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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 세력 등용…신라와 불가침조약 체결

왕릉으로 읽는 삼국역사 <37> 백제 동성왕

기사입력 2020. 09. 23   15:56  최종수정 2020. 09. 23   15:58


가야·왜 등과 화친 유지하고 중원 남제와 외교 수립 나서. 대륙 백제 북위에 대승 거둬 

세력 강해진 금강 신진 세력, 왕권 위협하다 결국 왕 시해


공주 공산성 정상에서 바라본 금강. 동성왕이 강변을 자주 거닐며 국정을 구상하던 곳이다. 필자 제공


당시 백제 조정의 실세는 외척 해구(생몰년 미상·병관좌평)였다. 병권을 장악한 그는 왕권까지 능멸하며 온갖 횡포로 국정을 농단했다. 용상이 위태로워지자 문주왕은 왜에 인질로 가 있는 동생 곤지(?~477)를 귀국시켜 내신좌평을 제수했다. 곤지는 백제·왜와의 외교 관계를 원만히 조율해 전쟁을 억제했다. 격분한 해구가 곤지를 살해하고 왕마저 시해했다. 대역을 주도한 해구는 13세 된 왕의 장남 임걸(壬乞)을 23대 삼근왕(재위 477~479)으로 즉위시켰다.


이반한 민심을 감지한 다른 외척 진남(생몰년 미상·좌평)이 해구를 주살하고 전면에 부상했다. 그는 또 다른 모의를 획책했다. 삼근왕이 15세로 유충한 데다 혈육은 어린 동생뿐이어서 왕실은 무주공산이었다. 진남은 왜에 거류 중인 모대(牟大)를 귀국시켜 24대 동성왕(東城王·재위 479~501)으로 즉위시킨 뒤 삼근왕을 살해했다. 동성왕은 해구에게 참수당한 곤지의 둘째 아들로 삼근왕과는 사촌 간이었다.


동성왕의 계보는 31대 의자왕(재위 641~660)으로 승계되는 백제 말기의 왕통 전환점이어서 간략히 기술한다. 21대 개로왕에게는 두 동생(문주·곤지)이 있었다. 왕은 고구려·신라에 점령당한 영토 회복을 위해 왜왕한테 원군을 요청했다. 왜왕이 인질을 요구하자 둘째 동생 곤지를 차출했다. 격분한 곤지가 형수와 동행하겠다고 버티자 왕은 임신 중인 후궁(성씨 미상)을 함께 보냈다. 개로왕 7년(461) 왕은 “왜에 도착 전 출산하면 아이와 형수를 돌려보내라”고 곤지에게 당부했다. 곤지는 자신의 어린 아들 다섯과 왜로 떠났다.


왜로 가던 도중 곤지 형수가 축자국(일본 북큐슈 지역) 각라도에서 왕자를 출산했다. 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이다. 곤지는 형수와 왕자를 귀국시켰으나 개로왕은 왕자만 수용하고 후궁은 곤지에게 돌려보냈다. 무령왕을 ‘시마왕’ 또는 ‘사마왕’의 별명으로 호칭함은 섬(島·시마)에서 태어났다는 일본어 뜻이 내포돼 있다. 곤지는 무령왕의 숙부이며 양부이기도 하다.


5세(461) 때 곤지를 따라 왜에 간 모대는 23세(479)의 청년이 되어 왕의 신분으로 환국했다. 『삼국사기』에는 ‘모대가 담력이 뛰어나고 활 솜씨가 대단한 신궁이었다’고 간단히 기록돼 있다. 동시대 『일본서기』에는 ‘웅략 천황이 곤지를 친히 궁중으로 불러 백제왕으로 삼았다. 축자국 군사 500명을 호위시켜 백제에 보냈다’고 기술돼 있다. 모대는 곤지의 다섯 아들 중 왜왕의 천거로 백제 24대 왕에 즉위한 것이다.


왜에서 성장기를 보내며 국제적 감각을 익힌 동성왕은 총명했다. 신라·왜국 간 전쟁이 발발할 때마다 국익에 따라 요동치는 백제·가야의 거중 조정을 유심히 관망했다. 중원(중국) 강국과 고구려에 대한 왜 조정의 등거리 외교술을 목도하며 공격보다 방어를 위해 국력을 신장해야 함도 터득했다. 왕은 백제 조정 내 외척 간 권력 암투와 한성 왕실에 대한 웅진 토반들의 조직적 항거도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왕은 공산성 금강 변을 거닐며 고뇌하는 날이 부쩍 늘었다.


왕은 과단성 있게 국정을 운영했다. 금강 유역을 기반으로 형성된 신진 세력을 대거 등용해 한성 귀족과 권력 균형을 유지토록 했다. 왕 15년(493) 신라 소지왕(21대·재위 479~500)에게 혼인 동맹을 요청하자 신라왕은 이찬 비지의 딸을 보내 화답했다. 왕은 비지의 딸을 세 번째 왕비로 맞이하고 양국 간 불가침 조약까지 체결해 국경을 안정시켰다.


왕은 백제의 국제적 고립 타개를 위해서는 남제(479~502·중국 남북조시대 남조의 4국가 중 하나)와의 외교 수립이 절실함을 깨닫고 수차례 사신을 파견했다. 서해 제해권을 장악한 고구려 수군의 극력 저지로 번번이 실패하자 우회로로 입국시켜 기어이 성사시켰다. 고구려 20대 장수왕(재위 413~491)은 1년에도 수차례씩 남제에 사신을 파견해 백제와의 교빙을 훼방했다. 다행히 가야·왜와는 일찍부터 화친 관계를 유지하며 교역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공산성 안의 너른 분지. 궁궐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고 있다. 필자 제공


동성왕 5년(483)에는 한성을 순방해 웅진 천도로 인한 북방 백성들의 소외감을 해소하고 변경 수비군을 찾아 위무했다. 국경 도처마다 새 성을 축조해 적군 침공에 대비하고 낡은 성은 중수했다. 금강에는 웅진교를 개설(498)해 교통 편의를 증대시켰다. 고구려·말갈 연합군이 백제·신라를 침공하면 백제·신라군이 상호 협공해 적군을 패퇴시켰다.


동성왕의 치세 중 괄목할 점은 왕 12년(490) 중원 대륙에서 수십만 명의 북위군을 괴멸시킨 전승 업적이다. 북위(386~534)는 남북조시대 북조의 맹주로 남제와 중원 대륙을 분할 통치하며 고구려와 각축을 벌이던 초강대국이었다. 488·490년 2차에 걸친 산둥반도의 접전에서 백제가 모두 승리했다. 이는 대륙 백제의 실체를 역사적으로 입증하는 사실(史實)로 사학계에서도 주목하는 전사 기록이다. 백제·북위 전쟁에 관한 『남제서』 내용이다.


‘위나라 오랑캐가 기병 수십만을 일으켜 백제 경계 안으로 들어갔다.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로 하여금 군사를 통솔시켜 오랑캐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남제서』는 남조 양나라(502~557) 때 소자현이 지은 사서로 남제의 23년(479~502) 역사를 찬술한 정사이다. 반면 『삼국사기』의 동성왕 10년(488) 기사에는 ‘위나라가 우리(백제)를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고 간단히 언급돼 있다. 『삼국사기』는 고려 18대 인종 23년(1145) 김부식을 비롯한 11명의 학자가 편찬한 삼국시대 정사이다.


동성왕 재위 시에도 난관은 허다했다. 왕 13년(491) 6월 대홍수로 왕경의 200여 호가 유실됐고, 동년 8월에는 혹독한 가뭄으로 600여 호가 신라로 이주했다. 왕 21년(499)에는 대기근이 들어 한성 이북 백제 2000여 호가 고구려로 탈출했다. 백성들의 무단 월경이나 포로 나포는 곧 군사력·노동력의 상실이어서 국가 간 전쟁으로 비화할 때다. 이 판국에 탐라(제주도)가 조공을 중단하고 독자 노선을 주창했다. 진노한 동성왕이 무진주(광주)로 출정해 탐라 정복에 나섰다. 다급해진 탐라 왕이 극구 사죄하자 왕이 이를 가납했다.


동성왕은 대륙 백제의 고토 회복이 성사되자 대제국 건설 야망을 실현코자 했다. 웅진 천도 이후 위축된 왕실의 지배 기반 확충 방안으로 왕족 부여씨를 조정 요직에 전면 배치했다. 대궐 안에 누각을 짓고 호화 연회를 열어 사치와 향락에 탐닉했다. 이 간극을 파고든 신진 세력이 점차 막강해져 왕권까지 위협했다. 왕은 위사좌평으로 임명(486)한 신진 수장 백가(생몰년 미상)를 지방의 가림성 성주로 좌천시켜 격리했다. 이게 화근이었다. 앙심을 품은 백가가 사비서원(충남 부여)에서 사냥 중인 왕을 시해했다. 전제 왕권에 대한 신진 귀족의 조직적인 역모였다. 왕의 가족과 능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있다.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475)한 백제 22대 문주왕(재위 475~477)은 사면초가였다. 한성에서 이주해온 왕족 부여씨와 귀족들은 거주지와 농지 배분을 성급히 요구했고 왕실의 외척 해씨·진씨는 수백 년간 누려온 기득권 상실 우려에 주야장천 사생결단이었다. 백제 건국(BC 18) 이전부터 웅진에 살아온 토반(土班)들은 “나라를 잘못 지킨 패자들이 하필 이곳에 와 주인 행세하느냐”며 한성 백제인들을 배척했다. 왕은 아직도 궁궐을 영건(營建·집이나 건물을 지음)하지 못해 행궁에 거처하고 있었다.


<이규원 『조선왕릉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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