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7163.html?_fr=mt1


한·일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나는 아오키, 이복순, 청목항

등록 :2018-08-11 09:35 수정 :2018-08-11 09:35


[토요판] 커버스토리/ ‘잊힌 이름’ 재한일본인 처 ① 내 이름은 무엇입니까  


광복 뒤 남편 따라 조선 온 일본인 여성들

한국·일본 양국서 모두 잊힌 그들의 이야기


다시 8·15가 돌아왔다. 73번째 광복절을 맞이해 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그 의미를 새기고자 했다. 광복의 두 주인공은 대개 피해자 조선과 가해자 일본이었다.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의 역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어디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재한일본인 처.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조선 남성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1945년 해방 직후 남편을 따라 조선에 온 일본 여성들이다. 한국전쟁과 가난, 가해 국가 출신이란 정체성은 그들의 한국살이를 고단한 시간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한·일 두 나라의 역사에서 모두 잊힌 존재가 됐다. 한국의 피해자 민족주의와 일본의 패배한 제국주의 역사관 모두 그들의 삶을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주로 남성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기록해온 전쟁과 식민지배의 시대를 이들 ‘소수자 여성 집단’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3차례에 걸쳐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카카오스토리펀딩(storyfunding.daum.net) 페이지에서는 총 8화로 구성된 이야기가 8월10일부터 시작됐다. 


기획·글 팩트스토리 박상연·박희영·강민혜·서지연, 사진 아오키 츠네·김종욱 제공


사진은 2000년대 중반에 찍은 70대의 아오키 츠네(오른쪽)와 또 다른 재한일본인 처인 쿠도 치요(1918~2010)의 결혼식 장면. 기획·글 팩트스토리 박상연·박희영·강민혜·서지연, 사진 아오키 츠네·김종욱 제공


아오키 츠네(90)가 서울역 안내센터 앞 의자에 손깍지를 끼고 앉아 있었다. 수요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인데도 서울역은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오키는 가만히 앉아 왼손에 낀 반지 두 개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빨간색 점퍼를 입고 알록달록한 번짐 무늬가 새겨진 하얀 스카프를 맸다. 5년 동안 보지 못한 친구, 가츠라 시즈에(97)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아오키 오른발 옆 종이가방에는 친구에게 줄 선물이 한가득이었다. 점심 식사도 잊고 오후 1시 경주행 케이티엑스(KTX)를 기다렸다. 지난 4월4일, 일기예보는 전국에 비가 온다고 했지만 서울 하늘은 아직 맑았다.


“광복절만 되면 아들이 나 보고 공원도 나가지 말라고 해. 엄마 돌 맞을까봐….”


아오키가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는 전라도와 충청도 사투리를 섞어 말했고, 가끔 경상도 억양으로 발음하는 단어들도 있었다. 일본인으로 태어난 아오키는 전북 진안과 대전에서 30년 가까이 살았다. 부산과 경남 김해에서도 10년 정도 머물렀다. 그는 ‘재한일본인 처’라고 불리며 한국에서 70년 넘게 살았다.


조선인과 결혼한 일본인 아내


재한일본인 처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인과 결혼해 살다가 광복 후 남편과 함께 한국에 정착한 일본 여성들이다. 이들은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조국 대신 사랑을 선택했지만 한국에서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에서는 조선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한일 양국에서 외면 받았다.


현재 재한일본인 처의 수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파악이 어렵다. 논문 ‘재한일본인 처의 생활사’(1999년 김응렬)에 따르면 1977년 771명, 1991년 744명이 ‘부용회’(재한일본인 처 모임) 부산·영남지부에 가입해 있었다. 같은 논문에선 부용회 임원의 말을 인용해 전국 회원을 1983년 1500여명, 1996년 1천여명으로 추산했다. 차별을 피하기 위해 출신을 숨겼거나, 부용회에 가입하지 않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아오키는 1928년 1월16일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났다. 고향 야쿠모는 섬의 잘록한 서남단 지역에 위치했고, 서쪽과 동쪽 모두 바다를 접했다. 그는 고향을 “눈이 많이 오는 곳”으로 기억했다. 자기 어깨 언저리에서 손을 휘휘 저으며, 그만큼 눈이 왔다고 알려줬다.


“대나무가 있으면 끄트머리만 조금 나올 정도로 눈이 높이 쌓였어. 그래서 스키 파는 장수가 있었어. 나무로 만든 스키 사서 고거 타고 학교 댕겼잖아. 그 눈이 4월이나 돼야 녹았어. 요즘 눈은 눈도 아니야.”


어린 시절 아오키의 주특기는 ‘스키점프’였다.


아오키가 고등학생이던 1940년대 초, 탄광과 공장 사이에 있던 그의 집에는 20여명의 조선인 하숙생이 있었다. 그들 대개는 전쟁 중인 일본의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러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아오키의 남편 남점암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조선에서 농부였던 점암은 일본에서 탄광 광부로 일했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 많은 조선인이 일본에서 하급 노동자로 전락했다. 1939년 이후에는 강제 징병에 따른 이주도 급격히 증가했다. 1945년 5월 기준으로 일본에 머물렀던 조선인은 210만 명으로 추산된다. 소수 유학생을 제외한 대다수가 가난한 노동자였다. 1945년 3월 일본 탄광 노동자 41만여 명 가운데 조선인 노동자는 30%에 달했다. 지역에 따라서는 조선인 노동자가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아오키의 고향 홋카이도가 대표적이었다.


점암은 아오키 집에서 가장 오래 하숙한 사람이었다. 3년 정도 함께 생활했다. 가끔 저녁에 시간이 나면 두 사람은 ‘조선말’을 공부했다.


“사람이 순진하고 참 좋았어요. 우리집 농사일, 가축 기르는 일도 많이 거들어 줬어.”


아오키는 조선 사람이 낯설지 않았다. 둘째 언니도 조선인과 결혼했다. 둘째 형부는 경북 안동에 살던 양반댁 자제였다. 아오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집에서는 자연스럽게 점암과의 혼인 이야기가 오갔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공장과 탄광 지대에서는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결혼이 자연스러웠다. 일본 내무성 기관지 <특고월보>에 실린 집계에 따르면, 1939년 12월 말 일본 전국 47개 지역 중 조선-일본인 부부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은 도쿄와 홋카이도였다.


아오키의 부모는 혼사를 서둘렀다. 남성 대다수가 전쟁에 징집된 1940년대 일본에서 여성들은 결혼 상대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부모는 점암이 아오키보다 10살 많았지만, 오랫동안 하숙집에 함께 살아 식구 같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오키의 아버지는 결혼을 앞두고 점암의 고향 전북 진안에 편지를 보내 그의 호적을 확인하기도 했다. 한국에 본처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으나 점암은 미혼이었다. 아오키는 1944년 겨울에 점암과 결혼식을 올렸다. 전쟁통이라 혼례는 일본 전통식으로 간단하게 치렀다. 아오키는 기모노를 입고 머리 모양을 내기 위해 가발을 썼다.


결혼 뒤 1년도 지나지 않은 1945년 조선은 식민지배에서 놓여났다. 아오키는 첫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조선의 광복 소식을 들었다. 점암은 아오키에게 조선으로 가자고 했다. 점암은 조선에 가도 “목욕탕도 있고 화장실도 있고 다 있다”며 아오키를 설득했다. 아오키가 어머니에게 조선에 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반대했다.


“혼자 가라고 하고 너는 여기서 살아라. 아이 키우면서 새로 시집가면 된다.”


1945년 10월14일 아오키는 아이를 낳았다. 그는 자식 걱정이 앞섰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낮잡아 ‘한토진(반도인, 半島人)’이라고 불렀다. 자신은 이혼하고 살 수 있어도 아이가 한토진 소리를 들으며 자랄 게 걱정됐다. 아오키는 남편 점암을 따라 아이와 함께 조선으로 가겠다고 결심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남자와 결혼한 일본인 아내들의 고단한 한국살이

광복 뒤 남편 따라 5천여명 한국행, 한국에선 일본인이란 이유로 외면, 일본선 한국인과 결혼했다며 외면

40년대 홋카이도 고향집 하숙생이던 조선인 광부와 혼인한 아오키 츠네

아이 ‘한토진’ 소리 안 듣게 하려고 한국 생활 시작해 남편 호적 입적, 6·25때 핏덩이 막내 잃고 직접 매장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조선인 남성과 결혼한 뒤 광복과 함께 남편을 따라 한국 살이를 시작한 아오키 츠네. 2000년대 중반 70대의 그가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아오키 츠네 제공


1945년 12월, 눈 내리는 일본 홋카이도 하코다테항에서 출항한 조선행 배가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보름이 걸려 부산항에 도착했다. 갓난아이를 안은 17살의 앳된 아오키와 남편 점암도 그 배에 타고 있었다. 광복 후 남한을 통치한 미군정은 혼란스러운 부산항을 강력히 단속했다. 낯선 조선 땅을 밟은 아오키를 가장 처음 맞은 건 덩치 크고 파란 눈을 가진 미국인이었다.


“미국 사람을 그때 처음 봤어. 남편이 옆에 있는데도 나를 번쩍 들어 올려서 빙그르르 도는 거야.”


160㎝도 안 되는 작은 체구의 아오키는 낯선 이의 무례한 행동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쟁통에 남편 폭력 피해 도망


남편을 따라 하얀 눈을 맞으며 부산에서 전주를 거쳐 전북 진안의 시댁에 이르는 고단한 여정을 아오키는 묵묵히 견뎠다. 흩날리는 눈발을 피해 아기에게 젖을 물리려 잠시 들어간 주막 안에서 처음 만난 할머니 대여섯 명이 신기한 눈으로 기모노 입은 아오키의 손을 잡았다가, 아기 물린 가슴을 찔러보고, 얼굴도 쓰다듬었다.

고생 끝에 도착한 곳은 시집이 아닌 남편의 외숙모 집이었다. 점암은 아오키와 갓난아기를 2~3일간 외숙모에게 부탁하고, 자신의 집을 수리하러 다녀왔다. 일본의 아오키 집과 비교하면 한국에 있는 점암의 집은 변소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열악한 곳이었다. 점암은 집 주변 울을 다시 치고, 변소의 나무판자도 새로 깔았다. 남편없이 외숙모 집에 남겨진 아오키는 예상보다 더 열악한 한국 상황, 낯선 음식과 문화 때문에 입국을 후회했다. 점암의 외숙모가 밥상에 올린 검은 밥에선 알 수 없는 냄새가 났다. 팥을 넣어 지은 밥 냄새가 익숙지 않았다. 조선간장은 너무 짰다. 배가 고팠지만, 동치미 국물을 조금 마실 수 있을 뿐이었다. 밤에는 어디선가 기어 나온 빈대가 아오키와 겨우 잠든 아이를 물어뜯으며 괴롭혔다.


아오키는 남편 점암의 아내로 혼인신고를 해 남편의 호적에 입적됐다. 광복 전 한일 관계상 ‘동일국가’ 내에서의 결혼이었기 때문에, 아오키의 일본 국적은 유지된 상태였다. 아오키는 결혼 생활 6년 동안 아이 셋을 얻었다. 낯선 땅 조선에서 기댈 사람은 남편 점암 뿐이었다. 시어머니와 큰형님 등 대가족이 한 집에 살았다. 낮에 작은 돌무더기 위에 앉아 아이에게 젖을 물리던 아오키는 이웃들이 흉보는 것도 몰랐다. 아기가 죽으면 작은 돌무더기를 쌓아 무덤을 만든다는 사실을 남편이 알려줬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발발 뒤 진안에 북한군이 들어온 것은 7월22일 무렵이었다. 가족들은 피난길에 오르며 뿔뿔이 흩어졌다. 아오키 부부는 어린아이 셋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설 수 없어 진안군 주천면 일대를 전전했다.


“전쟁 때는 니꺼 내꺼 없잖아. 아무 빈집이나 막 들어가서 살았어. 인민군도 농사짓는 사람 해코지는 안 했어. 먹을 거랑 옷, 이불을 다 빼앗아가서 고생했지만.”


피난 생활 중에 아직 핏덩이였던 막내아들을 잃었다.


“죽은 막내를 내가 파묻고 왔지. 눈이 많이 오는 날이었는데, 군용 담요에 싸서 그냥….”


아오키는 한 손엔 죽은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괭이를 들고 눈 덮인 산으로 올라갔다.


“파고 보니까 조금 깊이가 모지래(얕아). 그래서 다시 꺼내 가지고 더 파서 다시 묻고 그랬어. 가(막내)가 살았으면 지금 예순여덟인가 아홉인가.”


엄마 아오키는 아흔이 넘어서도 죽은 막내 나이를 헤아렸다.


전쟁 중 장티푸스가 유행했다. 점암이 장티푸스에 걸리자 가족 모두가 병에 옮았다. 점잖고 성실했던 점암이 돌변했던 것도 이때였다. 그는 술독에 빠져 지내며 걸핏하면 아오키에게 손찌검을 했다.


“나무 베개 있잖아. 그걸로 그 새끼는 얼굴만 때렸어. 하도 맞아서 코가 없어졌어. 맞아서 피투성이가 됐어.”

아오키는 목침으로 얼굴을 맞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코가 깨졌다. 눈이 퉁퉁 부어 손으로 눈꺼풀을 벌려야 겨우 앞을 볼 수 있었다. 전쟁이 한창이었지만 점암의 폭력을 피해 금산까지 50여㎞를 걸어서 도망쳤다. 도망 길에 어린 아들 둘을 데려갈 순 없었다.


재한일본인 처들 대부분은 한국에서 불행한 삶을 살았다. 일본 외무성 관료였던 모리타 요시오의 <전쟁 중 재일조선인의 인구 통계(1968)>를 보면, 1938년부터 1942년까지 일본에서 조선인 남성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은 5242명이다. 그 중에서 5천여명의 여성이 1946년 3월까지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왔다. 이들 중 상당수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거나 자식을 빼앗기고 내쫓겼다.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사람도 많았다.

무작정 도망 나온 아오키는 금산을 거쳐 대전에 닿았다. 당장 배고픔을 해결할 돈이 없었던 아오키는 대전의 한 이발소에서 3년 간 머물며 일을 돕고 잠자리를 해결했다. 이발소 주인 할머니는 조용하고 성실한 아오키에게 바닥 쓸고 닦는 일과 머리 감기는 일을 맡겼다. 하루는 이발소에 평소 왕래가 잦아 안면을 튼 ‘보이’(심부름하는 소년)가 와서 아오키를 찾았다.


“누님, 일본 무역회사 사장이 있는데 누님이 가서 말 좀 해주실라요?”


아오키는 일본인 무역회사 사장의 통역을 도와주고 일본에 있는 큰언니 아오키 스우에게 보낼 편지를 부탁했다.


“남편한테서 도망 나왔다고는 말 못하고, 남편이 죽었다고 했지.”


다시 아들을 피해 도망


며칠 뒤 언니한테서 답신이 왔다. 한국 생활을 접고 무역회사 사장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오라는 내용이었다. 보름 뒤 한 학생이 아오키를 데리러 왔다. 사장 아들이려니 짐작했다. 이발소 주인 할머니는 “남자들 다 도둑놈이니까 가지 말라”며 아오키를 붙잡았지만, 일본에 돌아가고 싶었던 아오키는 그를 따라나섰다. 사장의 집은 서울 동대문 근방이었다. 그는 며칠 동안 집을 비운 상태였다. 아오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사장의 집안일을 도우며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 사흘인가 있으니까 사장 집에 어떤 군인이 찾아왔어. 사장 조카 된다더만. 한밤중에 내방에 들어왔어. 아이고….”


아오키는 사장 조카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때 25살밖에 안 됐으니까…. 무서워서 그날 밤에 도망쳤어. 기차 소리 나는 곳으로 막 뛰었어. 짐칸 있잖아. 거기 탔어.”


1940년대 일본에서 결혼 전의 아오키 츠네(오른쪽 두번째)와 친구들. 아오키 츠네 제공


1945년 10월 부산항을 통해 일본에서 귀국하는 사람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전염병 앓은 뒤 점잖던 남편 돌변, 피난 생활 중 남편 폭력 피해 도망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내쫓기거나 이방인 삶의 고통으로 목숨 끊기도, 재한일본인 처들이 견뎌온 시간들

이혼 절차 못밟아 귀국 못한 아오키, 이번엔 아들 폭력 피해 다시 도망, 

바느질·청소일 등으로 생계유지하며 일본 귀국 포기하고 살아온 70여년, 외로운 시간 견디게 해준 ‘부용회


아오키는 일본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절실해졌다.


1951년 일본 귀국을 희망하며 부산항에 모인 일본인 ‘부녀자’는 450여명(그해 1월25일 <동아일보>)이었다. 연합군 총사령부에 일본 입국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호적 초본이나 경찰서장의 인증 등 일본인이라는 증거서류가 필요했다. 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체결을 계기로 조선인 호적에 입적한 일본인 아내들의 일본 호적을 소멸시켰다. 아오키의 일본 호적도 이때 소멸돼 한국 국적만을 보유하게 됐다. 남편 점암의 한국 호적에 올라있는 아오키가 일본 입국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이혼 절차를 밟아야 했다.


1960년대 초 한일 수교를 위한 회담이 결렬을 거듭하고 있었다. 아오키는 일본으로 가는 ‘야메배(밀선)’를 구해 타기 위해 부산 부전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하며 뱃삯을 모았다.


“배 타기가 쉽지 않았어.”


미국 국적의 선박이 아니거나 연합군 총사령부, 또는 일본상선관리국으로부터 운항 허가를 받지 않고 38도선 이남의 조선반도를 오가는 해운은 불법이었다. 많은 일본인과 조선인이 쓰시마 해협과 조선 해협을 건널 때 밀항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운항 요금은 비쌌다. 조선인 한 사람당 75엔에서 150엔을 받았지만, 귀국을 원하는 일본인에겐 한 사람당 150엔에서 200엔(미군정기 자료를 토대로 펴낸 <주한미군사>)을 받았다.


1965년 6월22일 한일 정부는 14년 동안 끌어온 국교 정상화 협상을 마무리 짓고, ‘한일 양국의 국교 관계에 관한 조약’을 조인했다.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십수년을 부산에 머무르며 건어물 장사를 하던 아오키는 이 무렵 김해 출신 남자 김태우를 만났다. 그는 불도저 운전사였다.


“나보다 3살 아래야. 그 사람은 일본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고, 담배나 술도 안 하고. 사람이 괜찮았어.”


부인과 사별한 김해 남자는 슬하에 아들과 딸을 두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아오키는 김해로 내려가 밭일을 도우며 함께 살았다.


김해 생활 6년째에 태우가 사우디아라비아로 출장을 갔다. 그 사이 아오키는 장티푸스를 앓았다. 태우의 어머니는 시름시름 누워 있는 아오키가 짐스러웠다.


“동네 사람이 그러는데, 누룽지 썩은 걸로 나를 멕이더래. 시어머니 되는 사람이 나 죽었다고 사우디에 편지를 했어.”


아오키가 죽었다는 편지를 받고 태우는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남자가 밭일하던 아오키 앞에 섰다.


“내가 죽었다는 얘기 듣고 온 거야. 와서 자기 엄마한테 집에서 나가라고 하더라고. 죽지도 않은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1970년대 초반 40대에 들어선 아오키는 남편 점암과의 이혼 절차를 밟기 위해 진안으로 갔다. 진안에서 마주한 두 아들은 아오키의 기억 속 4살, 6살이 아니었다. 군대에 다녀온 첫째 아들은 한번에 알아보지도 못했다. 남편 점암은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새 살림을 차린 점암은 아오키와 이혼하려 했지만 아들이 반대했다. 동네 사람들이 “엄마를 일본으로 보내주면 평생 못 본다”며 겁을 줬다. 아들은 “이혼 도장을 찍어주지 말라”며 아버지를 막아섰다.


“어머니는 내가 잘 모실게요.”


진안에 묵은 지 보름이 지날 무렵 아오키를 데리러 온 태우 앞에서 아오키의 아들이 엄마를 붙잡았다. 아오키는 김해에 있는 태우의 자식들을 돌보는 것보다 피붙이인 자식들과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태우는 사우디에서 번 돈 500만원을 아오키에게 주며 “잘 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뱃삯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 부전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할 때(1965년)의 아오키 츠네. 아오키 츠네 제공


1974년 당시 “일본인은 승차 거부”라는 문구를 써붙인 전북 군산 지역 택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일본행을 포기하고 한국에서 아들과 살기로 한 아오키는 진안에 작은 막걸리집을 열었다. 진안 사람들은 아오키를 ‘이복순’이라고 불렀지만, 이름만큼 복 많고 순하게 살 순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오키의 가게에 들렀다. 술 취한 남자 손님들의 농담과 추행이 잇따랐다. “일본댁 연애 한 번 하자”며 손을 덥석 잡거나 무작정 끌어안았다. 못하던 욕만 늘어갔다.


“시불놈들, 미친놈들.”


한 동네에서 살림을 따로 살던 남편 점암은 일흔을 갓 넘긴 나이에 죽었다. 아오키를 향해 동네 사람들은 “일본댁 한국 남편 죽었는데 얼마나 우나 보자”며 쑥덕거렸다.


40년 만에 되찾은 이름 ‘청목항’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 12**번지. 고된 장사 생활 15년 만에 쌀 17가마니를 주고 산, 한국 땅에서 아오키가 소유한 첫 번째 집이 됐다. 그 집에서 작은아들이 술만 먹으면 남편 점암처럼 폭력을 행사했다. 가게에서 술 항아리를 깨부수고, 몇 십 통 떼어다 놓은 수박을 집어 던지곤 했다.


“술이라면 정말 지긋지긋 해.”


한국에 남은 이유였던 아들 때문에 예순을 넘긴 나이에 아오키는 다시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자식이라 어디 말할 데도 없이 아오키는 홀로 속앓이를 했다. 무작정 서울행 기차를 탔다. 1980년대 서울 변두리엔 판자촌이 즐비했다. 아오키가 가장 먼저 자리 잡은 곳은 미아리 산 중턱의 초가집이었다. 바느질, 인형 만들기, 청소도우미 등 아오키는 생계를 위해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외롭고 고단한 삶에 한줄기 위안은 있었다. ‘부용회’. 아오키와 같은 재한일본인 처들의 모임이었다. 아오키가 1960년대 초 부산에 살 때 부용회 부산지부가 수정동에 있었다. 부용회를 찾아간 그가 일본 가는 방법을 물었을 때 “합의 이혼을 해서 호적을 정리해야 일본에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일본행은 무산됐지만 진안에 돌아갔을 때 부용회 전주지부에서 잠시 활동했었다. 아오키가 본격적으로 부용회 활동을 한 건 서울살이 때부터였다. 1970년대 말 그가 처음 서울 부용회에 갔을 때만 해도 50여 명의 회원이 있었다. 부용회는 유일하게 아오키를 반기는 ‘집’이었다.


동네 친구로 가족처럼 정을 나누던 가츠라상, 사람 좋기로 소문난 나가시마상, ‘한 성깔’ 하던 마츠모토상, 잘 웃던 고마다상…. 서울 부용회 마지막 회장인 구마다 가츠코는 어려운 살림의 아오키를 챙겼다. 일본대사관은 일본 국적의 재한일본인 처에게 소정의 생활보조금을 지급했으나, 아오키는 한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받지 못했다. 구마다는 아오키에게 생활보조금 지원을 해달라고 일본대사관에 요청했다. 아오키가 자원해 매달 부용회 식구들의 식사를 책임지던 수고를 보상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서울 부용회 건물이 노량진동에서 대방동으로 이동하고 회원들이 하나둘 세상을 달리해 문을 닫기까지 아오키는 개근 회원이었다.


정부 차원에서 재한일본인 처 지원책을 강구하기 시작한 건 한일 국교정상화(1965) 이후인 1969년이었다. 한일 정부는 일본인 처들을 일본으로 송환하기 위한 계획에 합의했고, 일본 정부는 ‘재한일본인의 보호대책비’ 명목으로 1억3000만엔(13억원)을 지원했다. 그 과정에서 1960년대 한국에 머물러 있던 일본인 처의 절반 이상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길 희망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인의 반일감정과 궁핍한 생활 때문이었다.


1970년대 한국 생활 30여년 만에 처음 일본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만난 40대의 아오키 츠네(윗줄 오른쪽 세번째). 아오키 츠네 제공


2000년대 중반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위치한 부용회 서울지부 앞에서 아오키 츠네(오른쪽 두번째)가 재한일본인 처 친구들과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아오키 츠네 제공


국내 유일의 재한일본인 처 복지시설인 경주 나자레원(원장 송미호)은 일본인 처 147명의 일본 귀국을 도왔다. 나자레원은 한국 국적을 가진 일본인 처들도 돌아가길 희망하면 호적 정리를 통해 귀국 절차를 밟도록 지원했다. 아오키는 그 정보를 접하지 못했다. 40여년 전은 지금처럼 정보가 빠르게 공유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귀국 시도가 번번이 좌절된 아오키는 아들을 피해 서울로 올라온 뒤부터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아이고, 그냥, (귀국한다는) 생각도 못했어요.”


대신 아오키는 ‘고향 방문’(단기 비자) 목적으로 일본을 꾸준히 찾았다. 아오키가 일본의 가족을 다시 만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재한일본인처 고향방문 후원> 프로젝트(한국인 단체인 ‘부용회 후원회’ 지원)로 아오키는 한국에 온 지 30여년 만에 일본으로 건너가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첫 방문은 안동으로 시집온 둘째 언니와 함께였다.


“버선발로 뛰어오시는 아버지를 보는데, 내가 일본말을 잊은 거야. 부둥켜안고 눈물만 흘렸잖아.”


그날은 온 집안이 야단법석이었다. 연신 고개만 끄덕이며 울었다.


아오키 츠네의 한국 이름은 ‘청목항’(靑木恒)이었다. 츠네를 한국식으로 표기했다. 1985년 이후에야 아오키는 ‘복순이’ 대신 ‘청목항’을 얻을 수 있었다. 1984년 12월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이 비준되어 이듬해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호적법이 개정되었다. 이때 한국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도 고유의 성과 본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2000년대 중반 서울 성북구 월곡동에서 친자매처럼 지내던 아오키 츠네(왼쪽)와 가츠라 시즈에. 아오키 츠네 제공


지난 4월 경북 경주시 나자레원에서 5년 만에 다시 만난 90살의 아오키 츠네(오른쪽)와 97살의 가츠라 시즈에. 박희영 제공


5년 만에 만난 두 친구


서울에서 경주는 고속열차로 2시간15분이 걸렸다. 아오키는 자리에 앉아 선물 꾸러미와 가방을 창 쪽 벽에 가지런히 뒀다. 그는 잠도 청하지 않고 창문 밖 풍경만 바라봤다. 신경주역을 빠져나왔을 때는 흐린 하늘에서 부슬비가 흩날렸다.


아오키가 90살이 된 지금 서울 부용회(‘부용회 본부’ 역할을 해온 부산지부도 이름만 유지될 뿐 사실상 활동 중단)는 사라졌다. 2004년까지만 해도 12명에 달했던 회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 남은 이들 중에서도 다리가 불편한 가츠라 시즈에는 5년 전 나자레원에 들어갔다. 가츠라는 나자레원으로 가기 전까지만 해도 아오키의 반려견 ‘삐삐’와 ‘딱지’를 돌봐준 유일한 동네 친구였다. 두 사람은 서울시 월곡동에서 10m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


짙은 청색 기와지붕을 얹은 나자레원으로 들어갔을 때 가츠라가 휠체어를 타고 아오키를 맞았다.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이….”


만나자마자 얼굴을 부비며 가츠라는 아오키 걱정부터 했다.


“난 괜찮아요. 언니는?”

“2년만 있으면 100살이야. 나 예쁘지?”


5년 만에 만난 두 친구는 서로를 깊이 끌어안았다. 아오키가 차고 있던 하얀 진주 팔찌를 풀어 가츠라 손목에 채웠다. 건물 밖에서 벚꽃이 지고 있었다.


기획·글 팩트스토리 박상연·박희영·강민혜·서지연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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