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15693.html?_fr=mt2


전두환정부, 80위원회 만들어 공수대원 수기도 조작했다

등록 :2017-10-23 18:40 수정 :2017-10-23 23:52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 조사]

1985년 광주 진상규명 요구 거세자 당청 안기부 등 권력기관 총망라 ‘80위원회’ 비밀리에 설치 운영

군사연구소, 부대원 체험수기 작성 ‘지면사격’ 단어 화이트로 지워져, 80위원회 “불리한 내용 수정” 명기


23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브리핑룸에서 열린 5·18 특별조사위 중간 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공개된 전두환 정부 80위원회 관련 자료. 특조위는 전두환 정부가 1985년 6월 80위원회를 구성해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범정부 차원의 대응방안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23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브리핑룸에서 열린 5·18 특별조사위 중간 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공개된 전두환 정부 80위원회 관련 자료. 특조위는 전두환 정부가 1985년 6월 80위원회를 구성해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범정부 차원의 대응방안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전두환 정부가 1985년 6월 서둘러 ‘80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5·18 민주화운동을 둘러싼 진상을 규명하라는 요구가 높아지면서 범정부 차원의 대응책 마련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1985년 5월23일 서울지역 5개 대학 학생 73명은 서울 을지로의 미 문화원을 기습 점거하고 사흘동안 농성을 벌이면서 광주학살의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5·18민주화운동이 전국적 이슈로 떠오르자 국회에서도 야당 의원들의 공세가 쏟아져 당시 노신영 국무총리와 윤성민 국방부 장관 등이 곤욕을 치렀다. 5공 정부가 ‘광주사태 진상규명 관계장관대책회의’를 연 것은 바로 미국 문화원 기습 점거 13일 만인 6월 5일이다.


■ 일사천리로 꾸려진 80위원회 


관계장관대책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을 위원장으로 ‘광주사태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 운영하기로 결정하고, 내무부, 법무부, 국방부, 문공부, 육군본부, 보안사, 치안본부, 청와대, 민정당, 안기부 등을 참여시켰다. 구체적인 업무추진을 위해 실무위를 편성하기로 하고, 기구의 성격을 감추기 위해 ‘80위원회’로 이름을 정했다. 80위원회는 수집정리팀, 분석작성팀, 지원팀 등 총 3개 실무팀과 이들을 관리하는 심의반 등으로 구성됐고, 실무책임은 안기부 2국장이 맡았다. 5·18 민주화운동 헬기사격 및 전투기출격대기 관련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국방부 5·18 특조위)는 위장 명칭 사용 배경에 대해 “이 기구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80위원회는 5·18 관련 자료 수집과 백서 발간, 홍보대책 수립을 목표로 했다. 당시 85년 6월6일 회의 자료를 보면, ‘부장님 지침’에 따른 작업방향을 1단계 종합백서 발간과 2단계 홍보대책 수립으로 구분하고 각 기관별 수집 자료 목록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이건리 국방부 5·18특조위 위원장은 “‘부장님 지침에 따른 작업방향’이란 표현에서 부장님은 안기부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당시 안기부장은 5·18 당시 특전사 작전참모였던 장세동씨였다. 당시 80위원회가 각 기관에 요구한 자료는 포괄적이다. 예컨대 육군본부의 경우 5.18 관련 핵심 쟁점인 계엄지휘체계, 작전명령 근거, 작전지휘체계, 일자·지역·부대별 작전상황, 진압과정, 실탄사용량 등을 보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80위원회의 활동 결과는 군 기록의 왜곡 시도로 연결됐을 것으로 의심된다. 국방부 5·18 특조위는 1988년 군사연구소가 발간한 광주사태 작전 참가요원체험수기를 그 실례로 들었다. 이 체험 수기는 1985년과 1988년 두 차례에 걸쳐 27명을 대상으로 작성됐는데, 1985년 당시 지침에 “군에 불리한 내용은 재송부해 수정할 것”이라고 명기돼 있다는 것이다. 한 공수부대 요원이 “폭도들을 200~300m 거리에서 지면사격과 공포사격으로 쫓아 보냈다”고 쓴 체험수기 내용에서 ‘지면사격’이란 단어가 화이트로 삭제된 흔적도 확인됐다. 지면사격은 땅을 향해 사격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통상 공포탄은 허공을 향해 쏜다. 땅바닥에 쏘면 탄알이 튀어 사람이 다칠 수 있다.


이건리 위원장은 “1981년 6월8일 제출된 체험수기에 따르면 5월21일 도청 앞 집단발포의 경우 오후 1시30분 자위권 보유 천명이 하달되었다는 그런 내용이 있고, 특히 ‘무릎 쏴’ 자세로 집단사격했다는 충격적 내용도 있다”며 “이는 88년 군사연구소가 발간한 체험수기와 내용에 차이가 있고 특정 사건에서는 다양한 수정이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차이에 대해 “80위원회와 같은 정부 차원의 조직적 개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5·18 특조위는 그러나 80위원회의 구체적인 활동 내용과 백서 발간 여부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진 못했다고 밝혔다. 이건리 위원장은 “당시 발간됐을 백서를 보조하고 있는지 국정원에 확인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헬기사격 의혹 입증할 물증 아직 못찾아 


국방부 5·18 특조위는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과 전투기 출격 대기 의혹과 관련해 목격자 등 50명을 조사하고 내용을 분석했으나 아직 두 의혹을 입증할 새로운 증거는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5·18 헬기 사격 의혹은 지난 1995년에도 검찰 수사선상에 올랐지만, 당시 5·18 관련 고소·고발사건을 수사했던 검찰은 헬기 사격 피해 주장을 일축하고 ‘해당자들이 헬기가 아닌 계엄군의 소총 등에 맞아 부상당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신군부 세력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린 때다. 이 위원장은 “당시에도 목격자들의 증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사당국은) 군 공직자의 진술과 군 자료를 토대로 헬기 기총수사는 없었다고 설명했다”며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당시) 피해자나 목격자들의 증언은 가치 평가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5·18특조위는 새로운 증언자·제보자를 발굴하고 있다면서 적극적인 제보도 요청했으나 새로운 물증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박병수 선임기자, 김지은 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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