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61121


한 가족을 파멸시킨 수사관, 훈장 받고 별 일 없이 산다

[잔인한 훈장 ③] 간첩 조작 사건으로 망가진 서창덕씨 가족의 삶

18.08.12 11:47 l 최종 업데이트 18.08.12 11:47 l 정대희(kaos80)


▲  군산 성산공원에 잠들어 있는 고 서창덕 어르신 ⓒ 정대희


그는 벽 안에 잠들어 있었다. 작은 유리문 너머로 납골함이 보였다. 여기에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옆으론 웃고 있는 가족사진이 놓여 있다. 거기엔 아들이 쓴 편지가 있었다.


"아버지 저 잘살게요. 어머니, 엄마, 잘 모실 테니 그곳에서 아프지 마시고 지켜봐 주세요. 아빠! 사랑해요."


지난 1일, 군산에 있는 성산공원을 찾았다. 이른 아침, 납골당은 텅 비어 있었다. 여기에 그가 있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간첩이 됐던 사람이다. 서창덕(71)씨다. 지난 5월 15일, 그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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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뵐 때마다 고문 수사관을 처벌해야 한다고 했다. 최근엔 고문 수사관의 훈장이 취소되지 않을 거 같다며, 화를 내셨다. 결국 다 못 보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함께 납골당을 찾은 변상철 '지금여기에' 사무국장의 말이다.


고 서창덕씨가 말한 '고문 수사관'은 보안사 수사관 A(65)씨다. 지난 1985년, 그는 서씨를 간첩으로 검거한 공으로 '보국훈장광복장'을 받았다. 조작한 간첩 사건으로 훈장을 받은 거다.


머리에 총 겨누며 위협... 끔찍한 기억


▲  오른쪽이 서창덕. 고문후유증으로 병원을 찾는 일은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 변상철


그래서다. 서씨는 마지막까지 '고문 수사관' A씨의 처벌을 바랐다. 끔찍한 기억이 있어서다. 훈장이 취소되지 않아 화를 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건, 고문과 구타의 기억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조사결과 보고서에 적힌 그의 증언은 이랬다. 발췌한 내용을 그대로 싣는다.


"포승줄로 손을 묶더니 양쪽 기둥에 쇠막대기를 걸고서는 양손을 그곳에 매달아 저의 몸이 그 쇠막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매달아 놓고서는 수사관이 야전침대 각목으로 저를 사정없이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약 20여 분간 가슴이고 다리고 마구 구타하여 나중에는 피를 토할 정도였습니다.


수사관이 '이런 새끼는 본을 보여줘야 해'라면서 때렸습니다. 그렇게 맞다가 결국 기절하게 되었습니다. 깨어 나보니 참 창피한 이야기지만 제가 똥을 다 쌌더라고요(이때 진술인은 한참을 울먹이다) 그러더니 보안대 놈들이 군인 팬티를 갖다 주면서 갈아입으라고 하고는 주는데, 똥 씻을 물도 주지 않아서 그냥 팬티에 쓱쓱 닦았습니다."


이게 다가 아니다.


"한번은 제가 허위사실을 인정하지 않자, 저의 머리에 총을 겨누며 '야, 이 새끼야, 너 같은 새끼 하나 죽여도 누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 너 같은 새끼 토막을 내 죽여서 바다에 던져도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 에구, 총알도 아까워서 못 쏘겠다' 하면서 겁을 주는데 정말 저를 죽일 것만 같아 너무 무서워 벌벌 떨기만 하였습니다.


수사관이 구둣발로 사타구니(고환 부위)를 걷어차 너무나 고통스러운 부상을 당하였는데, 이 부상으로 온몸이 오그라들어 한동안 제대로 걷지 못하였으며, 나중에 재판을 할 때에도 교도관이 부축을 하여 재판정을 출정하였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여 교도소에서 병사에 있었습니다."


지난 2008년, 법원은 서창덕씨에게 무죄를 판결했다. 그가 '고문과 구타로 만들어낸 조작된 간첩'이란 게 밝혀졌다. 국가폭력 피해자는 그렇게 사건이 발생한 지 24년 만에 죄를 벗었다.


남편이 '간첩'이라고 따라다니며 감시... 아들은 삐뚤어졌다

▲  최옥선 씨가 일하는 다방에 '정 형사'는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 정대희


진실이 드러났으나 고문 수사관은 처벌받지 않았다. 서창덕씨의 삶만 망가트린 게 아닌데도 그랬다. 아내 최옥선(65)씨도 '간첩 남편'을 둔 죄로 고단한 인생을 살아왔다.


성산공원을 떠나 군산 시내에 있는 다방에서 최씨를 만났다. 그는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찾아 헤매던 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생전 어디 가서 자고 오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세 살배기를 등에 업고 온 동네를 뛰어다녔죠. 그렇게 물어물어 찾아간 게 전주보안대에요. 거기 가서 서창덕씨 혹시 있냐고 물으니 있다고 하데요. 반갑더라고요. 그래서 얼굴 한 번 볼 수 있냐고 하니 안 된데요. '땡깡' 놓다시피 했죠. 그랬더니 '아주머니도 여기서 조사를 받아야 하는데, 아기가 있어 집으로 돌려보낸다'면서 서류를 내밀데요. 무섭더라고요. 쓰라는 대로 다 썼어요.


어느 날, 전주북부경찰서에 갔어요. 부대에서 거기로 가보라고 하데요. 가서 서창덕씨 있냐고 물으니 거기 있던 사람이 그래요. 어쩌다 그렇게 됐냐고. 사람이 아침에 질질 끌려갔다가 저녁이면 피투성이가 돼서 온대요. 그리고 아침에 또 질질 끌려가고. 끝내 얼굴은 못 봤죠. 그러다 부대에 다시 찾아가니 며칠에 군산 법원으로 오래요. 거기서 봤어요. 수인번호 333을 달고 있던 남편을. 10년을 '땅땅땅' 때리데요."


"진석 아빠"는 그 길로 교도소로 갔다. "진석 엄마"는 먹고살기 위해 막노동판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철근도 엮으러 다니고, 합판에 박힌 못을 빼는 일도 했단다. 하지만 문제는 겨울이었다. 소일거리도 없었단다. 지인의 소개로 그때부터 다방에서 일하게 됐다고 했다. 이때, 그 사람이 찾아왔단다.


"하루는 다방으로 '정 형사'라는 사람이 찾아왔어요. 남편이 교도소에 가기 전에도 이따금 집에 찾아와 남편의 행방을 묻던 사람이었죠. 가슴이 철렁했어요. 주방에서 일하고 있으면, 잘 보이는데 앉아 한참은 있다가 가요. 그런 게 일주일에 한두 번은 됐죠."


최씨는 다방을 그만뒀다. "정 형사"의 눈을 피해 다른 다방에 취직했단다. 감시가 끝나지 않았다. 며칠 뒤, 정 형사가 다방에 찾아왔다고 했다. 이번에도 주방이 잘 보이는 의자에 앉아 최씨를 지켜봤단다. 주인에게 말을 붙일 때도 시선은 최씨에 고정돼 있었다고 한다. 이번에도 최씨는 견딜 수 없었다. 다시, 다방을 나왔다. 그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됐단다.


마지막으로 정 형사를 본 건, 이혼하고 나서란다. 최씨는 정 형사가 "이혼하면, 안 쫓아다닌다"고 했단다. 그 말대로 했단다. 먹고살려면 일을 해야 했고, "진석이"를 키우려면 돈이 필요했단다.


감시에서 풀려났으나 마음고생은 끝나지 않았단다. 최씨의 말이다.


"셋방살이 할 때에요. 동네에서 무슨 안 좋은 일만 터지면, 사람들이 찾아와요. 우리 애가 '말짓'(해서는 안 되는 나쁜 행동)한 거라고. 다른 집 애가 말짓해도 우리 애만 혼내고 소리 지르고 그랬어요. 아빠가 교도소 간 집 아들내미라고.


'진석이'도 어디서 듣고 왔는지 '아빠가 간첩이냐'고 했다고 막 소리를 질러요. 엄마는 아빠 외국으로 돈 벌러 갔다고 하더니 다 거짓말이었다며. 그러더니 애가 삐뚤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애들도 선생님도 "간첩 자식"... 아버지가 미웠다


▲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한 '납북어부 서창덕 간첩 조작 사건'의 보고서 ⓒ 정대희


서진석(37)씨도 말을 쏟아냈다. 군산 시내 커피숍에서 인터뷰하면서 '간첩 자식'으로 살아온 날들을 끄집어냈다. 죄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간첩 새끼'라고 왕따를 심하게 당했어요. 애들한테 엄청 두들겨 맞았죠. 선생님도 저를 많이 때렸어요. '간첩 자식'이라고. 이때는 괄시받고 무시당했던 기억만 있어요.


저한테도 형사가 따라 다녔어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두 번은 제 뒤를 쫓아다녔죠. 답답하대요. 학교에 가면 맞고 안 가도 동네 형들이 때리고, 형사들이 따라 다니고. 살 수가 없더라고요. 나쁜 친구들과 어울렸죠. 그 애들은 저를 버리지는 않았거든요. 그러다가 소년원도 가고 교도소도 가고..."


- 아버지와 사이가 어땠나요?

"정이 없었어요. 제가 아버지 때문에 너무 당했거든요. 중학교 때인가? 제가 복싱을 했어요. 어릴 때부터 하도 맞아서 배운 거죠. 그때는 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와서 같이 살 때인데, 어느 날 저를 때리더라고요. 쇠파이프로. 손뼈가 다 으스러져 운동을 그만뒀어요. 제가 소년원에 갔을 때도 아버지는 면회 온 적도 거의 없었어요. 아버지가 정말 미웠어요."


- 가장 힘들었던 기억이 있나요?

"한 번은 제가 아버지한테 물었어요. 왜 우리는 짜장면 한그릇도 밖에 나가서 못 먹느냐고. 아버지가 그러데요. 무섭다고. 또 잡아갈까봐 무서워서 밖에 못 나가겠다고. 아버지는 거의 밖에 나가지 않았어요. 항상 아버지 뒤에는 사람이 있으니까. 저는 저대로 힘들었죠. 초등학교 때부터 가출을 반복적으로 했고, 나쁜 길로 빠지게 됐죠."


- 납골당에서 다정하게 찍은 가족사진과 편지를 봤어요

"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아버지가 엄마랑 면회를 왔는데, 처음으로 우시면서 그러더라고요. 사랑한다고. 그때 정말 죽고 싶었어요. 내가 왜 여기에 있나 이런 생각도 들고. 이게 다 내 탓이구나. '나가서 아버지한테 잘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5년 만에 집에 왔는데, 아버지가 아팠어요. 제가 전주로, 서울로 병원을 모시고 다녔어요. 서울서 병원 생활 할 때는 한 달간 옆에서 병실 생활도 했죠. 그때 아버지랑 밥도 같이 먹고, 이야기도 많이 했어요. 어느 날은 이불 없이 자는 저한테 점퍼를 덮어주는데, 행복하더라고요. 그 뒤로 항암치료를 받으러 여기저기 다니셨는데, 그때마다 모시고 다녔죠. 그러다가 가족사진도 찍게 됐어요. 제 인생에 가장 행복한 날이었죠."


-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찾은 게 있나요?

"사실 아버지는 저한테 굉장히 폭력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더 미워했죠. 근데 나이를 먹으면서 알겠더라고요. 그게 다 저를 생각해서 그런 거란 거. 제가 피해를 볼 까봐 그런 거라고요. 그래서 아버지 주위 사람들은 아들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제가 '아들'이라고 하면, 다들 놀랐죠.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간첩'이 됐다가 무죄 판결받았으나, 어찌 됐든 '간첩 자식'이란 소리를 들을까 봐 그러셨던 거를 나중에 알았어요."


끝나지 않은 국가폭력


끝으로 서진석씨와 헤어지며 약속한 게 있다. 그가 행정안전부에 가는 날, 함께 가기로 했다. 서창덕씨의 삶을, 최옥선씨의 인생을, 그리고 서진석씨의 미래를 뒤바꿔 놓은 A 때문이다. A의 훈장은 아직 박탈되지 않았다.


지금도 '고문 수사관' A는 보훈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다. 국가폭력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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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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