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80827162747822


"환영인파인 줄 알고 구속자 가족에 손 내민 전두환"

박준배 기자 입력 2018.08.27. 16:27 


오월어머니들이 기억하는 '전두환'과 첫 만남

1980년 5월 광주를 재현해 진상규명 공감대를 모으는 38주기 5·18민주화운동 전야행사가 5월17일 오후 광주 동구 금남로 거리에서 펼쳐진 가운데 5월 어머니를 선두로 민주대행진이 펼쳐지고 있다. 2018.5.17/뉴스1 © News1 남성진 기자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를 받는 전두환씨(87)가 끝내 재판에 불참한 가운데 오월어머니와의 악연이 재조명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구속되거나 부상당한 가족들로 구성한 오월어머니 회원들은 5·18민주화운동 이듬해 전씨와 처음 만났던 날을 잊지 못했다.


오월어머니회원인 장삼남씨(82)와 정현애 오월어머니회 이사장(66)은 27일 뉴스1과 통화에서 37년 전 그때를 기억했다.


오월어머니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80년 5·18민주화운동이 끝나고 그해 9월 대통령에 취임한 전씨는 이듬해 2월17일 초도순시차 광주를 방문했다.


당시는 오월어머니회가 꾸려지지 않았고, 구속자 가족들이었다. 이들은 5·18과 관련해 사형 선고 반대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고 있었다.


당시 재판 진행 상황은 조작되거나 삭제돼 기록이 부정확하지만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80년 10월25일 계엄 보통 군법 회의 선고 공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5명, 무기징역은 7명, 징역형은 163명이었다.


사형은 정동년·배용주·박노정·김종배·박남선씨 등 5명, 무기징역은 홍남순·정상용·허규정·윤석류씨 등 7명이었다. 정현애 이사장의 남편인 김상윤씨와 장삼남씨의 아들 박철씨 등은 각각 징역 20년과 7년형이었다.


구속자 가족들은 '김대중의 사주를 받아 광주사태가 일어났다'고 덮어씌우려는 신군부의 내란 조작을 밝히는 데 주력했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증거와 증인을 수집해 법원에 제출했다. 서명과 탄원서를 받아 청와대에도 냈지만 사형과 무기징역 판결을 막지는 못했다.


정 이사장은 "온갖 방법을 다 썼지만 안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었다"며 "그래서 나온 게 대통령이 된 전두환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그 와중에 상무대 군인들과 학생들로부터 전두환씨가 광주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광주 서구 까치고개를 넘어 북구 유동 삼거리를 지나 금남로 전남도청에서 브리핑을 받는다는 소식이었다.


가족들은 전남도청 앞에서 기다렸다. 한 어머니는 아이 기저귀 안에 '사형수를 없애주세요' '구속자를 석방해주세요'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담고 있었다.


금남로 도로에는 동원된 공무원을 비롯한 시민들이 길게 늘어서 환영행사를 하고 있다. 경비는 삼엄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익명의 수집가로부터 입수한 영상. 1980년 5월 20일부터 6월 1일까지 국군통합병원과 적십자병원 환자 치료 상황, 전남도청 기자회견 등 광주 일대와 근교를 촬영했다.(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영상 갈무리)2018.5.9/뉴스1 © News1


멀리서 경호차량 1대가 앞장서고 뒤이어 전씨가 탄 차량이 들어섰다. 가족들은 플래카드를 꺼내 들었으나 곧바로 경호원들과 형사들에게 빼앗겼다.


플래카드가 막힌 가족들은 동시에 전씨의 차량 앞으로 뛰어들었다. 가족들이 뛰어들자 차 안에 있던 전두환씨는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가족들의 손을 잡았다.


"가족들이 뛰어드니까 전두환은 환영 인파인 줄 알고 손을 내밀더라구요. 가족들이 차 앞으로 뛰어가 드러눕고 보닛 위에 올라가고 막아서자 그때서야 차량이 후진하기 시작했죠. 제가 전두환 손을 잡고 가장 다급했던 요구사항 두 개를 얘기했죠. '사형수를 없게 해주세요' '구속자를 석방해주세요'."


순식간에 벌어진 예상치 못한 상황에 현장 분위기는 살벌해졌다. 무장한 경호원들은 곧바로 권총을 꺼냈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다.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그 말을 하는데 경호원들이 권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철커덕' '철커덕'. 그 순간 시민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보호하니까 총을 쏘지는 못했죠."


전씨는 차량을 돌려 전남도청으로 들어갔고 가족들은 전남도청 앞에서 전두환을 만나게 해달라고 농성을 했다.


시민들이 도청 안으로 들어오는 걸 우려했던 신군부는 가족들만 들어오게 했다. 모두 13~4명 정도가 도청에 들어가 비서실장과 경호실장, 전남부지사 등을 만나 입장을 전달했다.


전두환은 만나지 못했지만 전남도청 안으로 들어간 가족들은 이후 별다른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문제는 가족들 중 미처 전남도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5명이었다. 여자 4명과 남자 1명, 장삼남씨도 그 중 1명이었다. 이들은 수갑을 찬 채 동부경찰서에 끌려갔다. 장씨는 도청 밖에 있던 가족들이 주동자로 몰려 '죽도록' 맞았다고 전했다.


"'야 이 X아, 우리 형님이 내려오신디 차를 잡고 흔들어야' 하면서 군인들에게 귓방망이를 맞아서, 지금도 제가 고막 한쪽이 없어요. 나중에는 곤봉으로 때리는데 2대, 3대 맞을 때는 눈에서 불이 퍼뜩퍼뜩 났는데 그 이후에는 하나도 안 아파. 밤새 맞았죠."


밤새 이어진 폭행 후 신군부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김대중씨가 도움 줘서, 시켜서 했다는 말을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아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도움 받지도 않았다, 내 새끼 구하려고 한 거다라고 했고."


결국 풀려났지만 죽도록 맞은 장씨는 부상을 입었고, 그 후유증으로 나중에 5·18 유공자가 됐다.


장씨는 "81년 광주를 방문해 차 밖으로 손을 내밀던 전씨의 그 모습을 잊을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전두환의 회피하기만 하려는 모습을 보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 이사장도 "당시 경호원들이 장전했던 권총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며 "전씨는 살아생전 기필코 재판을 받아 처벌을 받아야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전씨는 지난해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5·18민중항쟁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해 '가면을 쓴 사탄',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할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적시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받고 있다.


전씨측은 애초 이날 열릴 예정이던 재판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으나 '건강 상태'를 이유로 재판 하루 전 불참을 통보하고 끝내 출석하지 않았다.


nofatejb@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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