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291914001
[단독]국보 ‘보림사 삼층석탑’ 일제의 엉터리 복원, 80여년 만에 찾아냈다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입력 : 2018.05.29 19:14:00 수정 : 2018.05.29 23:54:20
국보 44호이자 통일신라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석탑인 전남 장흥의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이 일제강점기 당시 복원이 잘못된 채 지금까지 서 있는 것으로 29일 확인됐다. 사진은 조선총독부의 보림사 석탑 복원 공사(1934년 가을)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남쪽 석탑이다. 탑 상륜부의 동그란 장식물인 보륜의 갯수가 4개지만 복원 이후엔 3개로 줄어든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유리 건판(소장품 번호 ‘건판036697’)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보림사 삼층석탑의 북쪽 탑으로 일제의 복원 공사 이전엔 상륜부 보륜의 갯수가 4개로 명확하게 확인된다. 사진은 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유리건판(소장품 번호 ‘건판036669’)이다.
국보 44호이자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대표적 석탑인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전남 장흥군)이 잘못 복원된 채 서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보림사 대적광전 앞에 남북방향으로 자리한 쌍둥이 탑인 보림사 석탑은 일제강점기이던 1934년 도굴에 따른 훼손으로 복원 공사가 이뤄졌지만 석탑 상륜부가 원형과 다르게 복원된 사실이 29일 확인됐다.
80여년 만에 드러난 보림사 석탑의 복원 오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 중인 일제강점기 당시의 유리건판 사진에서 확인된다. 유리건판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식민지배를 목적으로 1909년부터 1945년까지 전국의 유적·유물 등을 촬영한 것이다.
복원 2년 뒤인 1936년 3월 18일 촬영된 보림사 삼층석탑 중 남쪽 석탑. 복원 공사 이전에 4개이던 상륜부의 보륜 갯수가 3개로 줄어들었다. 복원을 잘못한 것이다. 사진은 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유리건판(소장품 번호 ‘건판012690’).
복원 2년 뒤인 1936년 3월 18일 촬영된 보림사 삼층석탑 중 북쪽 석탑. 복원 공사 이전에 4개이던 상륜부의 보륜 갯수가 5개로 늘어났다. 남쪽 석탑에 있던 보륜 1개를 빼내 북쪽 탑에 설치함으로써 복원을 잘못한 것이다. 사진은 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유리건판(소장품 번호 ‘건판012689’).
문화재청과 보림사 등의 문헌자료를 보면, 보림사 쌍탑은 신라 경문왕(재위 861~875년) 때인 870년에 세워졌다. 이후 ‘1933년 겨울’에 도굴꾼들로 인해 탑의 일부가 훼손되자 조선총독부는 이듬 해인 ‘1934년 가을’에 복원공사를 했다.
그런데 복원 시점을 전후한 유리건판 사진들을 비교·분석한 결과, 남북탑 상륜부의 보륜(寶輪·탑 꼭대기의 원반형 장식물) 갯수가 달라지는 등 복원 오류 사실이 드러났다.
복원 공사 전인 193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남탑(중앙박물관 소장품 ‘건판 036697’)과 북탑(‘건판 036669’)의 보륜은 각각 4개씩으로 명확히 확인된다.
하지만 복원 2년 뒤인 1936년 3월 18일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남탑의 보륜은 3개(‘건판 012690’), 북탑의 보륜은 5개(‘건판 012689’)다. 남탑에 있던 4개의 보륜 중 1개가 북탑에 설치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김영민 박사(사진전문경력관)는 “보륜이 각 4개씩인 사진은 촬영 일자가 불명확하지만 전후 맥락상 1930년대 촬영된 것이며, 보륜 갯수가 달라진 사진은 복원 후인 1936년 3월 18일로 촬영 날짜가 명확하다”고 밝혔다.
일제의 잘못된 복원이 고쳐지질 않은채 현재 보림사 대적광전 앞 마당에 서 있는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국보 44호). 각 석탑의 보륜이 4개씩이었지만 일제의 복원공사 이후 왼쪽의 북쪽 탑 상륜부의 보륜 갯수는 5개, 남쪽 탑 보륜은 3개로 쌍둥이 탑임에도 불구하고 높이, 비례가 맞지 않은 실정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남북 석탑의 보륜 숫자가 달라지면서 보림사 석탑은 쌍둥이 탑임에도 불구, 높이나 비례가 맞지 않는 실정이다. 신라 경문왕이 선왕인 헌안왕을 위해 세워 1000여년 동안 유지돼온 석탑이 복원 잘못으로 상륜부의 원형을 잃어버린 것이다. 물론 당시의 잘못된 복원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당시 석탑의 원형 훼손이 일제의 고의에 의한 것인지, 단순한 실수 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일제의 복원 오류가 고쳐지질 않고 80여년 째 그대로 서 있는 ‘보림사 남북 삼층석탑’(국보 44호). 문화재청 제공.
전문가들은 문화재청 등 관련 당국이 적극 나서 원형대로 재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석탑 전문가인 박경식 교수(단국대 석주선박물관장)는 “유리건판은 말이 필요 없는 명확한 사진이다보니 문화재의 원형을 찾는데 매우 유용하고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며 “더욱이 국보이니 만큼 정밀 조사를 거쳐 원형대로 복원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밝혔다.
보림사 석탑의 복원 오류를 처음 제기한 경향신문 독자인 박계윤 장흥한의원 원장(48)은 “수십년 째 보림사를 찾고 있는데, 최근에 남북탑의 보륜 갯수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며 “이제 사진으로 확인된 이상 원형 복원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쌍둥이 탑인데 보륜 갯수가 3개, 5개로 각각 다르다보니 석탑 전체의 높이나 비례가 맞지 않아 의문이 들었다”며 “그 이후 보림사 석탑과 관련된 여러 자료들을 찾게 됐고, 결국 복원이 잘못된 것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보림사 삼층석탑 가운데 남쪽 석탑의 보륜 부분. 일제의 복원공사 이전엔 4개 였으나 잘못된 복원으로 1개가 북쪽 탑에 설치되면서 3개만 남아있다.
보림사 삼층석탑 가운데 북쪽 석탑의 보륜 부분. 일제의 복원공사 이전엔 4개 였으나 잘못된 복원으로 5개가 됐다.
남북 석탑 사이의 가운데에 있는 석등과 함께 국보로 지정된 보림사 석탑은 전문가들 사이에선 9세기 후반 세워진 석탑들 가운데 전북 남원의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보물 37호)과 더불어 상륜부가 원형대로 잘 남아 있는 것으로 평가받아왔다.
보림사 석탑과 동시대에 세워진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828년)의 보륜도 일제의 복원 공사전 보림사 석탑처럼 각 4개씩이다. 경주의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국보 21호)의 상륜부는 보존이 잘된 실상사 탑의 상륜부를 모방, 복원한 것이기도 하다.
보림사 석탑은 설립 경위와 연대 등이 명확한 유례 드문 통일신라시대 후기 석탑이기도 하다. 1930년대 석탑 내부에서 사리합·비단·구슬 등의 사리장엄구와 함께 탑의 조성 연대와 경위 등을 기록한 탑지(塔誌)가 발견된 것이다. 탑지에 따르면 보림사 석탑은 870년 경문왕이 선왕인 헌안왕(재위 857~861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보림사 삼층석탑과 동시대에 세워진 남원의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보물 37호). 상륜부가 잘 보존돼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국보 21호) 복원 당시 실상사 탑의 상륜부를 모방했다. 보륜 갯수가 역시 4개씩이다.
일제가 1934년 복원 당시 잘못을 저지른 보륜은 석탑의 상륜부를 장식하는 주요한 요소의 하나다. 석탑의 머리장식이라 할 상륜부는 각각의 상징성을 띤 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수연~용차 등의 순으로 구성된다. 노반(露盤)은 탑의 최고 꼭대기 옥개석 위에 놓아 상륜부를 받치는 부재로 ‘이슬을 받는 쟁반’이라는 의미로 부처의 은혜를 뜻한다. 복발(覆鉢)은 노반 위에 그릇을 엎어놓은 모양의 부재인데 인도 스투파의 반구형 돔을 형상화한 것이다. 또 연꽃잎이 사방으로 피어 있는 형태의 앙화(仰花)는 복발 위에 놓이는 장식물이다.
앙화 위에 설치되는 보륜은 신들의 공간인 하늘의 세계를 상징한다. 보륜의 갯수는 특별히 정해지지 않아 석탑마다 다르다. 보륜 위에는 마치 보륜을 덮기라도 하듯 덮개 모양의 보개(寶蓋)가 자리한다. 보개 위에는 불꽃 모양의 장식물인 수연(水煙), 구슬 모양의 장식인 용차(龍車)가 차례로 설치돼 석탑 꼭데기를 장식한다. 이들 상륜부 장식물은 일반적으로 찰주(擦柱)라고 불리는 탑의 중심 기둥으로 고정된다. 찰주는 쇠나 돌로 만들어 진다.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보림사는 통일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보조국사 체징(804~880)이 헌안왕 4년(860)에 창건한 사찰이다.
이후 보림사는 구산선문 가운데 가지산문 사찰로 선풍을 드날렸다. 인도의 가지산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3보림’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때 20여동에 이르던 보림사 전각들은 한국전쟁 당시에 대부분이 불에 타 현재는 복원한 건물이들이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소속돼 있다.
1930년대 촬영된 보림사 전경.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유리건판 사진으로 저 멀리 대웅보전 건너편에 삼층석탑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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