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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 이야기 - 해설난중일기 26] 꿩 사냥편
일요서울 입력 2015-12-28 10:50 승인 2015.12.28 10:50 호수 1130 54면
- 꿩 사냥·꿩고기 즐긴 조선 사람들
- 매 조선 특산품 명나라·일본 빈번히 요구
<떠오르는 해, 위엄있는 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순신은 한편에서 연일 전쟁 준비를 했다. 그 와중에도 어김없이 다가온 봄날을 부하장수들과 함께 즐기기도 했다.
▲ 1592년 2월 11일. 맑았다. 식사를 한 뒤, 배 위로 나가 새로 뽑은 군사를 점검하고 검열했다.
▲ 1592년 2월 12일. 맑았고, 바람도 고요했다. 식사를 한 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해운대로 옮겨 앉았다. 훈련용 화살을 쏘았다. 사냥한 꿩을 물에 가라앉히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주 조용했다. 군관 무리들은 모두 일어나 춤을 추었다. 조이립은 시를 읊었다. 석양을 타고 돌아왔다.
2월 11일 일기는 복무기간이 끝난 군사들을 대신해 새로 입대한 군사들의 갑옷과 무기, 식량을 점검했다는 기록이다. 이 시기에는 오늘날과 달리 입대자 자신이 직접 준비해야 했다. 2월 12일(양력 3월 25일) 일기는 공무를 끝마치고, 잠시 한가하게 봄볕을 즐기는 모습이다. 일기속의 해운대(海雲臺)는 부산에 있는 해운대가 아니다.
전남 여수시 동북 쪽에 있는 작은 반도다. 노산 이은상 선생에 따르면, 이 해운대 절벽에는 이순신이 직접 쓴 “海雲臺(해운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여수 외항을 축조할 때 파괴되어 지금은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나라를 빼앗긴 힘없는 민족, 개발을 위해 무엇이든 파괴했던 지난 시대의 무자비한 단면이다.
필자가 번역한 “사냥한 꿩을 물에 가라앉히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觀沈獵雉, 관침렵치)”라는 부분은 번역자마다 번역이 제 각각인 부분이기도 하다. 홍기문은 “사냥한 꿩을 바다에 잠구는 것을 구경했는데 아주 절차가 그럴 듯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주석에 “사냥한 꿩을 잠군다는 것이 무슨 민속인지 미상하다”라고 특기했다. 이은상과 노승석(2005년 번역본)은 원문인 “沈獵雉(침렵치)”를 그대로 옮기면서, 주석에 “무사들의 놀이인 듯한데 미상하다”라고 불분명하게 번역했다. 최두환은 “침렵치라는 운자(韻字)를 띄워봤더니 너무 조용했다”라고 번역하면서 시를 짓는 모습으로 보았다.
군사 동원해 꿩 70여마리 잡기도
그러나 전후 상황과 이순신의 다른 기록, 조선시대의 다른 일기와 음식문화 측면에서 추측해 보면, 이날 일기는 꿩을 사냥해 먹는 풍속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순신의 1594년 2월 8일 일기에도 “꿩 7마리를 사냥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날과 거의 비슷한 시기다. 또한 이순신과 같은 시대를 살며 일기를 썼던 오희문은 193년 4월11일 일기에서, 화살을 쏘아 꿩사냥을 하는 사람을 불러 꿩을 잡게 했으나, 꿩 대신 숲속에서 잠자는 노루를 잡았다고 기록했다.
함경도에서 국경을 지켰던 박계숙의 1606년 10월 29일 일기에서는 군사들을 동원해 꿩사냥을 했고, 24마리를 잡았다고 한다. 또 같은 해 11월 2일에는 60여 마리, 11월 16일에는 70여 마리를 잡았다고 한다. 이순신이 머물렀던 남쪽 지역과 달리 함경도에서는 꿩이 아주 많았던 듯하다. 꿩은 우리말로 수컷은 ‘장끼’, 암컷은 ‘까투리’라고 부른다.우리 선조들은 꿩을 박계숙의 기록처럼 화살을 쏘아 잡거나, 매를 날려 잡았다(성종 22년 11월 3일, 선조 39년 4월 7일). 《난중일기》에도 매가 나온다.
▲ 1596년 2월 6일. 적량 만호 고여우가 큰 매를 팔에 얹고 왔다. 그런데 오른 발이 다 얼어 문드러졌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는 활로 꿩을 잡는 방법이 나온다. 늦은 봄에 총이나 활을 갖고 숲에 숨어 뼈나 뿔로 만든 피리로 장끼 울음소리를 내면, 그 때 장끼가 듣고 가까이 날아올 때 쏘아 잡는 방식이다.
《난중일기》에는 매를 활용해 꿩사냥을 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다른 사람들의 기록에는 매를 사용한 경우도 많다. 유희춘의 1576년 2월 13일 일기에는 매로 꿩 2마리를 잡았다고 한다. 오희문의 1595년 11월 17일 일기에서는 “즉시 매를 날렸더니 수꿩 한 마리를 잡아왔다”, 1597년 11월 5일 일기에서도 “매를 날렸는데, 전풍의 매는 꿩 2마리를 잡았다. 작은 매는 4마리를 잡았다”고 했다. 김종의 1592년 12월 19일 일기에서는 눈이 많이 내려 매를 날리지 못했지만, 1593년 1월 7일 일기에서는 매를 날려 꿩을 잡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식재료
조선시대에는 매의 종류를 상세히 구분하기도 했다. 특히 세종은 도화원에 명령해 매를 그리게 하여 각 도에 내려 보내 진상케 했다. 7종류의 매가 있었다(세종9년 2월 21일). 첫째는 귀송골(貴松骨) 혹은 옥해청(玉海靑)이다. 털과 깃, 부리와 발톱은 희지만, 눈과 날개 끝은 검은 색이다. 둘째는 거졸송골(居辣松骨) 혹은 노화해청(蘆花海靑)이다. 흰색 바탕에 녹두알 크기의 검은 점이 박혀 있다. 눈과 날개 끝은 검은 색이나, 부리와 발톱은 푸른색이고, 다리와 발은 엷은 청색이다.
셋째는 저간송골(這揀松骨)이다. 흰색 바탕에 개암 크기의 검은 점이 있다. 눈과 날개 끝은 검은 색이고, 부리와 발톱은 약간 검지만, 다리와 발은 엷은 청색이다. 넷째는 거거송골(居擧松骨)이다. 약간 검은색의 등에 녹두알 크기의 흰 점이 있다. 가슴과 배 아래는 약간 노랗고 흰색 점이 있다. 다섯째는 퇴곤(堆昆)이다. 털과 깃은 희지만, 부리와 발톱은 검다. 다리와 발, 눈은 노랗다. 깃에 약간 노란 점이 있는 경우도 있다. 여섯째는 다락진(多落進)이다. 흰색 깃에 검은 점이 있다. 눈은 노랗다. 일곱째는 고읍다손송골(孤邑多遜松骨)이다.
매는 조선 특산품으로 명나라와 일본에서도 매를 빈번히 요구했다. 명나라 사신이 올 때면 전국에서 매를 잡아 진상해야 했다. 매가 귀했기에 진상을 하면, 관직이 없는 사람에게는 8품을 주었고, 관직이 있는 사람인 경우에는 한 등급을 승진시켜주기도 했다. 태조 때에는 붙잡은 매를 전문적으로 기르는 응방을 한강가에 설치하기도 했다.
우리 선조들은 매를 어떻게 잡았고 무엇을 먹여 키웠을까. 오희문의 일기가 가장 자세하다. 산속에 닭을 미끼로 그 주변에 매를 잡는 그물을 쳐서 잡았다(1598년 10월 8일). 가끔은 매 대신 토끼 같은 것이 그물에 걸리기도 했고, 또 그물에 걸린 매가 그물로 인해 날개를 상하게 된 경우도 많았다. 잡은 매의 먹이로는 닭이나, 고양이, 참새알 같은 것이 있었다. 매를 날릴 때에는 방울을 달아놓았다.
조선시대 음식 조리법이 기록된 《음식디미방》에 따르면, 꿩고기는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식재료다. 꿩고기 다음 순서로 개고기와 닭고기, 쇠고기, 돼지고기가 언급될 정도다. 꿩고기는 홍만선(1643~1715)의 《산림경제》에 따르면, 겨울철에 잡아 바깥에서 얼린 다음에 회를 쳐서 꿀을 찍어 먹거나 양념장을 만들어 찍어 먹었다고 한다. 결국 《난중일기》의 기록은 사냥한 꿩을 차가운 물에 담가 핏기를 빼고 회를 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일요서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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