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20311
세조의 딸 사랑한 숙부?...헉!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2 드라마 <공주의 남자>, 네 번째 이야기
11.09.01 14:35 l 최종 업데이트 11.09.01 18:34 l 김종성(qqqkim2000)
▲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 오른쪽 끝이 김종서(이순재 분). ⓒ KBS
김종서 가문에게 있어서 수양대군(세조)은 원수 중에서도 원수다. '하늘에까지 사무칠 원한을 심어준 원수'라는 의미의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란 표현이 이보다 더 적절한 경우도 없을 것이다. 이 점은 수양대군이 일으킨 쿠데타인 계유정난에 의해 김종서뿐만 아니라 그 자손들까지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이 가문의 족보인 <순천 김씨 대동보>에 따르면, 김종서의 아들들은 다섯이다. 승규·승벽·승유·석대·목대 순이다. 뒤의 둘은 서자이고, 나머지는 적자다.
셋째아들 김승유(박시후 분)가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의 주인공이다. 드라마에서는 그가 공주의 선생 역할을 했다고 하지만, 족보상으로 나타나는 관직은 승정원 주서(정7품)뿐이다. 승정원(대통령비서실)에서 일지를 기록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족보를 열어 보면, 계유정난의 재앙이 이 집안을 무참히 짓밟고 간 흔적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김종서의 다섯 아들 중에서 승유를 제외한 전부가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한밤중에 찾아온 수양대군을 만난 김종서, 결국...
승규·승벽의 최후는 <단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계유정난 당일의 상황을 담은 단종 1년 10월 10일자(1453.11.10) <단종실록>에 따르면, 장남 승규는 사건 당일 아버지와 같은 장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10월 10일 밤에 수양대군이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김종서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김승규는 문 앞에 앉아 다른 두 명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그에게 아버지를 좀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연락을 받고 한참만에야 나온 김종서는 수양대군에게 집 안으로 들어가자고 권했다. 하지만, 수양대군은 날이 저물었다면서 그냥 문 밖에서 이야기하고 가겠다고 말했다. 몇 마디의 대화가 오고간 뒤에 수양대군은 청탁할 것이 있다면서 김종서에게 편지를 건넸다. 김종서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편지를 펼쳐보았다. 상대방을 경계했던 것이다.
▲ 김종서의 장남인 김승규(허정규 분). ⓒ KBS
수양대군이 한밤중에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은 순간부터 김종서는 바짝 긴장했다. 그는 수양대군의 수하가 적다는 보고를 받은 뒤에야 안심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칼자루에서 칼을 뽑아 벽에 걸어두고 나왔다. 김종서가 연락을 받고도 한참만에야 나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 정도로 경계했기에, 몇 걸음 물러서서 편지를 펴보았던 것이다.
김종서는 밤중이라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아서, 고개를 숙여 달빛에 비춰 가며 편지를 읽었다. 그의 시선이 편지에 고정되자,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수양대군의 수하가 김종서에게 쇠몽둥이를 내리쳤다.
불의의 공격에 아버지가 쓰러지자, 놀란 김승규는 얼른 달려들어 아버지의 몸에 엎드렸다. 그러자 수양대군의 또 다른 수하가 칼을 뽑아 김승규에게 내리쳤다. 이렇게 김승규는 아버지를 자기 몸으로 감싼 상태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을 마친 수양대군은 말에 올라타 유유히 돌아갔다.
수양대군 측은 곧바로 김종서의 다른 아들들을 찾아 나섰다. 김종서가 먼저 내란을 일으켰다고 선언한 수양대군 측은, 김종서의 아들들 역시 역모에 가담했다면서 그들에 대한 체포작업에 돌입했다.
김종서 손자들까지 겨냥한 수양대군의 칼날
6일 만인 음력 10월 16일(11.16), 수양대군 측은 차남 김승벽의 소재를 파악했다. 제보를 받은 수양대군 측은 경기·충청 지역을 전전하던 김승벽을 잡아들였다. 수양대군 측은 증거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에게 내란 공모죄를 씌워 사형에 처했다.
증거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사형이 집행됐다는 점은 단종 1년 11월 1일자(1453.11.30) <단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록에 실린 구형 의견은 이렇다. "김종서는 주범입니다. 그가 거병하고자 했다면, 김승벽도 필시 추종했을 것입니다. 이를 가벼이 다룰 수 없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 정황 증거만으로 사형이 구형됐고, 힘없는 단종은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김승유를 제외한 두 명의 적자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한편, 서자인 석대·목대의 경우는 그들이 계유정난 때 사망했다는 점만 알 수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수양대군의 칼날은 김종서의 아들들뿐만 아니라 손자들까지 겨냥했다. 김승규의 세 아들 중 2명, 김승벽의 네 아들 중 3명이 계유정난으로 목숨을 잃었다. 유독 김승유 부자만큼은 화를 모면했다.
이처럼 수양대군은 김종서 집안을 순식간에 짓밟아 놓았다. 철천지원수란 표현이 이렇게 적합한 경우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집안의 생존자들이 수양대군에게 얼마나 큰 분노를 품고 여생을 살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과연 누가 철천지 원수와 결혼을 했을까
▲ 김종서의 셋째아들 김승유(박시후 분). ⓒ KBS
그런데 이런 가운데서도 수양대군 자손과 김종서 자손 사이에서 줄리엣과 로미오가 나왔다고 하니, 이보다 더 기이하고 드라마틱한 한 일도 없을 것이다. 조선 후기 서유영의 민담집인 <금계필담>에 따르면, 계유정난 직후에 대군의 딸과 김종서의 손자가 결혼을 했다고 한다. <공주의 남자>에서는 대군의 딸(이세령)과 김종서의 아들(김승유)이 사랑을 했다고 하지만, 민담에서는 대군의 딸과 김종서의 손자가 결혼을 했다고 한다.
<금계필담>의 이야기를 100%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 책은 수백 년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민담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 이야기 속에는 스토리의 진정성을 의심케 하는 일부 정황들이 존재한다(8월 4일자 기사 참조). 서유영 본인도 자기 이야기의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김종서 자손과 수양대군 자손이 결혼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선에서 이해하는 게 타당하다.
<금계필담>의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면, 승규·승벽·승유·석대·목대 중 어느 쪽에서 '로미오'가 나왔을까? <공주의 남자>에서 김승유와 이세령의 사랑을 다루고 있으니, 혹시 김승유의 아들인 김효달이 그 주인공은 아닐까? 2가지 정황을 볼 때, 김효달은 절대로 아니다.
첫째, <순천 김씨 대동보>에 따르면, 계유정난 당시 김효달은 아직 어린아이였다. 친척의 등에 업혀 난을 피했다고 하는 기록에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금계필담>에서는 '로미오'가 계유정난 직후에 쌀을 짊어지고 다닐 정도의 청년이었다고 했다.
둘째, <금계필담>의 로미오는 자기 아버지가 계유정난 때 목숨을 잃었다고 말했다. 김승유는 목숨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아들이 '로미오'였을 리는 없다. 이런 점들을 본다면, 승유를 제외하고 승규·승벽·석대·목대의 장성한 아들 중 하나가 로미오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석대·목대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적어도 족보상으로는 그렇다. 사망자 중에서 아들을 둔 사람은 승규와 승벽이다. 승규의 아들 1명과 승벽의 아들 1명이 계유정난 때 화를 모면했다고 했으므로, 그중 한 명이 <금계필담> 속의 로미오였을 가능성이 있다. 김승유의 조카 중 1명이 '철천지원수'의 딸과 결혼을 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공주의 남자> 속의 김승유는 '애절한 사랑'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엉뚱한 사랑'의 주인공이 되는 셈이다. 김승유와 <금계필담> 속의 '줄리엣'은 숙부와 조카며느리(질부)의 관계니, 드라마에서는 숙부와 조카며느리가 연애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상당히 '독특한' 설정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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