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551394


육군훈련소에 울려 퍼지는 친일파의 노래... 이럴수가

[친일 작곡가, 그 실체 ①] <가고파> <목련화> 작곡가 김동진

김종성(qqqkim2000) 19.07.10 08:10 최종업데이트 19.07.10 14:29 


'애국가'와 '고향의 봄', 그리고 '가고파'까지. 아이와 어른 모두 무심코 흥얼거리는 이 노래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친일 음악가들의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친일 작곡가, 그 실체'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 친일 음악가들의 행적을 추적한다. [편집자말]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라

 

살다 보면, 불편함을 유발하는 물건이나 추억이 이따금 생겨난다. 그럴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들을 치워버린다. 물건의 용도나 추억의 내용 자체는 나쁘지 않을지라도, 그것과 얽힌 사람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을 경우에 그렇게 한다.

 

찜찜한 물건이나 추억을 옆에 두고도 아무렇지 않게 태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입문>에서 "어떤 일이 불쾌한 감정과 결부돼 있으면,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불쾌감이 되살아나므로 그 기억을 좋아하지 않는 원리"가 존재한다며 "(인간이) 불쾌한 인상을 망각하기 쉬운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한두 사람도 아니고 공동체 전체에 그 같은 불쾌감을 주고도 남을 만한 것들이 수도 없이 널려 있다. 구체적 형상을 가진 물건뿐만이 아니다. 우리 귀에 자극을 주는 음(音)들 중에도 그런 것들이 많다. 즐겨 부르거나 듣는 노래 중에도 그런 게 한둘이 아니다.

 

위에서 가사 일부를 소개한 가곡 <가고파>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이 애창하는 대표적 가곡 중 하나인 이것은 친일파 김동진(1913~2009)이 작곡한 노래다. 작사가 이은상의 경우, 친일 논란이 있지만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돼 있지 않다. <가고파> 같은 노래에마저 친일파의 혼이 담겨 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의 만주국 지배 합리화하는 음악 활동에 종사

 

▲1997년 11월 14일자 <한겨례신문>에 실린 김동진 인터뷰.ⓒ 한겨레신문

  

김동진은 이름은 안익태나 홍난파보다 덜 알려져 있지만, <가고파> 외에도 매우 친숙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작곡가는 덜 유명하지만 작품은 매우 유명한 이 상황이, <음악과 민족> 제26호에 실린 음악학자 신인선의 논문 '김동진'에서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표현돼 있다.

 

"김동진이라는 작곡가 이름은 몰라도 <가고파>, <목련화>, <내 마음> 등의 가곡은 음악 애호가는 물론, 음악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 민족음악학회에 의해 2003년 발행.

 

<목련화>도 상당히 유명하다.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희고 순결한 그대 모습/ 봄에 온 가인과 같고"로 시작한다. 작사가 조영식은 친일파가 아니다. <내 마음>도 꽤 익숙하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 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로 시작한다. 시인 김동명의 작품에 김동진이 곡을 붙인 노래다.

 

위 논문의 표현처럼 <가고파>, <목련화>, <내 마음>은 많은 한국인들이 잘 알고 있는 노래들이다. 이런 노래들이 실은 친일파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불유쾌한 감정을 유발시키는 친일파의 작품이란 것을 진작 알았다면, 이런 노래들을 흥얼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랫동안 흥얼거렸다고 생각하면, 당장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수도 있다. 

 

그런 불유쾌함을 우리에게 제공한 친일파 김동진은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1913년 출생했다. 23세 때인 1936년, 평양 숭실전문학교(고등학교 상당)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38년 3월 니혼(日本)고등음악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곧바로 만주의 신징(新京)에서 직장을 구했다. 지금의 지린성(길림성) 성도인 창춘(장춘)에서 음악가 생활을 본격 개시했던 것이다.

 

그곳에는 1932년 3월 1일 수립된 일본제국주의의 괴뢰, 만주국이 있었다. 신징은 만주국 수도였다. 1945년 8월 한국에 돌아오기 전까지 거기서 일제의 만주국 지배를 합리화하는 음악 활동에 종사했다.

 

일본을 위해 음악을 만들었던 김동진


사랑을 찬미하는 노래를 많이 듣다 보면 사랑의 감성이 풍부해지듯이, 일제의 만주 지배를 찬미하는 노래를 많이 듣다 보면 일본의 지배를 당연스레 받아들이게 된다. 김동진은 그런 정치적 효과를 생산해내기 위한 음악 활동에 참여했다. <친일인명사전> 김동진 편에 이런 설명들이 있다.

 

"1942년 1월 열린 신징교향악단 정기공연에서 오족협화(五族協和, 오족은 일본·조선·만주·중국·몽골인을 가리킴)와 왕도낙토(王道樂土)의 만주를 그린 교향곡 <만주에 의한 찬가(滿洲に依する讚歌>)를 연주했다."

 

"같은 해 5월 18일부터 22일까지 만주 오족협화회원 6만 5000명이 신징에 모여 개최한 '제3회 건국 10주년 경축 흥아(興亞)국민동원 전국대회'에서 신징음악단과 함께 참가해 연주했다."

 

"같은 달에 대동아전쟁의 의의를 철저하게 관철시킬 가요 등을 보급하려는 목적으로 만주작곡연구회가 설립되자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했다."

 

"1943년 1월 신징기념공회당에서 만주악단협회와 신징음악단 공동 주최로 열린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악곡 발표회'에서 관현악곡 <건국 10주년 경축곡>, <양산가>와 합창곡 <건국 10주년 찬가> 세 곡을 직접 작곡하고 지휘해 발표했다. <양산가> 이외의 두 작품은 오족협화와 왕도낙토의 만주국 통치 이념, 그리고 일본의 대동아 건설을 그린 작품들이다."

 

친일 이력은 이 정도로 소개하고자 한다. 죄다 소개하자면 지면이 부족하다. 일본 유학 뒤 일본에 남거나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만주로 떠난 그는, 위와 같이 일본인이 해야 할 일을 만주에서 수행했다. 이 공로로 만주국 문교부대신이 주는 문교부대신상을 받기도 했다.

 

그처럼 만주에서 열심히 활동했지만, 떠날 때는 미련 없이 신속히 떠났다. 해방된 달인 1945년 8월 만주국을 떠나 평양으로 남하했다. 그 뒤 1950년 한국전쟁 때 남한으로 한번 더 남하했다.

 

일본을 위해 음악을 만들었던 김동진은 동족을 배신한 지난날에 대한 반성도 없이, 해방 뒤에는 동족에게 음악을 제공하는 활동을 했다. 그가 대한민국에 제공한 대표적 작품 중 하나가 오늘날까지도 육군 병영에서 울려퍼지고 있다. 육군훈련소에서부터 듣게 되는 대표적 군가인 <육군가>가 그의 작품이다.

 

악보에 '정중하고 씩씩하게' 부르라고 적힌 <육군가> 가사의 전반부는 다음과 같다. 육군본부 홈페이지 내의 이 페이지(https://c11.kr/8bqo)에서 '음원 다운로드'를 클릭하면 곡조를 들 수 있다.

 

백두산 정기 뻗은 삼천리 강산

무궁화 대한은 아세아의 빛

화랑의 핏줄 타고 자라난 남아

그 이름은 용감하다 대한 육군

앞으로 앞으로 용진 또 용진

우리는 삼천만 민족의 방패

앞으로 앞으로 용진 또 용진

우리는 삼천만 민족의 방패

 

이 노래의 비중이 얼마나 큰가는, 육군본부 홈페이지에서 '참모총장 인사말'과 같은 코너에 이 노래가 특별히 소개돼 있는 데서도 느낄 수 있다. 육본 홈페이지에서는 "정중하면서 경쾌하고 기품이 넘치며, 육군의 용맹스러운 기개가 잘 표현되어 있는 육군의 대표 군가"라고 설명하고 있다. 

 

▲육군본부 홈페이지에 소개된 <육군가>.ⓒ 육군본부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나라를 지켜야 할 육군 장병들이 친일 매국노의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매국노가 영혼을 불어넣은 노래가 육군 장병들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주지는 않을지 매우 우려스럽다. 

 

김동진이 지은 군가는 이뿐만이 아니다. 대표적 군가인 <국군의 날 노래>, <행군의 아침>도 그가 만들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로 시작하는 <6·25의 노래>도 그가 작곡했다. 가곡뿐 아니라 군가에도 그의 영혼이 '잔뜩' 묻어 있는 것이다.


김동진, 그리고 박정희

 

한편 박정희 정권 때 자주 울려퍼졌던 <조국찬가>에 대해서는 확인이 필요하다. "동방에 아름다운 대한민국 나의 조국/ 반만년 역사 위에 찬란하다 우리 문화/ 오곡백과 풍성한 금수강산 옥토낙원/ 완전통일 이루어 영원한 자유평화"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김동진은 1955년 발표했다. 오곡백과가 풍성한 옥토낙원을 노래한 작품이다.

 

그런데 만주에서 '오족협화'와 '왕도낙토'를 찬미하던 시절에 김동진이 지은 작품 중에도 <조국찬가>가 있었다. 그런데 그 <조국찬가>는 오늘날 알려져 있지 않다.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1942년 6월 만주작곡연구회 제1회 발표회에 자작품 가곡 3곡을 발표했고, 이 작품들은 신징방송국을 통해 방송되었다. 이후에도 신징방송국을 통해 김동진이 공동으로 창작한 일본어 교성곡 전 3악장의 <조국찬가>도 발표되었다. 김동진은 해방 후인 1955년에도 같은 이름의 작품을 발표했으나, 동일성이나 관계성 여부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가 일본어로 만들었다는 <조국찬가>가 해방 후 만든 <조국찬가>와 동일한지 여부에 대해 확인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들에 '김동진 작곡'이 많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불유쾌함을 주는 것인 줄 알았다면 진작 치워버렸을 텐데, 그런 줄도 모르고 흥얼댔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착잡해질 수도 있다.

 

▲<육군가> 악보. 육군본부 홈페이지에 실려 있다.ⓒ 육군본부


친일파의 노래라고 죄다 배척하면 앞으로 무슨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다. 

 

김동진 같은 친일파의 작품이 한국 사회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작품이 대단해서만은 아니다. 친일파가 여전히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측면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우리 국민들이 이 작품들의 실체를 좀더 속속들이 알게 되면, 그간 친일 음악인들에게 가려졌던 훌륭한 음악가들의 작품이 자연스레 부각될 것이다.

 

일제의 만주 지배에 협력했던 김동진은 해방 뒤에도 잘 나갔다. 자신의 영혼이 담긴 노래들을 세상에 내놓는 한편, 대학에서는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그러다 박정희 정권 때는 과거처럼 정치적 음악 활동에 다시 매진했다. 박정희는 김동진이 만주에서 활동할 때 신징군관학교(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가 된 인물이다.

 

김동진은 박정희 군사독재를 위해서도 음악을 만들었다. 5·16 쿠데타 직후부터 그랬다. 1961년 '5·16 혁명 백일제 경축음악회'에서 자작곡 <조국광복>, <조국수난>, <조국재건> 3부작을 발표하고 지휘했다. 또 1966년 '5·16혁명 대예술제', 1967년·1971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을 위해서도 노래를 만들거나 연주를 지휘했다.

 

김동진은 박정희 정권 때 서울시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장, 예술원상, 3·1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리고 10년 전인 2009년, 세상을 떠났다.

 

▲'재경마산향우회'가 가곡 <가고파>를 작사작곡한 이은상과 김동진의 동상 건립을 추진하는 가운데, '이은상-김동진 동상건립 저지 시민대책위원회'는 19일 창원시청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독재찬양 이은상, 일제찬양 김동진 동상건립 계획을 즉각 취소하라"고 촉구했다.ⓒ 윤성효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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