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daum.net/qna/openknowledge/view.html?qid=2eF2Y 

고구려의 군사제도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의 막강한 군사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6정이나 9서당과 같은 군사조직의 명칭이 전하지는 않지만, 고구려에 군사조직과 제도가 있었음은 여러 자료를 통해서 확인된다. 고구려군은 크게 육군과 수군으로 나누어지고, 육군은 보병과 기병으로 구분된다. 안악 3호분이나 약수리고분의 행렬도를 보면, 행렬의 좌우에 기병이 서고 그 안으로 보병이 열을 짓고 있으며, 보병의 수가 기병보다 많다. 실제 전투에서는 기병과 보병은 합동작전을 하였고, 수적으로는 보병이 많지만 전투의 주력은 기병이었다.

군사의 무장도 기병과 보병이 달랐다. 기병의 주무기는 활·긴 창·칼 등이었다. 기병에는 병사 뿐 아니라 말까지도 쇠로 만든 찰갑과 투구로 무장한 중장기병과 갑옷으로 그다지 무장하지 않은 경기병이 있었다. 보병 역시 궁시,칼,짧은 창,도끼,갈고리 등을 주무기로 하고, 투구와 단갑으로 무장한 병사와 갑옷을 입지 않고 무기만 지닌 병사로 구성되었다. 

고구려 초기의 국가체제는 자치권을 가진 那部의 연맹체제였기에, 군사조직도 각 나부를 단위로 조직되었다. 대가가 자신이 지배하는 나부에서 군사들을 동원하고, 계루부왕권이 주부를 통하여 대가들의 군사 활동을 적절히 통제하는 형태였다. 제가들은 자신의 군사력을 거느리고 고구려왕이 주도하는 군사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대외전쟁에서 얻어지는 성과물을 분배받거나 군공에 대한 포상으로 식읍을 하사받는 등 그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를 받았다. 4세기 이후에는 나부체제가 해체되고 왕권에 의한 집권력이 강화되면서 제가들이 통솔하는 나부병들도 점차 왕권 아래의 군사조직 내로 편제되고, 전체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 차원의 병력 동원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일반민의 동원은 役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고구려 후기의 군사조직은 중앙 군사조직과 지방 군사조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중앙 군사조직으로는 수도의 5部 조직을 들 수 있다. 본래 수도의 5부는 행정조직이 군관구적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각 부에는 일정 수의 군사가 배치되어 중앙군으로서 수도의 방위 임무를 담당하였다. 溫達이 소속되어 수렵에 참가한 5부병이나,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킬 때 동원한 부병이 이에 해당한다.

중앙군의 무관직은 최고위급 무관으로 위두대형 이상의 관등이 임명된 大模達 일명 大幢主 또는 莫何邏繡支가 있었다. 대모달 아래는 대형 이상의 관등 소지자가 임명되는 末客이 있어 병사 1천 명을 통솔하였다. 말객 아래에는 幢主가 있어 군사 1백 명을 거느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를 5부 조직과 관련시켜 보면, 각 부에는 1천 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말객이 지휘하고 이들 5부의 중앙군을 대모달이 총괄 지휘한 것으로 짐작된다. 

지방 군사조직은 지방 행정조직과 하나의 체계로 짜여졌다. 지방관이 곧 군관으로서 해당지역 지방군을 통솔하였던 것이다. 당과의 전쟁에서 고구려군을 지휘하였던 高延壽와 高惠眞의 관직은 최상위 지방관인 褥薩이었다. 또 무관명인 말객의 다른 이름은 郡頭였는데, 이는 군의 지방관이라는 뜻이고, 최하위 지방관인 婁肖와 百頭도 무관직인 幢主와 대응시켜 볼 수 있다. 

고구려 군사훈련의 대표적인 제도는 수렵행사였다. 초기부터 고구려왕은 잦은 수렵행사를 통하여 자신의 군사적 능력도 함양하고 군사훈련도 겸하였다. 평양천도 후에는 국가적 수렵행사가 봄·가을로 정례화되었다. 봄에는 매년 3월 3일에 수렵행사가 열려 중앙군인 5부병들의 군사훈련을 겸하였다. 또 수렵행사는 溫達의 예에서 보듯이 무예가 뛰어난 자를 선발하는 인재 등용의 통로로도 기능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행사 이외에도 고구려 귀족들은 평소 수렵을 즐겨 이를 통해 말타기와 활쏘기를 연마하였다. 이는 고분벽화에 많이 보이는 수렵도에서 엿볼 수 있다.

미성년자의 교육기관인 경당(扃堂)도 군사훈련의 중요한 장이었다. 평민들의 자제들은 이 곳에서 글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 또 매년 초에는 대동강에서 왕의 관전 속에 두 패로 나뉘어 석전(石戰)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고분벽화에 수렵도를 비롯하여 씨름도와 수박도(手搏圖)·궁사도·전투도 등이 자주 그려지는 것으로 보아 전반적으로 상무적 기풍이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군의 주력은 육군이었으나 수군도 상당히 강력하였다. 본격적인 수군의 활동은 고구려가 낙랑군지역을 차지한 이후로, 이 지역의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수군을 편성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광개토왕 영락 6년(396)의 백제 정벌전에서는 수군을 동원하여 한성을 공격한 적이 있고, 후기에는 고구려 수군이 황해 연안로를 장악하여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방해로 사신을 보낼 수 없다고 당에 탄원할 정도로 강성하였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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