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80898 

광개토태왕 너마저... 중국은 괴로웠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1 드라마 <광개토태왕>, 첫 번째 이야기
11.06.13 11:53 ㅣ최종 업데이트 11.06.13 11:53 김종성 (qqqkim2000)


▲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 ⓒ KBS

한국인들의 영원한 로망, 고구려 광개토태왕(광개토대왕). 그를 주제로 한 KBS1 드라마 <광개토태왕>(토·일 오후 9시 40분)이 지난 4일 첫 방송을 시작했다. 광개토태왕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정도로 매우 친숙한 '국민영웅'이지만, 서기 10세기의 의미를 곰곰이 음미해보면 그가 얼마나 특출한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다.
 
10세기는 광개토태왕이 사망한 때로부터 5세기 뒤이고 고구려가 멸망한 때로부터 3세기 뒤이지만, 그것이 갖는 의미를 탐구하다 보면 우리는 한민족이 그를 만난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이해할 수 있다. 고구려가 강성했던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10세기의 의미를 음미하다 보면 그것이 실은 '뜻밖의 기적'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글에서 '아시아'는 중동 지방을 제외한 여타 지역을 가리킨다. 그런 아시아의 역사에서 10세기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때를 전후하여 아시아 패권대결의 축이 대대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광개토태왕 이후 250년, 중국은 괴로웠다
 

▲ 낙양(뤄양)의 위치. 별표 부분. ⓒ 김종성

고대 중국 문명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15개 국가의 수도였던 낙양(뤄양). 이 낙양을 축으로 할 때,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9세기까지(편의상 'A 시기')는 9시~12시 방향에 있는 나라들이 중국과 더불어 패권 대결을 펼쳤다. 흉노족·선비족·돌궐족·위구르족 등의 활약은 이런 구도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고대 중국 역사서인 <서경>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기원전 3세기 이전만 해도 중국에서는 동아시아를 호령할 만한 강대국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시기의 중국은 명백히 '약골'이었다. 중국은 진시황제의 활약으로 '거대 중국'이 출현한 뒤부터 9시~12시 방향의 나라들('9시~12시 국가들')과 패권경쟁을 벌일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서기 10세기부터 17세기까지('B 시기')는 0시~3시 방향에 있는 나라들이 중국과 더불어 패권대결을 펼치는 구도로 뒤바뀌었다. 거란족·여진족·몽골족·만주족의 활약은 이런 구도에서 생긴 것이다.
 
0시~3시 방향이 강성해졌기 때문에 이 시기는 한민족에게 좋은 기회였지만, 하필이면 서기 10세기 초반에 발해 멸망과 더불어 만주를 상실함에 따라 한민족은 그 좋은 기회를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10세기를 전후해서 패권구도가 뒤바뀐 것은 주로 경제적 요인에 기인한 것이다. A 시기에는 9시~12시 국가들이 아시아대륙의 무역을 중개함으로써 실력을 축적했지만, B 시기에는 그들이 현저히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0시~3시 지역인 만주의 경제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는 점이 정세 변화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이런 사실이 한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점이다. 그 의미를 탐구하다 보면, 광개토태왕 이후의 250년, 즉 고구려의 전성기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실은 '뜻밖의 기적'이었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A 시기의 상당 기간 동안에는 한민족이 만주를 지배했지만, 이 시기에는 힘의 중심이 9시~12시에 있었기 때문에 한민족이 아시아를 호령하기가 힘들었다. 한편, B 시기에는 힘의 중심이 0시~3시 방향이었지만 이 시기에는 한민족이 만주를 상실한 터라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래서 A·B 두 시기의 아시아 질서는 기본적으로 한민족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짜여 있었다.
 

▲ 고구려의 전성기(5세기). 출처는 고등학교 <한국사>. ⓒ 삼화출판사

그런데 이런 핸디캡을 극복하고 한민족의 영광을 일구어낸 인물이 바로 광개토태왕이다. B 시기의 한민족은 자신에게 주어진 핸디캡에 만족하고 아시아 패권에 도전하지 않았지만, A 시기의 한민족은 광개토태왕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등장에 힘입어 250년 동안 아시아 패권질서를 교란시킬 수 있었다.
 
아시아 패권질서를 교란시켰다는 것은, 9시~12시 국가들이 중국과 더불어 패권경쟁을 벌이는 구도 속에서, 경제적·지리적으로 불리한 고구려가 광개토태왕의 활약에 힘입어 아시아 패권구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 고구려의 국력은 동아시아에서는 2위 정도, 아시아에서는 3위 정도였다. 당연한 말이 되겠지만, 오늘날의 아시아 3위와 당시의 아시아 3위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당시에는 아메리카대륙이 별도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의 선진지역인 서유럽이 그때는 유라시아대륙의 변방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고구려가 패권질서를 교란시킴에 따라 광개토태왕 이후의 250년 동안에는 9시~12시 방향과 0시~3시 방향이 동시에 중국을 괴롭히는 예외적인 구도가 출현했다. 1000년이 훨씬 넘는 A 시기 전체를 놓고 보면, 이 250년은 '예외'에 해당하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 250년은 A·B 두 시기를 통틀어 한민족이 가장 번영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 말은 그 250년이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번영했던 기간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A·B 두 기간만 놓고 볼 때 그렇다는 의미다. A 시기 이전, 즉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중국은 기록상으로 볼 때도 현저한 약체였기 때문에 단군조선이 중국에 밀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중국은 세계 최대의 무역로인 초원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강력한 통일왕조가 없었던 탓에 기본적으로 약체 국가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중국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중국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가 남쪽과 서쪽에는 장성(만리장성)을 쌓지 않으면서도 북쪽과 동북쪽을 향해서만 장성을 쌓은 것은, 그 이전만 해도 동북쪽의 한민족이 중국을 못살게 굴었음을 증명하는 유력한 증거들 가운데 하나다. 이에 관한 실증적 논의는 이후의 글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그러므로 광개토태왕 이후의 250년 동안 한민족이 전성기를 누렸다는 말을, 그 250년 동안 한민족이 유사 이래 최대의 영광을 누렸다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기원전 3세기 이후만 놓고 볼 때 그렇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한민족이 광개토태왕을 만난 건 행운
 

▲ 광개토태왕 역의 이태곤. ⓒ KBS

광개토태왕이 광활한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당시의 중국이 5호 16국 시대였다는 점에 있다. 5호(胡) 즉 다섯 유목민족이 북중국에 난입해 16개 왕조를 세움에 따라 중국의 원심력이 약해진 시대였기 때문에 그가 좀더 쉽게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9시~12시 국가들이나 중국에 비해 낙후된 경제력을 갖고도 짧은 시간 내에 대대적인 영토확장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광개토태왕의 리더십이 그만큼 출중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똑같은 직원과 똑같은 자본을 갖고 회사를 경영했는데도 전임 CEO는 연간 100억의 매출액밖에 올리지 못한 데 비해 후임 CEO는 500억의 매출액을 올렸다면, 우리는 변화의 원인을 리더십의 차이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304년부터 5호 16국 시대가 시작되었는데도 광개토태왕(391년 즉위) 이전의 고구려 군주들은 중국을 상대로 뾰족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에 비해 광개토태왕은 21년간의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 영토를 대대적으로 확장시켜 고구려가 동아시아 2위, 아시아 3위의 대국으로 급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를 만든 장본인이다. 광개토태왕 이전의 고구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와는 거리가 멀었다.
 
광개토태왕 시대는 9시~12시 방향이 강성한 시대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우라면 0시~3시 방향의 고구려로서는 힘을 쓰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의 등장으로 인해 약 250년 동안 한민족은 아시아의 강자로 활약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당시의 고구려는 남(9시~12시 국가들)의 시대에 나의 발전을 이룩했던 것이다.
 
남의 시대에 나의 발전을 구가하는 사례는 역사적으로 그리 흔치 않다. 고구려 멸망 이후의 발해도 만주를 지배하기는 했지만, 발해의 지위는 고구려에 비해 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9시~12시 국가들에 비해서도 강하지 못했다.
 
고구려 이후 아시아에서 그런 기적을 연출한 대표적 사례로는 19세기 일본을 들 수 있을 정도다. 서양이 동양을 압도한 19세기 서세동점의 시대에 일본은 동양 국가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청일전쟁 때 받은 배상금을 밑천으로 해서 러일전쟁(1904~1905년) 이후 세계 최정상급으로 떠올랐다. 19세기 일본 역시 남의 시대에 나의 발전을 구가했지만, 이런 사례는 그리 흔치 않다.
 
남의 시대이니 나는 조용히 숨죽여 살며 다음 기회나 노려보자는 생각으로 살았다면, 광개토태왕은 그런 위업을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9시~12시 국가들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으니, 우리 고구려는 훗날을 기약하자'고 생각했다면, 그는 광활한 영토의 주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핸디캡을 핸디캡으로 여기지 않고 핸디캡에 자극을 받아 한층 더 맹렬히 질주하는 도전정신. 그런 도전정신이 원동력이 되었기에 광개토태왕의 고구려는 남의 시대에 나의 발전을 구가하는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민족이 광개토태왕을 만난 것은 대단한 행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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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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