내 건강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생각을 접지 못하고, 스토리펀딩에 성공한 고상만 시민기자, 그리고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과 상의했다. 그러자 두 분 모두 스토리펀딩 목적이 뚜렷하기에 성공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진단해줬다. 결국 지난 6월 12일부터 다음 카카오 측과 스토리펀딩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을 시작했다. 내가 한국전쟁 사진을 입수하게 된 계기는 <오마이뉴스>이기 때문에, <오마이뉴스> 편집부에 상의하자 동시 게재도 가능하다고 해 두 매체에 연재하게 됐다.

사실 나는 2003년 11월에 <오마이뉴스>를 통해 스토리펀딩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백범암살 배후진상규명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인 바 있었다. 그때 모금 개시 12일 만에 목표액 3000만 원을 거뜬히 돌파했다. 뜻밖에도 '화장실이 어디입니까?'라는 말도 영어로 말할 줄 모르는 내가 고 권중희 선생님을 모시고 미국에 갔다. 그곳 워싱턴 근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47일간 체류하면서 여러 문서와 사진 자료를 입수해 온 적이 있었다.

느긋하게 기다려 보십시오

지난 6월 12일,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스토리펀딩 제1회를 다음 카카오와 <오마이뉴스>에 동시 송고했다. 

두 매체 모두 조회수는 엄청 높았으나 후원금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나는 매회 기사(스토리)를 알차게 하고자 내 집에 있는 자료는 물론, 원주시립중앙도서관을 뒤지며 온갖 정성을 다 쏟아 집필한 다음 거기에 알맞은 사진을 골라 삽입한 뒤 송고했다. 


▲  1950. 10. 옹진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국군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이 이미지는 '분단된 조국'을 상징하고 있다. ⓒ NARA

이 기사는 읽은 이도, 댓글을 달아주는 이는 무척 많았으나 후원금은 목표액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 기간 중 미국에 거주하는 박유종 선생에게 전화를 드렸다. 박 선생은 "허리 통증으로 돕기가 힘들다"고 대답했다. 영어가 서툴고 회화가 전혀 되지 않는 나로서는 그분이 돕지 않으면 미국에서 일을 할 수가 없다.

마침 7월 29일 제1차 후원자와 차 한 잔 모임의 날이었다. 나는 그날 후원자들과 차 한 잔을 나누며 이런 저런 일들을 이실직고 한 뒤 그때까지 연재한 것으로 끝내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그러자 그날 참석한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은 "통발을 물속 깊이 넣어두고 느긋하게 기다려 보십시오"라고 조언해줬다. 일리 있는 말씀이었다. 만약 내가 연재를 중단한다면 독자와의 약속을 중도에 저버린 것이 됐기에 온 정성을 다해 지난 9월 21일 30회로 연재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스토리펀딩 모금액은 350만6000원으로 목표액의 15%에 머물렀다. <오마이뉴스>에서 그동안의 조회수를 살펴보니(9월 28일 오전 7시 기준) 최대 13만8562(2회)에서 최소 4230(24회)로 조회 총수는 70만여 회였다. 한 회 평균 조회수는 2만3400여 회였다. 다음 카카오에도 동시에 연재한 바, 총 조회수는 약 80만 회를 조금 상회했다.

다음 카카오 이지현 팀장도, <오마이뉴스> 담당 김지현 기자도 '결코 실패한 프로젝트가 아니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독자들의 뜻을 존중하기로 마음을 먹은 뒤, 9월 23일 강원도 횡성 소재 미술관 자작나무숲 후원자 모임에서 방미 계획을 접었다는 의사를 전했다. 후원자 모두 양해해 주셨다.

하지만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많은 독자 가운데는 눈앞의 현실에 납득하시겠지만 내심 전직 훈장도, 작가도 식언하는 데는 별 수 없다고, 특히 후원해 준 제자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사실 나는 젊은 날 내가 쓴 글에 책임을 다하고자 평생 운전면허증도 없이 대중교통만 이용하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  NARA에서 찾은 베트콩 지하요새 평면도 ⓒ 박도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이즈음 나는 심신을 달래며 모처럼의 휴식 겸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 9월 26일 집에서 가까운 치악산 밑 수변공원 호숫가를 거닐고 있는데 마침 손전화가 울렸다.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였다. 

"선생님, 이번 일로 용기 잃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제가 선인세로 다소 지원해 드릴 테니까요. NARA에서 선생님이 한국전쟁 사진 입수해 온 이후, 여러 기관에서 현지로 가서 작업해 사진을 국내로 입수해 왔지만 제가 보기에는 선생님 눈만큼 사진을 고르지 못했고, 스캔상태도 부실해 보였습니다."
  
그는 사진전문 출판인이다. 그는 특히 한국 근현대사 사진 마니아로 말수가 적은 어눌한 사람이다. 여간해서는 전화도 하지 않은 사람인데, 요즘 내 마음을 훤히 꿰뚫고는 아픈 곳을 위무해 주었다.

'그래, 당신은 나를 알아주는구나!'

사실 내가 NARA와 맥아더기념관에서 입수해 온 사진 하나하나는 그저 주워온 게 아니다. 나를 도와준 분은 우리나라 원로 사학자요, 임시정부 제2대 박은식 대통령 막내손자로 고령(79세)임에도 대한민국의 역사를 위해 소매를 거둬주신 분이시다. 내가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우리 두 사람은 가장 먼저 NARA에 출근해 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면서 눈이 아프도록 한국 관련 사진을 찾아 숙고한 뒤 스캔해 왔다.

사실 미국 NARA 사진자료실에는 수백만 장의 사진들이 있다. 그 사진들은 대부분 종군기자들이 미국인의 시각으로 촬영한 것이다. 당연히 한국인의 아픔을 드러내고 약소민족의 억울함을 말해 주는 사진은 매우 적었다. 한국인이 촬영한 월남전 보도사진을 보면 월남인들의 아픔을 드러낸 사진보다 한국군이 월남민을 도와준 사진, 마을회관을 건설해 준 미담사진 그리고 베트콩을 형편없이 묘사하면서 지상에서 사라져야 할 세력으로 보도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미국은 그렇게 못난 베트콩들을 제압치 못하고 왜 도망치듯이 월남을 벗어났는가? 미국은 그 많은 폭탄을 쏟아 붓고도 왜 월남을 자기들 손아귀에 넣을 수 없었던가?

내가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을 연재하는 동안에도 갖은 악플이 달렸다. 종북이니, 좌빨이니….


▲  1950. 12. 미군들이 형편없이 깔보던 중국군들의 원시전과 강추위에 밀려 최정예사단이라는 미 해병부대가 장진호전투에서 무조건 후퇴하고 있다. ⓒ NARA

무기로서는 적을 이길 수 없다

지난번 맥아더의 빛과 그림자를 다룬 '인천상륙작전 영웅 맥아더? 그는 오만방자했다' 기사에는 5000명에 가까운 누리꾼들이 벌떼처럼 달겨들어 온갖 악플을 달았다(네이버 뉴스 기준).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단 하나의 눈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몇 해 전 내가 안흥에 살 때다. 이즈음과 같은 때로 벼들이 익은 황금 들판을 지나는데 옆집 농사꾼이 나에게 말했다.

"이북에 쌀 한 톨 보내지 말고, 그놈들은 쫄쫄 굶겨 죽여야 해요. 6.25 때 맥아더가 원자탄을 이북에다 우수수 쏟았어야 옳았는데. 지금도 미군이 폭격기에다 원자탄을 잔뜩 싣고 가서 이북을 불바다로 만들어야 해요."
"그러면 우리도 죽습니다. 그들은 손발이 없습니까? 이북을 불바다로 만들면 우리도 그렇게 됩니다."

그제야 그 농사꾼은 입을 닫았다. 그런데 한심한 것은 그 농사꾼이 무지무식해서 그런 말을 뱉었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현역 국회의원도, 군 장성도, 교육자도, 목사도 그 농사꾼과 똑같은 말을 뱉는다는 점이다. 여기에 대한민국의 큰 불행이 있다.

나는 최전방에서 보병 소총소대장으로 2년 복무한 예비역 중위다. 40명의 소대원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면서 그들과 속 깊은 얘기를 나눠보면, 솔직히 나라를 지켜야겠다고 군에 입대한 병사들은 거의 없었다. 집안에 '빽'이 없어서, 보충대에서 뒷돈을 쓰지 않았기에, 최전방 말단 소총수가 됐다고 푸념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자해로 전역하는 부하들도 있었다.

막강한 무기만으로는 적을 이길 수 없다. [한국전쟁, 그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복원] 제23화 정진호 전사를 보시라.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월남전에서도 미군이, 한국군이 무기가 부실해서 베트콩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는가?

우리는 이성을 가진 인간이다. 왜 말로서 상대를 설득치 못하고 살인무기로 상대를 굴복시키려고 하는가? 지난날 그만큼 당했으면 이제는 깨달아야지 아직도 무기로 상대를 제압하려 하는가? 사실 그런 자들은 정치인이 돼서도, 교육자가 돼서도, 목회자가 돼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  NARA 5층 사진자료실에서 박유종 선생(왼쪽)과 공동작업을 하다(2005. 12. 1.). ⓒ 박도

후손들이 기억해 주는 훈장이 되고 싶다

이 대표의 전화에 용기를 얻은 나는 아내에게 상의했다. 아내는 "다녀오라"고 승낙했다. 미국 박유종 선생에게 전화를 하자 다행히 많이 쾌차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솔직히 나도 10년 전과는 다르고, 박유종 선생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한 번 더 미국에 가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을 비롯한 관계기관에 간 뒤, 어처구니없이 죽어간 불쌍한 우리 백성들의 억울한 한 맺힌 죽음의 장면과 한국전쟁의 원인을 좀 더 세밀히 살펴보고 자료를 입수해 올 예정이다.

지난 제3차 방문 때 귀국 전날에야 NARA에서 수십 년간 자료 찾는 일에 몰두하신 방선주 박사를 만나 북한 측 자료의 상자번호를 알게 됐다. 하지만 귀국 시간이 임박해 자세히 살피지 못한 점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점을 보완할 예정이다. 그리하여 곧 펴낼 <미군정기 3년사>와 2018년 6월 아니면 2019년 6월에 펴낼 <박도 선생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한국전쟁> 책에 그 자료들을 수록할 것이다. 

나는 당대의 인기에 연연치 않고, 먼 후일 후손들이 그래도 그때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생각했던 한 눈 뜬 훈장도 있었다는 평가로 만족하련다. 

더 자세한 이야기와 내가 새롭게 수집한 현대사 이미지들은 귀국 후 '박도 기자의 현대사 자료 컬렉션'(가제)라는 연재로 독자 여러분에게 알려드릴 계획이다. 결코 지울 수 없는 한국현대사의 이미지를 푸짐하게 선물하겠다고 약속한다.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보내주신 귀한 성금으로 오늘 아침 워싱턴행 항공권을 발권하였습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2017년 10월 22일에 출국하여 현지 일감에 따라 다소 유동적으로 10월말이나 11월 초순 무렵에 귀국할 예정입니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