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71586
김기춘과 닮은 꼴, 닮아도 너무 닮았다
[게릴라칼럼] 세조·예종·성종·연산군 때 부귀영화 누린 유자광
15.01.12 15:17 l 최종 업데이트 15.01.12 15:17 l 김종성(qqqkim2000)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국회 나온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 '비선실세 국정농단 의혹' 규명을 위해 지난 9일 오전 열린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최근 청와대 문건 유출 파동에 대해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깊이 자성하고 있다"고 공개 사과했다. 청와대 김영한 민정수석 불출석 문제로 여야간 설전이 오가며 회의가 정회되는 등 파행을 빚자, 김 실장이 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 남소연
지난 한 해를 강타한 세월호 정국에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은 절묘하게 살아남았다. 김기춘의 질긴 생명력은 이른바 '정윤회 문건' 파동에서도 드러났다. 청와대에서 문건이 새어나갔으니 비서실장의 책임을 부정할 수 없는데도, 12일 신년기자회견에 나선 박근혜 대통령은 "당면한 현안들이 많아서 수습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김기춘 비서실장 거취는)그 일들이 끝나고 나서 결정할 문제"라고 일축했다. '세월호'에 이어 '정윤회'까지 비켜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상당히 대단한 인물이다.
김기춘의 질긴 생명력은 조선 전기의 장수 정치인인 유자광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아니, 김기춘처럼 점잖고 스마트한 인물을 어떻게 유자광 같은 간신배와 비교할 수 있느냐?"라며 "폄하하려는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간신배니 어쩌니 하는 선입견을 버리고 '정치인 김기춘'과 '정치인 유자광'을 비교해본다면, 두 사람의 삶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1939년 경남 거제에서 출생하고 5·16 쿠데타 전년도인 1960년(당시 22세)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1963년부터 5·16장학회(정수장학회의 전신)의 장학생이 된 김기춘은 검찰청·법무부·중앙정보부에 근무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체제 유지에 기여했다. 그는 도전세력으로부터 반민주 독재체제를 방어하는 데에 앞장섰다. 참고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해군 법무관 생활을 하던 시절에 장학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에 대학원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신헌법 제정에 참여한 한태연 전 공화당 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30대 초반이던 1970년대 초기의 김기춘은 박정희의 영구 집권을 위한 유신헌법 제정 작업에 핵심 실무자로 참여했다. 또 그는 1974년(35세)에 대통령을 쏘려다가 영부인을 잘못 쏜 문세광을 조사한 지 하루 만에 범행 일체를 자백 받는 실적을 거두었다.
'김기춘은 행운아'라는 말 증명한 초원복집 사건
김기춘은 이듬해인 1975년(36세)에는 가혹한 고문을 동원한 끝에 '학원침투 북괴 간첩단 사건'을 세상에 내놓는 실적도 거두었다. 이 시기의 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의 대공수사국 부장으로서 정권 유지의 최일선에서 엘리트의 길을 달렸다.
그런데 1979년(40세)에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대통령을 저격했으니, 정상적인 경우였다면 그의 인생은 1979년 10·26 사건과 함께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을 수도 있었다. 사건 발생 직후 전두환 장군의 지휘를 받는 보안사 요원들이 가장 먼저 찾은 게 김기춘이었다고 알려졌을 정도로, 10·26은 그의 인생에서 일대 위기였다.
하지만 당시 40세이던 김기춘은 '마흔 살은 불혹(不惑)'이라는 말처럼 이 위기를 절묘하게 벗어났다. '6공 황태자' 박철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박철언을 통해 신군부 실세인 허화평의 도움을 얻어 위기를 빠져나갔다. 그 후 한직으로 밀리는가 싶었지만, 그는 어느덧 다시 살아나 노태우 정권 때인 1988년(50세)에는 검찰총장에 임명되고 1991년(53세)에는 법무부장관에 임명됐다.
김기춘이 행운아라는 점은 유명한 1992년(54세) 초원복집 사건에서도 잘 드러난다. 대통령선거 직전에 부산 시내 식당인 초원복집에서 열린 비밀 대책회의에서 그는 부산시장, 부산경찰청장, 부산교육감, 부산지검장, 부산상공회의소장, 안기부 부산지부장을 상대로 "우리가 남이가?"라면서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부추겨야 돼"라며 관권선거를 촉구했다. 그는 "부산·경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 정주영이 어쩌니 하면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자"는 극단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김기춘은 이때 무너졌어야 했다. 하지만 타격을 받은 쪽은, 도청 장치를 설치해서 대화 내용을 녹음한 정주영 후보의 아들 정몽준 쪽이었다. 사건의 본질은 부정선거가 아니라 불법도청으로 바뀌었고 김기춘은 위기를 빠져나갔다.
75세에 대통령비서실장 임명... 질긴 정치생명
그 뒤에 출범한 김영삼 정권 하에서 김기춘은 1996년(58세)에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으로 변신했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3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던 중에 2004년 3월에는 국회 법사위원장 자격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의 검사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2008년(70세)에 출범한 이명박 정권 때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국회의원 공천에서 탈락하고 2009년(71세)에 비영리 공익법인인 한국에너지재단의 이사장이 됐지만, 김기춘은 2013년 8월에 75세의 나이로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됨으로써 질긴 정치적 생명력을 또다시 과시했다. 박근혜 정권 하에서 그는 고소나 소송을 무기로 자신과 청와대에 대한 공격을 차단하며 질긴 정치생명을 이어나가고 있다.
김기춘은 오랫동안 정치 생명을 이어왔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높은 관직에 오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공직 인생에서 돋보이는 자리는 검찰총장·법무장관과 국회 법사위원장이다. 검찰총장을 지낸 기간은 2년, 법무부장관을 지낸 기간은 1년 5개월, 법사위원장을 지낸 기간은 1년이다. 오래 한 것에 비하면 관직이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다. 75세에 비서실장이 된 것도 그렇다.
작년에 총리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안대희 후보자가 과거에 했던 "나는 김기춘에 비하면 발바닥, 그의 아이큐는 170대일 것"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졌다. 이렇게 주변 사람들이 능력을 인정해주는 것에 비하면, 김기춘의 관직 경력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다. 이것은 그만큼 그가 주변의 견제를 받으며 살았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런 속에서도 정치생명을 이어온 그의 수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른 살 때 국방부 국장급 자리에 오른 유자광
이 같은 김기춘의 생명력을, 조선 전기의 유자광(1439~1512년)은 이미 500년 전에 보여주고 갔다. 왕실 경호원으로 묻힐 수도 있었던 유자광을 역사무대에 데뷔시킨 것은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수양대군) 정권이었다. 계기는 조선시대판 공안 사건이었다.
▲ 조선시대 궁궐 경호부대의 수문장 교대 의식. 사진은 경복궁 흥례문 앞에서 열리는 의식. ⓒ 김종성
1467년(29세)에 함경도 호족인 이시애가 세조 정권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유자광은 세조에게 직접 상소문을 올려 반란 진압을 위한 출정을 자청했다. 이것은 경호원이던 그가 세상의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반란 진압에 나선 유자광은 현장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때부터 그는 공안사건과 체제유지라는 분야에서 이 시대의 상징적 인물로 성장해나갔다.
유자광에 대한 세조의 총애는 하늘을 찔렀다. 유자광을 정5품 병조정랑(국방부 과장급)으로 특채한 세조는 그에게 과거시험에 응시할 것을 권유했다. 그런 뒤에 세조는 그를 데리고 온양에 행차한 다음, 수행원들을 상대로 별시(특별 과거시험)를 열어 그를 장원급제자로 만들었다.
시험관 신숙주는 유자광을 합격자 명단에 넣지 않았지만, 세조의 고집에 따라 이런 결과가 나왔다. 장원 급제 뒤에 그는 정3품 병조참지(국방부 국장급)로 뛰어올랐다. 이때가 1468년, 유자광이 서른 살이었을 때다.
세조의 권유로 과거시험을 보고 세조의 '성적 조작'으로 장원급제까지 되었으니, 이 정도면 유자광이 쿠데타 정권의 장학생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대신, 유자광은 정부 관료들의 견제와 질시를 한 몸에 안으며 관직 생활을 해야 했다. 이것은 그 뒤 그의 숙명이 되었다.
유자광의 후원자인 세조는 1468년에 세상을 떠났다. 주군을 잃는 충격을 겪었지만, 유자광은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상황을 이용해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수완을 발휘했다.
세조 말년에 왕의 총애를 받는 그룹에는 한명회를 비롯한 원로 그룹과 남이 장군을 비롯한 소장 그룹이 있었다. 죽음에 가까울수록 세조는 원로그룹보다는 소장그룹을 선호했다. 하지만 세조는 소장그룹이 기반을 잡기 전에 눈을 감았다.
세조가 죽자 원로그룹은 소장그룹에 대한 반격을 준비했고, 이 상황을 이용해서 유자광은 남이를 반역자로 몰아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이를 발판으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는 무령군이란 고위 작위를 받았다.
별다른 기반도 없는 인물이 정치상황을 이용해서 위기를 극복하고 공신으로 거듭났으니 유자광의 생명력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유자광은 세조의 총애를 받은 데 이어 그 아들 예종의 총애까지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예종은 죽었지만, 유자광은 살아남았다
▲ 사림파 선비 이목을 기리는 한재당이라는 사당. 이목은 1498년에 유자광의 공격을 받아 28세 나이로 사형을 당했다. 한재당은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에 있다. ⓒ 김종성
그런데 유자광의 두 번째 주인인 예종은 오래 살지 못했다. 예종은 왕이 된 지 15개월 만에 사망했다. 참고로, 일부 서적에는 예종이 14개월 만에 사망했다고 쓰여 있지만, 이것은 예종이 죽던 해에 음력 2월에 이어 음력 윤2월이 한 번 더 있었다는 점을 살피지 못한 데서 나온 오류다.
예종이 죽었지만, 이번에도 유자광은 살아남았다. 유자광은 예종에 뒤이어 성종(세조의 손자이자 예종의 조카)이 왕이 된 직후에 정치적으로 무너질 뻔했지만, 세조의 부인인 정희대비의 비호를 받아 정치생명을 연장했다. 그 뒤 그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고소·고발의 방법을 동원해서 정적들과 싸워나갔다. 심지어는 권력자 한명회를 탄핵하는 상소까지 올렸을 정도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한 뒤에도 유자광은 살아남았다. 그는 개혁세력인 사림파에 대한 연산군의 경계심을 이용해 무오사화라는 시국사건을 만들어 개혁파 관료나 선비들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1498년(60세)에 발생한 무오사화는 사림파 지도자인 김종직의 글을 빌미로 역모사건을 일으키고 이것을 빌미로 사림파를 탄압한 사건이다. 이렇게 유자광은 공안정국을 조장하여 연산군 시대에도 정치생명을 이어나갔다.
연산군 말년에 일시적으로 권력에서 밀려난 유자광은, 연산군의 몰락과 함께 또다시 생명을 연장시켰다. 연산군 정권에 불만을 품은 박원종·유순정·성희안과 손잡고 1506년(68세)의 쿠데타에 가담한 것이다. 세조·예종·성종·연산군 시대에 부귀영화를 누린 인물이 연산군이 쿠데타로 몰락한 뒤에도 계속해서 권세를 이어갔으니, 당시 사람들은 유자광의 처세술에 경외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유자광은 오랫동안 정계에 있었지만, 능력에 비해 관직은 화려하지 못했다. 물론 품계 상으로는 높이 올라갔다. 하지만 각종 시국 사건을 주도하며 세상의 주목을 끈 것을 감안하면, 그가 오른 최고위 관직인 오위도총관·중추부지사·한성부판윤(이상 정2품 장관급)은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오위도총관은 실권이 약했고 중추부지사는 명예직이었고 한성부판윤은 지금의 서울시장이었기 때문에, 이런 관직으로는 중앙의 권력 구도를 좌지우지할 수 없었다. 품계는 최고위까지 올랐지만 관직은 그렇지 못한 것은, 군대로 치면 계급은 높은데 보직은 낮은 것과 같다.
이는 당시의 주류들이 유자광의 공로와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그에게 요직을 주기를 꺼렸던 데서 생긴 결과다. 그만큼 그는 견제를 많이 받았다. 그런 견제 속에서도 약 40년 동안이나 정치생명을 이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유자광과 김기춘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유사한 삶을 살았다. 두 사람은 여러 정권이 교체되는 격변기 속에서 무사히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개혁세력을 탄압하는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자신의 주가를 유지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고소나 탄핵을 자주 활용했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비슷하다. 또 정치생명이 길고 능력이 많은 것에 비해 관직 생활이 화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격변기 속에서 살아남은 유자광이 맞은 최후
▲ 조선시대 선비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유적지에서 찍은 사진이다. 유자광은 생애 내내 개혁파 선비들을 탄압하다가 결국에는 그들의 공격을 받고 귀양을 떠났다. ⓒ 김종성
여기까지는 김기춘과 유자광의 삶이 비슷하다. 그런데 김기춘의 정치적 마지막과 유자광의 정치적 최후가 비슷할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원칙상 여기서 끝나야 한다. 이 글에서 유자광의 정치적 최후를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유자광의 뒷이야기에 혹시라도 관심을 가질 독자들이 있을지 몰라 유자광의 최후를 간략히 적어둔다.
1506년에 유자광은 연산군을 반대하는 쿠데타 세력과 손잡고 연산군을 배신했다. 유자광은 승리감에 도취됐겠지만, 그가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연산군 정권 하에서 탄압받던 사림파 선비들이 연산군의 몰락과 함께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유자광이 주도한 공안정국에서 탄압을 받은 개혁세력이었다.
사림파는 이듬해인 1507년(69세)에 유자광을 탄핵하여 그를 유배 보내는 데 성공했다. 사림파는 유자광으로부터 신체의 자유뿐만 아니라 공신의 지위까지 빼앗았다. 사림파는 유자광의 자손들까지도 귀양을 보냈다. 유자광을 완전히 무장 해제시킨 것이다.
그 뒤 유자광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했다. 그는 1512년(74세)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그는 비참함과 쓸쓸함 속에서 정치생명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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