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41645


대재앙에 전 재산 내놓은 여성 CEO "내 소원은..."

[역사, 그 밖의 이야기들 2편] 제주 거상 김만덕이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

11.03.24 13:28 l 최종 업데이트 11.03.24 13:37 l 김종성(qqqkim2000)


▲  KBS1 드라마 <거상 김만덕>. ⓒ KBS


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세계인들의 측은지심이 일본을 향해 쏠리고 있다. 정부는 정치·경제적 동기로 일본을 지원하는 측면이 있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개개인들은 그저 순수한 인간애로 이웃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다. 일본을 돕는 세계인들의 행동은 맹자의 비유에 의해 적절히 설명될 수 있다. <맹자> '공손추' 편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들이 어린애가 우물로 들어가려는 것을 문득 발견하고는 모두 깜짝 놀라며 측은지심을 갖는 것은, 어린애의 부모와 교분을 맺기 위한 것도 아니고 향당(지역사회)과 친구들로부터 명예를 얻기 위한 것도 아니며 악명을 얻을까봐 두려워해서도 아니다."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애를 보고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구출하고자 하는 것은, 아이의 부모와 친분을 쌓기 위한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한 것도 아니며 남의 불행을 외면했다는 악명을 피하기 위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동료 인간이 위급에 처하는 순간, 인간 내면에서는 순수한 측은지심이 즉각적으로 발동한다는 것이 맹자의 말이다. 


측은지심이 발동한 한 여인, 전 재산을 내버리다


이웃이 당한 대재앙 앞에서 이 같은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가장 소중한 것' 즉 돈을 통째로 내버린 한 여인이 있었다. 물론 돈보다 더 소중한 것도 많지만, 평생 돈만 생각하며 돈만 번 사람에게는 돈이 가장 소중한 법이다. 돈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사람이 전 재산을 내놓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돈을 최고로 치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문제의 주인공은 조선 후기의 제주 거상인 김만덕(1739~1812년)이다. 지난 2010년, KBS1에서 그를 소재로 한 드라마 <거상 김만덕>을 방영한 적이 있다. 김만덕은 남존여비의 봉건시대 여성으로서, 그것도 비주류인 섬사람으로서 남성들은 물론 육지 사람들까지 감동시킨 인물이다. 그의 행적은 정조 20년 11월 25일 자(1796.12.23) <정조실록>에까지 거론될 정도였다. 


그래서 추사 김정희를 비롯해 정약용·박제가·채제공 같은 지식인들은 김만덕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냈다. 정조의 최측근으로서 정조 21년(1797)에 <만덕전>을 집필한 채제공은 "만덕의 이름이 한양 안에 가득하여 사대부와 선비 등 계층을 가리지 않고 모두 다 그의 얼굴을 한번 보고자 했다"며 격찬했다. 


▲  김만덕. ⓒ 김만덕기념사업회


김만덕은 일반인(양인)의 딸로 태어났다. 하지만 어릴 때 고아가 된 탓에, 부득이하게 관기(관청 소속 기생)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계속 이렇게 살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스무 살 무렵 관청에 청원하여 양인 신분을 회복하고 관기의 굴레에서 벗어나 상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가 상업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제주 특유의 산업환경 때문이기도 했다. 세종 1년 9월 11일 자(1419.9.30) <세종실록>에서는 "제주의 토지는 본래 메말라서 …… 농업을 하지 않고 상업에만 힘쓰는 자가 매우 많다"고 했다. 친(親)농업적인 조선 본토와 달리 친상업적인 제주의 풍토가 김만덕의 결단을 촉구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제주 상인들의 교역 대상은 전라도였다. 이들은 제주와 전라의 중간에 있는 추자도를 중간 거점으로 해서 강진·나주·해남과 교역을 했다. 김만덕이 큰돈을 번 것을 볼 때, 그가 이끄는 상단도 이런 식으로 영업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김만덕이 직접 전라도에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뒤에서 설명한다. 


김만덕은 어떤 상품으로 돈을 벌었을까? 제주에서 육지에 판매한 상품은 해물·녹용·우황·감귤·잣·말·말총 등이었다. 실학자 박지원이 쓴 <허생전>에도 주인공 허생이 제주에 가서 말총을 모조리 사들여 매점매석을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제주 상인들이 육지에서 사들인 상품은 곡식·면화·소금 등이었다. 4면이 바다인 제주에서 소금을 왜 구입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모른다. 그것은 제주의 바닷가에는 암초와 여울이 많아서 소금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또 바닷물을 끓이려면 가마솥이 필요한데, 제주에는 무쇠가 나지 않아서 가마솥을 구하기 힘들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소금을 매입했던 것이다. 


이런 정황을 볼 때, 김만덕 상단도 해물·녹용·우황·감귤·갓·말·말총 등을 육지에 팔고 곡식·면화·소금 등을 뭍에서 사는 방법으로 매출액을 늘려나갔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추자도를 거점으로 전라도와 무역을 한 점이나 위의 상품들을 취급한 점에서는 김만덕 상단이나 여타 상단이나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만덕 상단에는 남다른 경영전략이 있었다. <만덕전>에서는 "그는 재산을 늘리는 데 재능이 있어서, 시세에 따라 물가의 높고 낮음을 잘 짐작하여 사고팔기를 계속하니 몇 십 년 만에 부자로 이름을 날렸다"고 했다. 


▲  제주의 말. 서귀포시 소재 송악산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김만덕의 경영전략은 다름 아닌 매점매석이었다. 오늘날에는 매점매석이 공정거래법상의 불공정 거래행위에 해당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상당히 각광을 받는 경영전략이었다. 매점매석은 단순히 자금만 많다고 해서 잘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정보력·판단력·결단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점은 그가 오로지 돈만 생각했으며 돈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만덕의 성공에 도움을 준 또 다른 요인으로서 정조의 중소상인 육성정책을 들 수 있다. 특권상인인 시전 상인이 갖고 있던 금난전권(노점상 단속권)을 폐지한 신해통공 조치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듯이, 정조는 중소상인을 육성하는 데 힘썼다. 관기 출신의 김만덕이 거상으로 성장한 데는 당시의 국가시책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외에, 김만덕의 성공을 일군 요인으로서 투명한 사생활도 들 수 있다. 그는 독신여성이었다. <만덕전>에 따르면, 그는 남자들을 머슴으로 부리면서도 그들과 사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 남의 입방아에 오르기 쉬운 독신여성 CEO로서 스캔들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자신을 엄격히 관리한 것이다. 


김만덕이 거상이 된 진짜 이유는?


▲  제주의 민가. 서귀포시 소재 산방산 근처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김만덕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거상이 된 것은 경영전략 때문만도 아니고 국가시책 때문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생활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김만덕은 자산이 많아서 거상이 아니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거상이었다. 그는 평생 악착 같이 모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그것도, 일본 대지진 못지않은 대재앙이 발생했을 때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내던졌다.


정조 19년(1795), 제주에 대기근이 발생했다. <만덕전>에서는 굶어 죽은 백성들의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일 정도였다고 한다. 인명 피해로만 본다면, 제주 대기근이 일본 대지진보다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다. 


김만덕은 결심했다. 전 재산을 털기로 한 것이다. 그는 육지에서 쌀을 구입한 뒤에 이를 제주도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는 제주 소비자들이 '구매력'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선에서만 도움을 주려 하지 않았다. 그런 속셈을 갖지 않았다는 점은 그가 전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한 데서 잘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판매력'이 0으로 떨어지는 것을 저지하지 않았다. 


이를 대단히 여긴 중앙정부에서는 김만덕에게 상을 주려 했다. 하지만, 그는 수상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한양에 가서 임금님 계신 곳을 바라본 다음에 금강산에 들어가 1만 2천 봉을 구경해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제주 여성이 뭍에 상륙하는 것은 불법이었기에, 물질적 상금보다는 육지 구경을 원했던 것이다. 앞에서, 김만덕이 전라도와 거래를 하면서도 뭍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고 말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김만덕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육지 상륙의 특례를 인정해준 것이다. 정부에서는 정조 20년(1796)에 그가 '청와대'를 방문하고 이듬해에 금강산을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대재앙에 빠진 제주도민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고는 한양과 금강산을 돌아본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낸 것이다. 


김만덕은 1812년에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약 30년 뒤에 추사 김정희는 그를 찬미하는 은광연세(恩光衍世)라는 글귀를 남겼다. '은혜로운(恩) 빛(光)이 세상(世)에 넘쳤다(衍)'라는 뜻이다. 1840년부터 8년간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한 것이 인연이 되어 김정희(1786~1856년)가 김만덕에 관한 글귀를 남기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소재. 1948년 제주 4·3 사건 때 불타버린 것을 1984년에 현재의 상태로 복원했다. 이곳에서 김정희의 추사체가 완성되었다. ⓒ 문화재지리정보서비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기생생활을 하다가 상업에 뛰어들어 큰돈을 번 김만덕은 이웃의 대재앙 앞에서 측은지심이 즉각 발동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에게는 돈이 부모고 돈이 남편이고 돈이 전부였다. 그런 그가 '개인의 금고'에 있던 자신의 전부를 '인출'해서 '세상의 금고'에 '예금'하고 훌훌 떠나간 것이다. 


고아로서 기생으로서 세상의 천대를 받던 여인이,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 돈만 생각하며 악착같이 살던 여인이 세상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갖기는커녕 도리어 모든 것을 주고 떠났으니, 그의 측은지심이 얼마나 절절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일본을 향해 발동하는 전 세계의 측은지심을 보면서, 거상 김만덕의 마음 씀씀이를 다시금 생각해본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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