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51859.html


일제 때 훼손된 백제 왕릉급 무덤 세상에 다시 나왔다

등록 :2018-07-04 14:39 수정 :2018-07-04 14:47


부여 능산리 서고분군 4기 101년만에 재발굴 

용무늬 금제 장식, 목관 조각 출토

깊숙이 판 굴식돌방 무덤들로 확인 

무덤 사이 제사용 추정 건물터도 나와


2호 무덤에서 나온 용무늬 금속장식. 위쪽 끝이 뾰족한 오각형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표면에 미세한 금속알갱이를 이어붙인 정교한 기법으로 몸 틀며 비상하는 용의 무늬를 넣어 눈길을 끈다.


요즘 옛 백제 고도인 충남 부여(사비)와 공주(웅진) 일대에서는 식민지시대 일본인들이 파헤쳐 조사했던 백제시대 무덤과 유적들이 국내 전문기관들의 재발굴로 새롭게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도굴왕’으로 악명 높았던 가루베 지온이 30년대 굴착했다가 묻어버린 공주 교촌리 3호분을 공주대 박물관이 찾아내 지난달 성과를 발표했고, 이달에는 백제 사비시대 왕릉 영역이던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서쪽 무덤떼가 일본학자들이 발굴한지 100여년만에 다시 얼개를 드러났다.


한국전통문화대 고고학연구소와 부여군은 2016년부터 능산리 서고분군 4기를 조사한 결과 용무늬금제 장식과 목관 조각 따위의 출토품과 돌방(석실)으로 짠 사비시대 특유의 무덤 얼개를 확인했다고 4일 밝혔다.


능산리 고분군은 6~7세기 사비시대 왕릉급 무덤들이 한데 모여있는 국가사적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일부다. 가운데 구역의 왕릉급 무덤 7기를 두고 동쪽과 서쪽에 각각 6기와 4기의 고분군이 있다. 서고분군의 무덤 4기는 가운데 구역 고분군과 1993년 백제 금동대향로가 출토된 능산리 절터 사이 능선을 따라 자리잡고 있다. 앞서 일제강점 초기 조선 고적조사를 주도한 일본 역사학자 야쓰이 세이이쓰가 1917년 처음 여기서 발굴조사를 벌인 바 있다. 당시 야쓰이는 “왕릉군 서쪽 작은 계곡 너머에 있는 능선에서 무덤 4기를 확인하고 그중 2기를 발굴했다”는 짧은 기록과 간단한 지형도만 남겨 지금까지 국내 학계는 고분의 구체적 규모와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3호분 무덤방(석실)의 모습. 잘 다듬어진 돌판들을 맞물리게 짜서 천장 부분을 사다리꼴 모양으로 갈무리한 것은 최근 재발굴된 전북 익산 쌍릉의 석실과 닮았다.


무덤 속 유물은 일제 강점기 조사와 잦은 도굴로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2호분 돌방 바깥의 도굴구덩이에서 용무늬 들어간 초소형 금제 장식과 목관 조각, 금동제 관못이 나와 눈길을 끈다. 길이 2.3cm로 매우 작지만, 끝이 뾰족한 오각형 모양 금속판에 용이 몸을 들며 비상하는 무늬가 미세한 알갱이를 붙이는 기법으로 수놓아졌다. 함께 출토된 목관 조각은 재질이 무령왕릉 목관과 같은 일본 특산종 금소나무로 밝혀졌다. 3, 4호분에서는 목관에 쓴 금속제 관고리와 관못도 나왔다.

4호분에서 나온 금속제 관고리.


발굴된 무덤들은 능선을 따라 위아래로 2, 3호분과 1, 4호분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땅을 깊숙히 파고 바깥에서 굴 모양의 길(연도)을 뚫고 사각형 또는 육각형의 무덤방(현실)을 만든 7세기 사비시대의 전형적인 굴식돌방 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확인된다. 무덤방 안 벽면은 잘 다듬은 돌판으로 짜서 축조했다. 3호분의 경우 최근 전북 익산에서 재발굴된 쌍릉의 무덤방과 빼어닮은 사다리꼴 천장의 얼개를 지닌 점이 주목된다. 연구소 쪽은 “봉분 주위 둘레돌로 무덤 크기를 추정할 경우 2, 3호분이 지름 20m, 1, 4호분은 지름 15m 내외이고, 석실 규모, 석재 가공 정도도 각기 차이가 나타나 무덤주인들의 위계가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무덤들 부근에서 드러난 백제시대 초석건물터 전경. 무덤 제례와 연관된 시설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고분군 주위에서 백제시대의 건물터가 나온 점도 특기할 만하다. 무덤이 없는 서쪽 능선에서 가로 4칸, 세로 2칸으로 추정되는 초석 건물터가, 1호분과 4호분 사이에서는 구덩이(수혈)가 있는 주거터 2기가 발견됐다. 위치나 구조로 미뤄 무덤 조성과 관련된 임시 거처나 제사 시설일 가능성이 있어 백제인들의 매장의례를 밝히는 단서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한국전통문화대 고고학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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