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434386
계엄군 성폭행 후 분신한 여고생... 용서 못할 전두환
[TV리뷰]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잔혹한 충성'에 담긴 충격적 증언들
김종성(qqqkim2000) 18.05.15 11:48 최종업데이트 18.05.15 13:58
고대 사회에서 전쟁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상대방 백성을 빼앗든가 아니면 상대방 영토를 빼앗든가였다. 인구밀도가 낮은 고대에는 영토보다는 백성을 빼앗는 게 더 유리했다. 그래서 상대방 백성을 빼앗아 조세 수입을 늘리고자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려면, 점령 뒤에 병사들을 단속해야 했다. 병사들이 승전에 취해 민간인 재산을 빼앗거나 성적 약탈을 감행하면, 새로운 백성들을 확보하기는커녕 점령지를 도로 빼앗길 수도 있었다. 강태공의 사상을 담은 <육도>에 따르면, 기원전 11세기에 강태공은 주나라 무왕에게 이렇게 충언했다. 점령 직후의 행동 가이드다.
"적국인들이 모아둔 재물을 태워선 안 됩니다. 적군인의 감옥과 궁궐을 무너뜨려서도 안 됩니다. 묘지에 심은 수목이나 신을 모신 사당의 숲을 베어서도 안 됩니다. 항복한 자를 죽여서도 안 됩니다. 생포한 자에게 참혹한 형벌을 가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전쟁의 목적이 상대방 영토를 빼앗은 뒤 자기네 농민을 그곳에 배치하기 위한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점령지 민심을 다독일 필요성이 그만큼 낮아진다. 점령군 사령관이 승전 뒤에 병사들을 단속할 필요성이 낮아지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병사들이 점령지 재산을 빼앗거나 성적 약탈을 자행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1980년 5·18 당시, 전두환과 추종세력은 광주를 그렇게 다뤘다. 대한민국 땅인 그곳에서 헬기 사격을 했을 뿐 아니라 폭격기 동원까지 검토했다. 이뿐 아니다. 병사들에 의한 성폭행을 통제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점령지를 자기네 백성한테 분배할 것이기 때문에 점령지 민심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 ‘잔혹한 충성’ 편.ⓒ SBS
지난 12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잔혹한 충성' 편에서는 5·18 기간에 계엄군한테 성폭행을 당한 사람들의 피해 실상을 다뤘다. 그 해 5월 19일이었다. 전남대에서 학생 시위대와 계엄군의 최초 충돌이 발생한 다음 날이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오정순(가명)씨가 집 앞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계엄군에 의해 구타와 성폭행을 당했던 것이다. 육체적으로만 피해를 입은 게 아니었다. 정신적으로도 그랬다. 그 뒤 정신분열 증세 때문에 치료를 받다가 6년 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그 방식이 끔찍했다. 자기 몸에 직접 불을 붙였다. 화염이 온 몸을 덮을 때의 그 고통, 그것을 스스로 감내한 것이다. 왜 이런 끔찍한 선택을 했을까?
방송에 출연한 우석대 심리학과 김태경 교수는 자기 처벌적 성격이 짙은 행동이라고 분석했다. 죄책감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날 그곳에 내가 왜 있었을까? 성폭행 피해자들 중에는 그런 식으로 자기를 비난하고 혐오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처벌하고자 분신을 선택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피해를 당하고도 자신을 원망하는 행동은, 자기 힘으로는 가해자를 어쩌기 힘들 때 나타나기 쉽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몸과 마음을 망쳐버렸기 때문에, 차라리 스스로를 원망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오정순씨와 같은 학교를 다니던 2학년 권선주씨도 동일한 피해를 당했다. 그는 5월 20일 광주 자취집 앞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온 몸이 구타당한 상태였다. 그 역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38년이 지난 지금도 받고 있다.
▲국립 5·18민주묘지. 광주광역시 운정동 소재.ⓒ 김종성
광주 시내의 또 다른 고등학교에 다니는 최혜선씨(가명)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5월 19일 거리에 나갔다가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1996년 검찰 조사에 따르면, 그는 낯선 여성들과 함께 군인들한테 끌려가 만행을 당했다. 조서에 기록된 최혜선씨와 검사의 대화에 이런 대목이 있다.
검사: 어떻게 끌려갔는가요?
최혜선: 군용 화물차가 한 대 와서 군인들이 두 명이 내리더니, 총을 대면서 차에 타라고 했습니다. 아줌마들이나 저나 울면서 내려달라고 사정을 하였지만, 군인들은 총을 들이대면서 산속으로 데려갔습니다.
검사: 강간을 당한 경위는 어떤가요?
최혜선: 우리가 반항을 하자 발로 머리를 차고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고 하여서, 울면서 당한 것입니다.
사건이 발생한 산의 위치와 관련하여 최혜선씨는 "백운동 어디라니까. 야산"이라고 진술했다. 뒤이어 검사는 "진술인을 강간한 계엄군의 복장은 어떠한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이렇게 답했다.
"계엄군의 복장은 얼룩무늬였습니다."
이 군부대의 실체에 대해 안종철 국방부 5·18 특별조사위원은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다는 전제를 제시한 뒤, 피해 발생 지역과 부대 배치 상황 등을 근거로 7공수여단 33대대나 35대대, 아니면 11공수여단 병사들이 저질렀을 수도 있다고 추정했다.
그날부터 최혜선씨는 이상 행동을 보였다. 삶의 목표가 없고 항상 우울했다. 관찰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달리는 차에 뛰어들기도 하고, 남의 부부가 자는 방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의 정신적 상처는 아직까지 치유되지 않고 있다.
▲5·18 계엄군.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11공수여단 부대원으로 광주에 주둔했던 이경남씨는 방송 인터뷰에서 "수천 명의 군인들이 광주 시내에서 흩어져 진압작전 하는데, 어떤 놈이 무슨 짓을 하는지 어떻게 통제가 됩니까?"라고 항변했다. 성폭행 만행이 진압군 지휘부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사건이 발생한 5월 19일과 20일은 광주항쟁 초기였다. 유혈충돌이 발생한 지 하루나 이틀 밖에 안 지났다. 지휘관이 부하들을 통제하기 힘든 때가 아니었다.
5월 21일 오후 6시경 시민군이 도청을 접수하고 계엄군이 퇴각할 때까지, 계엄군은 고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인들이 트럭을 이용해 성폭행을 자행했다면, 지휘부가 어떤 이유에서건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계엄군 병사들이 은밀히 민가에 뛰어들어 성폭행을 범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군용차까지 성폭행에 이용했다. 지휘관 눈앞에서 병사 한둘이 사라지는 것과 큰 화물차가 사라지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알았든 몰랐든 지휘관은 책임을 피할 길이 없다. 계엄군 지휘부의 문제이고, 궁극적으로 전두환의 책임이다.
비슷한 시점에 유사한 만행이 많이 벌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황이 있다. 정수만 전 5·18 유족회장은 인터뷰에서 "5·18로 인해 정신분열로 정말 어렵게 정신병원에서 생활하시는 분들이 약 120명 정도 되더라구요"라고 한 뒤 이렇게 말했다.
"고등학생들, 1학년도 있고 3학년도 있고 이렇게 되더라구요."
물론 전두환이 그런 만행을 직접 지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광주를 점령지가 아닌 자기 나라 땅으로 생각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군 기강을 다잡았을 것이다. 지휘부에서 그런 주의를 주지 않았기에, 일부 병사들이 5·18 이튿날부터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다.
계엄군이 광주에서 벌인 만행은, 옛날 같으면 상대방 영토를 빼앗은 뒤 자기 나라 백성을 옮기려 할 때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일이었다. 점령지 백성을 자기 나라 백성으로 만들 필요가 별로 없을 때 나타난 현상이다. 전두환 집단이 광주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에게 광주는 자기 나라 땅이 아니라 그냥 점령지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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