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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배신’ 신뢰 잃은 미국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호수 632 승인 2019.11.01 15:36 


시리아에 주둔한 미군이 철수함으로써 이슬람국가 소탕전에 참여해 수많은 희생자를 낸 쿠르드족이 위기에 처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 고립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리아 주둔 미군 철수’에 따른 플랜 B를 마련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위는 10월7일 시리아 국경 지역을 이동하는 미군. ⓒAP Photo


“이슬람국가(IS)를 100% 격퇴했기에 시리아에서 미군을 철수시켰다. 쿠르드족을 보호하려면 시리아와 알아사드 대통령이 나서라. 우린 그들과 7000마일(약 1만1265㎞)이나 떨어져 있다!”


국제 테러조직 이슬람국가에 맞서 2014년 이후 미국의 동맹으로 적극 활동해온 쿠르드족을 겨냥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매정한 발언이다. 그는 한때 쿠르드족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이랬던 그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이자 미국의 우방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과 10월6일 통화한 직후 시리아 북부 쿠르드족 자치지역에서 미군을 철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자 터키는 쿠르드족 소탕 작전에 나섰다. 시리아를 지원해온 러시아 군대는 미군이 떠난 쿠르드 지역으로 진입했다. 미군 철군 결정에 따른 최대 수혜자는 시리아와 러시아, 이란, 그리고 이슬람국가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쿠르드족은 터키 동남부, 이란 서북부, 이라크 북부 및 시리아 북부 지역에 사는 유랑 민족으로 3000만~4500만명으로 추산된다. 특히 터키에는 최대 2000만명의 쿠르드족이 집단 거주한다. 터키는 시리아 북부에 근거지를 둔 쿠르드족 민병대를 반(反)터키 ‘테러 집단’으로 간주해 호시탐탐 소탕 기회를 엿보아왔다. 그러던 차에 에르도안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해당 지역의 미군 철수 결정을 통보받자 사흘 만에 군사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 민병대는 2014년 이후 미국의 이슬람국가 소탕전에 적극 참여해왔다. 무려 1만여 명의 전투병이 목숨을 잃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9월 트위터에 “그들은 위대한 전사들이다. 아주 마음에 든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이슬람국가와 싸우다 수천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들은 위대한 국민이며 우린 그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라며 극찬했다.


배신당한 것은 쿠르드족만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을 경시한 사례는 많다. 지난 8월에는 우방인 우크라이나에 4억 달러 군사 원조를 하려다 갑자기 중단한 적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민주당의 차기 대선 주자 조지프 바이든 전 부통령의 비위 혐의를 조사해달라고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요구할 무렵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성된 나토 회원국에 미군을 주둔시킬 실효성이 있는지 문제를 제기해왔다. 한국 및 일본과의 군사동맹에 대해서도 미군 주둔으로 엄청난 비용이 든다며 끊임없이 불평했다.


10월11일 시리아 국경도시 탈아브야드의 쿠르드족 주민들이 피란길에 오르고 있다. ⓒAFP PHOTO


시리아 주둔 미군 철군은 제2의 애치슨라인


트럼프 대통령이 미군 철군의 명분으로 내건 이슬람국가는 궤멸되었나? 이슬람국가의 병력은 최소 수만에서 최대 20만명으로 추산되었다. 2014년 중반 미국 주도의 국제연합군이 소탕 작전에 들어갔는데, 지난 3월에는 시리아와 이라크 내 이슬람국가의 핵심 지역이 함락되면서 사실상 소멸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남은 세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 대체적 관측이다.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의 로버트 매닝 선임연구원은 트위터에 “이슬람국가가 100% 궤멸됐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왜 아직도 이들 잔재 세력이 시리아에 있나?”라고 반문했다.


지난 3월 이후 이슬람국가 잔당을 소탕하는 데 주력해온 쿠르드족 민병대들이 터키군에 속수무책으로 패퇴하면서 이들의 감시를 받아온 이슬람국가 대원들이 포로수용소에서 여러 차례 폭동을 일으켰다. 잔당들의 은신처가 확대되면서 ‘이슬람국가의 재건은 시간문제’라는 관측까지 나온다. 지난해 12월 트럼프 대통령이 내린 시리아의 미군 철수 결정에 반발해 사임한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은 NBC 방송에서 “미국이 터키에 (쿠르드족에 대한) 군사작전을 중단하라고 압박하지 않으면 이슬람국가는 반드시 재기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미국 주요 언론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몇 달 전부터 참모들로부터 ‘철군을 결정하면 엄청난 후유증이 따를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으나 무시했다. 철군 이외의 다른 대안, 즉 ‘플랜 B’도 마련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뒤늦게 철군에 따른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트럼프 대통령은, 터키에 대해 ‘군사작전을 중단하지 않으면 1000억 달러 규모의 무역협상 중단과 함께 철강 관세를 50% 인상하겠다’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또한 펜스 부통령과 로버트 오브라이언 국가안보보좌관을 터키에 급파해 쿠르드족과의 휴전에 동의하도록 압박했다. 쿠르드족 소탕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터키가 순순히 응할지는 미지수다.


미국은 2011년 이후 8년째 지속되며 국제전 양상을 빚고 있는 시리아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시리아에서 이슬람국가와 친이란 세력을 축출하는 것이 당면 목표였다. 그런 다음에는 알아사드 정부와 다른 세력들을 타협하게 해 대다수 정치세력을 아우르는 범정부를 탄생시켜야 한다. 쿠르드족이 장악한 시리아 북부 지역은 시리아 원유의 65~70%가 매장되어 있다. 미국은 한때 이 매장량을 알아사드 정부와의 협상 지렛대로 활용할 계획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미군 철수로 계획 자체가 불투명해져버리고 말았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결정을 1950년 1월 당시 해리 트루먼 공화당 행정부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 ‘애치슨라인’에 비유했다. “애치슨라인으로 한반도가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됐다. 2주 뒤에 소련 지도자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한을 침범해도 좋다는 신호를 준 것과 무관하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묵인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면, 터키가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 지역에 군대를 보낼 수 있었을까?”


외교 전문가 대부분은 취임 후 계속되어온 트럼프 대통령의 동맹국 경시와 예측 불가능성이 이번 철군 결정에서 노골화되며 미국의 신뢰도가 또다시 추락했다고 본다. 공화당 소속 그레이엄 상원의원은 “미국이 쿠르드족을 포기함으로써 전 세계에 ‘미국은 신뢰할 수 없는 나라’라는 가장 위험한 신호를 보냈다”라고 지적했다. 공화당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도 “이란과 러시아 같은 우리의 적들은 동맹을 버리지 않는다. 동맹국들이 향후에도 미국과 한편이 되길 바란다면, 우리부터 그들을 버려선 안 된다”라고 말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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