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7091
'불도저 서울시장', 이명박이 원조 아니었구나
[북촌을 걷다⑥] 100년 동안 변화한 광화문 네거리
18.10.07 19:50 l 최종 업데이트 18.10.07 19:50 l 글: 유영호(ecosansa) 편집: 최은경(nuri78)
▲ 원형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기념비전(1912년 촬영) ⓒ 서울역사박물관
▲ 1979년 복원한 모습 모습, 담장이 사라지고 없는 상태이다. 현재 기념비전이 수리 중이라 위 사진은 서울역사편찬원에서 발간한 <서울 2천년사>에 수록된 사진이다(2016년 촬영) ⓒ 서울역사편찬원
앞서 살펴 본 '기념비전'은 그 설립의도는 나름대로 근대국가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지만 외세에게 주권을 빼앗긴 뒤로는 마치 '꿔다 놓은 보리자루' 마냥 방치된 상태에서 일제강점기를 보내야만 했다. 또 1912년 총독부는 지금의 광화문네거리에 있던 황토현 언덕마루를 깎아 버리고 이곳에 광장을 조성했다. 이후 광화문통(현 세종대로)을 넓히면서 기념비전의 돌대문인 '만세문'(萬歲門)과 담장을 헐어냈다. 이때 헐린 만세문은 충무로에 살던 한 일본인이 구매하여 자기 집 대문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난 뒤 전쟁을 겪고 난 1954년에 이르러서야 새로 보수하면서, '만세문'을 찾아 일부를 복원하였다. 하지만 담은 사라지고 없어 현재까지 철제 울타리로 담을 대신하고 있어, 복원이라 하기에는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기념비전의 변화는 이처럼 일제의 침략과 한국전쟁에 그치지 않았으며, 1960년대 서울의 도시개발에 밀려 원래의 위치에서 동북쪽으로 약간 이전하였다. 그러다 1979년에 전면적으로 다시 고쳐 현재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광화문네거리의 변화를 시작으로 서울시 전체의 밑그림을 새롭게 그린 김현옥 서울시장에 대해 알아보고 서울시의 변화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무계획이 상책'이라는 서울시장 윤치영
1963년 공화당 박정희와 민주당 윤보선이 대결한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치영은 윤보선의 삼촌임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를 도와 3공화국 발족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논공행상 차원에서 서울시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취임사에서 자신은 '평생 정치활동만 해 왔기 때문에 행정은 전혀 아는 것이 없다'라고 고백했을 만큼 서울시정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 서울시정에 무능함을 스스로 고백한 윤치영시장이 역대 서울시장 가운데 기록적인 활동을 한 것은 ‘행운의 열쇠’ 증정이었다. 내외귀빈, 주로 외국 귀빈들에게 주는 이것은 1957년~1965년 동안 9명의 시장이 총 195개의 열쇠를 증증했는데 윤치영시장 혼자서만 139개를 주어 75%를 차지했다. 위 사진은 주중대사에게 증여하는 모습이다. ⓒ 서울시청
이 시기는 이미 전쟁 후 일자리를 찾기 위해 서울로 밀려드는 농촌인구로 이미 서울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의 슬럼화된 도시로 변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서울시 국정감사 때 국회의원은 "좀 더 좋은 도시를 만들 수 없느냐?"며 인구집중에 대한 대책을 요구했지만 윤치영 시장은 도리어 "만약에 내가 멋진 도시계획을 해서 서울시가 정말로 좋은 도시가 되면 더욱더 많은 인구가 서울에 집중될 것"이라며 "농촌인구가 서울에 몰려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서울을 좋은 도시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라고 답변했다. "도시계획을 하지 않고 방치해 두는 것"이 그 방안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1964년 2월 국회에서 서울로 이주하려면 해당 지역의 도지사 전출허가뿐만 아니라 서울시장의 전입허가를 요구하는 '이주허가제'에 대한 입법조치를 요구했다. 그런 법률조치가 없다면 누가 서울시장을 해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당시 이러한 그의 발언은 라디오와 신문을 통해 전국에 보도되며 온 국민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보다 더 놀란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엄정한 현실을 직시하며 이 해에 최초의 대도시 인구집중방지책이 세워지고 이를 주도적으로 집행해 나갈 새로운 서울시장으로 당시 부산시장이었던 김현옥이 임명된다. 그는 1926년 경남 진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사환(벨보이)으로 중학교를 수학한, 실질적으로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서민 출신이다.
그러다 해방 후 육사 3기로 입학하여 전쟁에 참전하였고, 그 뒤 5.16쿠데타에도 부산 제3항만 사령관으로 참여한 인물로,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러한 김현옥에 의해 서울이란 도시는 해방 후 최대의 격변을 겪게 되었다(손정목, <한국도시 60년의 이야기>).
40세의 '불도저 시장' 김현옥
군 출신으로 40세에 서울시장이 된 김현옥은 1966년 4월 4일 출근하는 첫 날 광화문네거리의 혼잡함을 보고 그날로 도시계획국장과 건설국장을 호출하였다. "광화문네거리 교통처리대책이 서 있으면 지금 곧 시장실로 가져오라"는 것이 특명 1호였다. 이렇게 출근 첫 날 하루 만에 특명 8호까지 발표했다.
그리고 4일 뒤에 대시민공약사항 제1호로 서울시 교통난 완화책을 발표하며 "늦어도 8월 15일까지 교통난 31%를 완화할 것"을 공약했다. 불과 4개월 안에 이런 일을 하겠다고 공약한 것이다.
▲ 김현옥 서울시장의 취임식 겸 첫 출근날의 모습. 이날 하루 만에 특명 8호까지 발표하는 등 그야말로 그의 재임기간 내내 서울시는 ‘공사 중’이었다. ⓒ 서울시청
이렇게 내려진 특명 1호는 정확히 보름 뒤인 4월 19일 광화문(세종로)지하도 공사를 착공하게 만들었고, 이것 외에도 같은 날 신세계백화점 앞 육교를 착공했고 도로 공사 등 각종 공사를 군대식으로 밀어붙였다. 그는 "24시간 5교대로 단 1분도 쉬지 말고 공사를 하라"며 관계자들을 다그쳤다.
이리하여 광화문지하차도는 5개월 만에 완공시켜 지금까지 광화문네거리의 땅 속을 십(十)자 형태로 관통하고 있다. 당시 대리석 기둥과 조명등으로 매우 화려해 보였으며, 김현옥은 "동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지하도"라고 자랑했지만 완공 6일만에 금이 간 천정에서 물이 쏟아져 지나던 행인을 덮치고, 바닥이 가라앉는 등 부실공사가 드러났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공사를 계속 내밀었다.
한편 광화문네거리는 이렇게 변하고 이후 종로 확장공사로 인하여 '기념비전'이 현재의 자리로 약간 이전한 것이다(1966년 광화문 지하도 공사… '속전속결' 국가적 사업이었죠': 서울신문 2013년 1월 5일).
이처럼 김현옥은 서울시장 취임 후 광화문네거리를 첫 사업으로 시작하여 이후 서울 외곽간선도로를 확장하고, 곳곳에 육교와 지하도를 건설했으며, 또 터널을 뚫기 시작하는 등 그야말로 서울시 전체를 '공사중'으로 만들었다. 서울시 주요 외곽간선도로(독립문~구파발, 돈암동~수유리, 왕십리~광나루, 청량리~망우리 등)의 확장은 물론 각종 터널(사직터널, 삼청터널, 남선1호-2호터널), 강변도로, 북악스카이웨이, 세운상가 등 모두 김현옥 임기 중에 건설된 것들이며 현재까지도 일부 남아있는 서울시의 육교 상당수가 그의 임기 때 건설되었다. 이리하여 그에게는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명이 항상 따라 붙는 것이다.
하다못해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유격대의 청와대습격사건 이후에는 서울시는 아예 "싸우면서 건설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여의도윤중로를 건설하였다. 하지만 그처럼 불같이 밀어붙이던 김현옥의 날림식 도시계획은 1970년 4월 8일 와우아파트 붕괴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김현옥의 서울시장 재임시절 이러한 날림식 도시계획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여건상 불가피했던 부분도 상당했던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그의 재임 4년 동안 현 서울시 도시계획의 기초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1968년 1월 21일 북의 청와대습격 사건 이후 서울시가 여의도 윤중로 위에 내건 건설 표어(1968. 5. 31) ⓒ 서울시청
한편 취임 후 제1공약이 서울시도로교통 완화였듯이 그는 열흘 지나 서울시경 앞, 신세계백화점 앞, 대한극장 앞 등 6개의 육교를 착공했고, 6월에는 안국동로터리, 이대입구 등 10개를 착공해 그 해 총 16개의 육교를 건설했다. 이처럼 육교의 무더기 착공에 한 야당의원은 '서울특별시가 아니라 서울육교시'라고 논평했다(경향신문 1966.7.30).
더욱이 이러한 본격적인 육교시대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는 미니스커트가 유행하면서 여성들은 상당히 불편했다. 특히 이대입구에 육교가 설치되면서 결국 일부 이대생은 논의 끝에 '육교 사용 보이콧'을 결정했다고 한다(동아일보 1966.8.29)
광화문삼거리?
앞서 이야기했듯이 일제강점기 현 광화문네거리에 있던 황토현을 깎아내고 도로를 평탄화 했다.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광화문네거리에서 덕수궁 방면으로 뚫린 길은 그저 작은 도로가 있었을 뿐 본래 삼거리였다. 광화문에서 교보빌딩까지는 조선의 한양 천도 이래 육조거리(일제강점기 광화문통)라는 한성부에서 가장 큰 도로였으며, 그 양 옆으로는 이호예병형공 등 육조를 위시한 각종 관청이 늘어섰다.
그리고 그 끝 부분인 광화문네거리에는 나즈막한 황토현 고개마루가 조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바로 덕수궁 쪽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종로1가를 따라 현 종각까지 가서 남대문 방향으로 큰 길이 나 있었고 종각 일대에는 육의전을 비롯한 시장이 들어서 있었다.
▲ 일제강점기 태평로(광화문~남대문 구간) 건설 전후의 변화 ⓒ 유영호
그러나 1913년 무렵 광화문네거리에서 남대문까지의 도로 역시 '광화문통'과 같은 크기의 넓은 직선의 도로망이 새로 조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도로명칭도 그 이전의 '신교통'(新橋通)에서 '태평통'(太平通)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는 당시 경성의 중심과 일본군기지가 있는 용산을 직선으로 잇는 작업이었으며, 향후 이 직선상에 놓이게 될 경복궁 조선총독부(1926)와 경성부청(1926) 그리고 남산에 들어서게 될 조선신궁(1925)의 공사를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동안 경복궁과 광화문네거리에 존재했던 황토현 및 숭례문을 직선으로 연결하지 않고 종각을 거쳐 이르도록 '고무래 정'(丁)자 모양으로 도로를 개설한 것은 풍수지리상 불의 산인 관악산의 화기가 법궁으로 바로 미치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도시설계에서 그것은 아무런 의미 없이 사라지고 '정(丁)' 자 형태의 도로망은 '일(一)' 자 형태의 도로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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